식민 지배, 친일파, 외세 개입 닮은 역사
한국 군사정권의 짝퉁 후지모리 정권
후발국들에 일반적인 잔혹한 ‘훈타’ 체제
선거제도와 정당체제 바꿀 사람이 없다
다음은 후지모리 장녀 게이코 후지모리?
카스티요 탄핵, 또 다른 위기의 시작
페드로 카스티요 탄핵은 페루 정치 위기의 끝이 아니다. 사태가 개선되기보다는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최악의 경우 7만여 명의 페루인들, 특히 농촌과 광신지역 사람들의 목숨을 무수하게 앗아간 1980~90년대의 폭력시대로 되돌아가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
이는 잡지 <포린 폴리시>(12월 16일)가 내린 진단이다.
이 기사는 그 이유로 다음 세 가지를 꼽고 있다. 첫째, 카스티요 탄핵이 정당하냐 아니냐는 것은 차치하고, 그의 탄핵이 스페인 식민지배 이후 더욱 궁지에 몰렸고 독립 뒤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부터도 득을 본 게 없는 페루의 수많은 하층민들의 반체제 감정을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둘째, 페루의 지금 선거제도와 정당체제로는 집권세력과 의회 간의 대표성 없는 정치공세와 무의미한 충돌만 거듭될 뿐 인민의 절박한 요구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트 기득권자들의 무절제한 욕심 때문에 그 제도와 체제를 바꾸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것이다. 셋째, 리더십 부재를 메워 줄 사람도 정당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극적인 전환의 계기를 만들지 못하는 한, 새 권력자와 정부를 또 세워봤자 지금과 같은 유사 사태, 특히 2016년 이후 6번째 대통령이 들어선 지금과 같은 정치 위기는 더욱 악화될 게 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좌우파의 갈등이나 대립 문제가 아니다. 권력을 잡은 세력이 좌파든 우파든 별 상관이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유럽 식민지배와 그 외부세력에 맞서 싸우거나 영합한 내부세력의 분열, 그런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는 중남미 과거사 속에서 더 분명한 원인을 발견할 수도 있다. 우리로 치면 결국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 그리고 ‘친일파’ 얘기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외부 침략세력과 내부 영합세력간 길항의 역사 속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최근의 ‘페루 사태’는 한국 근대사의 페루 버전이며, 한국 근대사는 페루 사태의 한국 버전일 수 있다.
문을 연 알베르토 후지모리와 게이코 후지모리
지금 페루 정치위기의 한복판에 있는 세 사람의 유력 정치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게이코 후지모리(47)다. 2021년 4월 대선 때 카스티요와 결선투표까지 가서 아주 근소한 차이(득표율 50.195% 대 49.875%)로 졌다. 다음 대선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카스티요 뒤를 이은 디나 볼로아테르 대통령은 대선 시기를 예정보다 앞당기겠다고 했지만 아직 알 수 없다), 차기 대선에서도 대통령에 당선되거나 2등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이코는 지금 자신의 정치생명을 끊어 놓을지도 모를 돈세탁 등 부패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있어서 면책을 위해서라도 대통령이 돼야 한다.
그가 더 필사적으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1990~2000년에 페루 대통령을 지낸 뒤 지금 살인 등 인권유린과 뇌물죄 등 부패 혐의로 25년 징역형(항소 중)을 살고 있는 알베르토 후지모리를 사면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는 대통령이 돼야 한다. 게이코는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장녀고, 1994년부터 2000년 후지모리가 대통령을 그만둘 때까지 이혼한 어머니 대신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한 그의 추종자다.
따라서 오늘의 페루사태 내지 페루의 정치 위기를 이야기하려면, 알베르토 후지모리(이하 후지모리로 통칭) 얘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통령이 된 규슈 구마모토 출신 이민자의 아들
규슈 구마모토에서 1934년에 페루 수도 리마로 이주해 봉제업을 하던 일본인 가정의 장남 후지모리는 라 모리나 국립농과대학 수학과 강사, 교수를 거쳐 1984년에는 그 대학 총장자리에까지 올랐다. 교수 시절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유학한 뒤 포드 장학금을 받아 다시 미국으로 가 위스컨신대 밀워키 캠퍼스 대학원에서 일반수학과 물리학 석사를 받았다. 모교의 총장이 된 그는 페루 국영TV 토론프로를 진행하기도 했다.
1990년 대통령선거 때 신당 ‘변혁 90’(캄비오 노벤타)을 결성해 출마한 그는 나중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2010년)가 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누르고 당선됐다. 그는 전임 대통령 알란 가르시아에 실망하고 유명인 바르가스도 의심하던 페루 엘리트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일, 과학기술, 근면’이라는 구호 아래 중국계를 총리에 앉히는 등 페루 정계의 부패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동아시아 이미지도 활용했다. 그때 치노(chino)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원래 중국인이라는 뜻의 치노는 페루에서는 친밀감과 야유가 섞인,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 됐다. 나중에 후지모리는 ‘치노체트’로도 불리게 되는데, 체트는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다.
독재자 ‘치노체트’ 몰락을 예비한 성공
대통령이 된 후지모리는 대규모 경제개혁을 실시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의 자세한 지침에 따라 국유재산들을 대량 매각(민영화)했으며, 석유 천연가스 광물 등의 자원 개발에 외국자본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이를 위해 안데스산맥 등지의 보호지구 개발 규제도 폐지했다.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인데, 그 결과 페루 거시경제는 일단 안정을 찾았고 무역도 증대되는 등 괜찮은 성적을 올렸다. 그 덕에 ‘후지 쇼크’라는 호평을 듣기도 했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후지모리는 의회 의석 3위의 바르가스 요사의 당 다음 순위였던 집권당의 의석(하원 180석 중 32석, 상원 62석 중 14석)으로 인한 불편과 불안을 일거에 잠재우고 자신의 야심찬 ‘개혁’을 일사천리로 추진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1992년 4월 5일 밤에 후지모리는 공화국 의회를 해산하고, 사법권 활동을 중지시켰다. 도시들에는 군대를 배치해 주요 민주주의 기관의 본부와 정부 반대파 주택을 포위하고, 언론사들을 습격해 기자들을 납치 구금했다. 이 때문에 한국의 군사정권처럼 계속 정통성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이후 무려 8년간 절대권을 휘두르는 독재자 ‘치노체트’로 군림했다.
1992년 11월에 군 일부가 민주주의 회복을 명분으로 궐기했다가 진압된 뒤 후지모리는 ‘긴급국가재건정부’를 선포했다. 다음해에는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해 52.24%를 얻자 새 헌법을 공포해 본격적인 독재체제를 가동했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이른바 '유신헌법' 공포와 종신집권으로 향해 가던 '유신체제'도 그랬듯이 모든 독재체제의 장기집권 전략은 대체로 비슷하다. 그리고 결국 실패라는 비극적 결말로 끝난다는 점도 그렇다.
좌파 반정부 무장세력 등 비판세력 탄압
후지모리 정권 초기에 이에 반발한 마오쩌둥주의계 좌파 게릴라 ‘센데로 루미노소’(빛나는 길)와 체 게바라계 투팍 아마로 등의 혁명운동이 일어나자, 후지모리는 경찰과 군대를 중심으로 ‘반(反)반란작전’을 세우고 ‘반파괴적 민간방위위원회’ 등 대테러 조직들을 만들어 유혈진압에 나섰다. 그 와중에 국립교육대학 기숙사에서 야밤에 학생과 교수 9명이 납치,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센데로 루미노소를 제압하기 위해 설립한 준군사조직 ‘콜리나 부대’가 자행한 ‘더러운 전쟁’의 하나였다.
후지모리는 이처럼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우며 정치적 반대세력 제거 작업을 10년간 집요하게 펼쳤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인권유린이 자행됐음은 우리의 지난 역사를 잠시 돌아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주로 페루의 농촌이나 광산지역 주민들 무려 7만여 명이 '좌파 척결'이라는 미명 아래 반대세력의 거점과 뿌리를 잘라내려던 '더러운 전쟁'의 희생자가 됐다.
‘3선 개헌’으로 대선 출마 강행, 비판세력과 언론 탄압
1995년 대선에서 후지모리는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 전 유엔 사무총장을 누르고 재선됐다. 1996년엔 대통령 3선을 위한 ‘헌법의 진정한 해석법’을 제정하는 등의 편법을 써서 ‘3선 개헌’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2000년 대선의 후보가 됐다. ‘3선 개헌’이라니, 이 역시 우리에겐 귀에 익은 용어다. 1996년 12월에 투팍 아마루의 페루 주재 일본대사관저 인질사건이 일어나자 후지모리는 페루군 코만도 부대를 투입해 진압했으나, 그의 독재적 행태에 대한 비판도 점차 커져갔다.
이 모든 공작들과 인권 유린, 정부 과오를 숨기고 비판을 차단하기 위해 후지모리는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다. 주요 언론사 사장들 대다수를 뇌물로 매수, 회유해 늘 정권에 유리한 보도만 나가게 했다. 이를 담당한 자가 보이지 않는 권력자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국가정보국 고문이었다. 그는 정부 비판 언론인을 해고하고 그를 살해하기 위한 ‘베르무다스 계획’을 후지모리에게 보고했다. 비판적 방송인들의 페루 국적을 박탈하고 국외로 추방했으며, 후지모리에 반대하는 소규모 독립신문의 자금줄까지 추적했다.
1996년에서 2000년까지 강제 피임정책까지 펴 약 33만명이 불임수술을 받았는데, 그들 중 30% 정도는 사전동의도 얻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안데스와 아마존 지역의 저소득층 주민들에 대해서는 강제 불임수술 할당량까지 시달됐다. 놀랍게도 이 비인도적인 우생학적 강제피임정책에 미국국제개발국(USAID)과 유엔 인구기금(UNFPA), 일본재단 등이 돈을 댔다.
초라한 대선 승리, 몰락의 시작
2000년 대선에서도 후지모리는 승리했으나, 그것은 곧 몰락의 시작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 부패 사건들이 터지고 인권 유린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도 거세진데다 경제마저 불황에 빠져들면서 그의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다. 거기에다 무리한 3선 개헌의 상처, 1차 투표 개표작업 과정에서 드러난 부정 조작 사건, 투명성 제고와 선거 연기를 요구한 국내외의 비판 여론에 귀를 막고 강행한 결선투표, 이에 대한 다른 후보의 결선투표 보이콧 등으로 그의 승리는 초라했다.
그리고 3기 임기 시작 직후인 2000년 9월에 그의 심복 몬테시노스 정보국 고문이 야당 의원들을 매수하기 위해 뇌물을 건네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후지모리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몬테시노스는 1500만 달러의 현금을 보수로 받고 정치적 망명처를 찾아 파나마로 도망갔으나 거절 당하고 베네수엘라로 갔다가 체포돼 페루로 송환됐다.
국외 도주
그 다음에 도망칠 자는 후지모리였다.
2000년 11월 13일 브루나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APEC) 정상회담에 참석한 후지모리는 쿠알라룸푸르를 거쳐 도쿄로 간 뒤 뉴오타니 호텔에 계속 머물다 페루 의회 의장에게 대통령직 사임서를 팩스로 보냈다.
이후 그는 체포와 구금, 재판, 석방, 재구금 등 지리멸렬한 과정을 거쳐 인권 유린과 부패 혐의로 25년 형을 받고 구금돼 지금도 재판을 받고 있다. 84살인 그는 아직도 자신에게 페루 정부가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다는 걸 법정에서 보여 주겠다”며 큰소리치고 있다고 한다.
전형적인 ‘훈타’ 체제
후지모리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과 페루의 부패 역사와는 다소 이질적인 동아시아인 이미지 덕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벼락 출세’를 설명하긴 어렵다. 거기에는 15세기 무렵 아메리카 최강의 제국을 건설한 잉카제국에 1532년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 군대가 들어와 제국을 파괴하고 식민지배하면서 시작된 참혹한 식민 착취의 역사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뒤틀린 잔재들이 강력하게 작용했다. 19세기 초 남미에 독립전쟁 바람이 몰아칠 때 왕당파의 보루로 남아 있던 페루의 상류층은 그때까지도 해방과 복종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시몬 볼리바르 혁명군이 밀고 들어올 때까지 머뭇거렸다.
오랜 외부 식민지배에 영합하고 적응한 내부 세력과 거기에 저항하거나 소외당한 세력 간의 분열,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과거가 그 뒤의 페루 역사, 곧 권위주의 정권, 군부정권, 민주화됐다가 다시 권위주의 정권으로 되돌아가면서 반대와 지지 속에 재분열되고 게릴라 전쟁까지 겪게 되는 폭압과 정변과 격심한 빈부격차, 마약, 가난과 혼란의 역사를 만들었다. 후지모리는 그런 좌절과 갈망의 토양 위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후지모리 정권은 중남미의 폭압적인 군사정권을 지칭하는 ‘훈타’(위원회) 지배와 별로 다를 게 없다. 군·경·검 연합에 IMF 등 국제기구와 그 뒤의 미국 등 서방 외부세력 지원으로 짜여진 후지모리 체제의 훈타적 성격의 또 다른 전형이 한국의 군사정권이다. 이른바 제3세계로도 불린 전 세계 자본주의 후발국(개도국)들의 훈타 체제는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일반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카스티요 탄핵은 왜 새로운 위기의 시작인가?
앞서 얘기한, 카스티요 탄핵이 페루 정치위기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위기, 더 심각한 정치위기의 시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로 돌아가자.
<포린 폴리시>는 대중의 반체제적 감정 내지 감성, 또는 분노를 촉발한 카스티요 탄핵으로 대중의 봉기는 이미 시작됐으며, 이런 사태를 야기한 장본인들인 의회 의원들은 바로 그 때문에 앞으로 몇 개월 안에 특권과 이권을 안겨 준 자신들의 의원 자격 자체를 날려 버리게 될 가능성 앞에 서 있다고 본다. 치명률이 가장 높았던 나라 중의 하나인 페루의 코로나 팬데믹 유행과 우크라이나 사태로 경제 사정이 나빠지고 물가마저 크게 오른 가운데 카스티요는 실권하기 몇 개월 전부터 여론조사에서 ‘지지하지 않는다’가 60%나 됐다. 하지만 의회에 대해 ‘지지하지 않는다’는 80%였다. 더 중요한 것은 페루연구소의 11월 조사에 따르면, 카스티요가 물러난다면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약 90%나 됐다는 사실이다.
카스티요 정권의 부통령이었다가 그의 탄핵으로 대통령이 된 디나 볼루아르테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기본자유를 제한하고 나선 것은 그 봉기의 위험성을 충분히 감지했기 때문이다. 볼루아르테는 대선도 그렇지만 총선도 원래 예정됐던 2026년 7월이 아니라 2년 앞당긴 2024년에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페루의 지금 선거제도에서 5년 임기의 대통령과 의회 의원들은 연임이 금지돼 있다. 사이를 두고 다시 출마할 수 있지만 연속해서 대통령직이나 의원직을 맡을 수는 없다. 그 때문에 의원들은 2026년 7월까지의 임기 내에 자신들의 지위와 특권을 이용해 이익을 최대한 챙기는 데에 골몰하겠지만, 앞으로 몇 개월 안에 조기 선거 실시 요구는 점점 더 거세져 감당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포린 폴리시> 기사는 예상한다.
선거로 바뀔 게 없다 - "좌파 무능 탓"은 왜곡 아니면 농담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렇게 해서 선거를 실시해 봤자 여전히 의원들이나 정당은 대표성도 없고 무의미한 정치 공방만 벌이는 문제 투성이의 결과만 낳을 것이라는 점이다. 현행 헌법에서 대선은 총선과 겹치는데, 10여 개로 갈라진 정당들 후보에게 표가 분산돼 2차 결선투표를 치를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당선된 대통령의 집권당이 의회 다수파가 된 적이 적어도 2016년 이후에는 한 번도 없었고, 다음 선거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대통령은 권력에 굶주린, 불법적인 금광 채굴과 수준은 신통찮지만 수익성은 좋은 사립대학들에 대한 이권에 눈먼 의원들의 도전과 박해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다. 카스티요가 그랬듯이. 일각에서 주장하듯 카스티요가 좌파라서, 좌파 특유의 부패 무능 때문에 그가 쫓겨났다는 식의 해석은 의도적 왜곡이거나 농담일 가능성이 높다.
2020년에 의원 60%의 찬성으로 탄핵당한 마르틴 비스카라 대통령의 의심스런 뇌물수수 추정 근거들은 2년이 지나도록 검사들이 여전히 입증을 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카스티요에 적용된 탄핵 혐의들이 조작됐다고 주장하는 그의 지지자들 얘기가 입에 발린 얘기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탄핵 혐의들이 모두 분명한 근거를 갖고 제기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의회가 반대하면 정부 구성도 불가, 카스티요 정부 4번이나 퇴짜
대통령과 의회의 두 체제가 서로 얽혀 있는 페루에서는, 대통령이 총리를 지명하면 총리가 장관들을 인선해 정부(내각)를 구성한다. 그런데 장관 인선과 정부 구성에 대해 의회가 승인권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의회가 반대하면 정부 구성이 완료되지 않는다. 자칭 마르크스-레닌주의 급진좌파라는 카스티요 정권 내각이 4번이나 사퇴하고 재구성된 것은, 의회 다수파인 보수우파 의원들이 내각 구성을 계속 비토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래선지 카스티요는 각료(장관)들을 주로 중도파와 중도우파 인사들로 구성한 것으로 돼 있다.
대통령의 해외 출국도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된다. 2016년에서 2018년까지 대통령을 지낸 중도우파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가 유엔 총회에 참석하려고 뉴욕을 찾아갈 때도 의회의 승인을 요청해야 했고, 바티칸에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러 갈 때도 출국에 반대한 의원들에게 읍소해야 했다.
페루 의회는 지금 단임제이기 때문에 행정부와 의회가 충돌할 때 이를 피해갈 장치가 없다. 그런데 연임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대다수 의원들은 초선이다. 정치력을 발휘하기보다는 불퇴전의 날선 이념들이 충돌하는 전장이 되기 십상이다. 중대선거구제여서 유권자들에 대한 대표성도 약하다. 거기에다 정당 운영은 매우 폐쇄적이어서 개별 정당 보스들이 각자 정당 등록권과 공천권을 갖고 있다. 따라서 뒷거래와 부패의 온상이 되기 십상이다.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면 2만 5000명의 당원 등록증이 필요하다. 이는 사실상 새 정당 창당이 어렵다는 것이니, 기존 정당들 당수들로선 박수 치며 환호할 일이다.
판을 바꿀 사람이 없다?
세 번째, 판을 바꿀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지금 페루 정계에서 다음 대선 주자로 유력한 세 사람이 거론된다. 다음 대선이 실시된다면 이들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들 중 누가 되더라도 페루 정치위기를 해소하기는커녕 더 심화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를 이들의 면면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제1 후보 안타우로 후말라
첫째가 안타우로 후말라인데, 2011~2016년에 집권한 중도좌파 대통령 올란타 후말라의 급진적 성향의 친형제다. 2005년에 경찰관 여러 명의 목숨을 앗아간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다가 최근에 출옥한 사람이다. 안데스인들의 인종적 우월성을 옹호하는 사상을 지닌 안타우로 후말라는 부패한 관리들의 처형을 촉구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돈세탁 혐의로 재판 중인 그의 형제 울란타도 포함돼 있다.
제2 후보 라파엘 로페즈 알리아가
둘째는 라파엘 로페즈 알리아가라는 사람이다. 극보수주의자로 수도 리마의 시장이다. 그는 증거도 없이 카스티요의 승리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심지어 카스티요의 처형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광범한 세금포탈 비난을 받고 있는 성공한 사업가인 그는 가톨릭에 헌신하면서 금욕과 극도의 자기절제라는 개인적 도덕을 페루사회 전체에 적용하고 싶어한다. 낙태를 절대 반대하면서, 예컨대 강간당해 임신한 미성년자들은 5성급 호텔에 재우면 트라우마가 없어질 것이라고 제안을 하는가 하면, 최근에 안락사 소송에서 이긴 신체장애 여성에게 “개인적인” 문제에 국가를 개입시키려 하지 말고 그냥 빌딩에서 뛰어내리라고 막말을 하는 인간이다.
제3 후보 게이코 후지모리
셋째가 앞서 얘기한 게이코 후지모리다. 그녀의 당은 2021년 선거 때 73석을 획득한 제1당이다. 그래서 쿠친스키와 비스카라 두 대통령을 탄핵해서 쫓아내는데도 기여했다. 자신이 대통령이 돼서 면책권을 확보하지 못하면 돈세탁 부패혐의로 10년 형을 받을 수 있다고 검사들이 얘기하는 재판을 앞두고 있으니 대통령이 돼야 한다. 게다가 자신의 아버지를 감옥에서 구해내 사면하려면 더더욱 필사적으로 권력을 잡아야 한다.
후지모리와 로페즈 알리아가는 2021년 대선 때 각각 2, 3위를 했다. 후말라는 12%를 득표했다.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10개도 넘는 정당들로 쪼개진 페루의 정치 지형에서 1차 투표에서 두자리 수 표를 긁어 모으기만 하면(2021년 대선 때 후지모리와 카스티요처럼) 결선투표에 나갈 수 있고, 지친 페루 유권자들은 그들 중 “덜 나쁜 놈”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니 카스티요의 탄핵은 페루가 또 다른 치명적인 통치 불능 상태로 빠져들어가는 관문일 수도 있다. 카스티요처럼 그 전에 선출직을 맡아본 적이 없는 디나 볼루아르테가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더 나은, 좀 더 능숙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휘몰아칠 시민들의 분노, 정부 정통성의 부재, 극단적 포퓰리즘의 증폭을 막을 기회는 금방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것이 우울하지만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페루의 지금 정치 위기에 대한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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