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금리 상한선 0.25%에서 0.5%로 올려
"사실상의 금리 인상" 주가 하락 등 시장 요동
퇴임 앞둔 일본은행 총재 이후 겨냥 '출구전략'
장기 저금리 부작용, 미국 고금리와 어긋나 증폭
'탈아베노믹스'로 이어질까…"지금 재고 안 해"
일본은행이 20일 이른바 ‘아베노믹스’의 근간이었던 무제한 금융완화정책의 핵심인 0.25% 장기금리 상한선을 0.5%로 올렸다. 이는 사실상의 금리인상으로, 내년 4월 초에 임기가 끝나는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의 퇴진 이후의 금융정책 변경을 위한 ‘출구전략’이라는 관측들이 나오고 있다.
일본은행은 이날 금융정책결정회의를 열고 금융완화정책의 하나로 억제해 온 장기금리의 상한을 이제까지의 ‘0.25% 정도’에서 ‘0.5% 정도’로 끌어 올렸다. 예상을 벗어난 이 기습적인 조치를 아베 신조 전 정권 제2차 집권 초인 2013년 4월부터 지금까지 강행해 온 대규모 금융완화정책의 수정으로, 사실상의 금리인상으로 금융시장은 받아들이고 있다고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들은 전했다.
이날 조치에 따라 장기금리는 한때 0.46%까지 급상승했고, 약세를 면치 못하던 엔화도 미국과 일본의 금리차가 축소될 것이라는 전망에 따라 한때 5엔 정도 오른 1 달러당 132 엔대까지 갔다. 또 엔화 강세로 수출기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들 실적이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퍼지면서 닛케이 평균주가는 한때 800엔이나 급락했다.
일본은행은 이제까지 기업의 투자나 가계 소비를 끌어 올리기 위해 장기금리의 지표가 되는 10년물 국채 이자율 상한을 ‘0.25% 정도’로 고정하고, 이 선을 넘지 않도록 시장에서 국채를 대량 매입해 금리를 극단적으로 낮게 억제하는 정책을 계속 펴 왔다. 이에 따라 정부 빚인 국채(국고 단기증권은 제외)의 발행잔고 절반 이상을 일본은행이 보유하는 극히 이례적인 현상이 벌어졌다. 일본은행의 보유 국채는 아베 정권 2차 집권이 시작된 2012년 말의 91조 엔에서 올해 9월 말에는 536조 엔으로 약 6배로 늘어났으며, 보유비율도 11.48%에서 50.26%로 급증한 사실이 지난 19일 확인됐다.
이번에 상한선을 올린 이유에 대해 일본은행은 국채 매입으로 장기금리가 현저하게 낮아짐에 따라 떨어진 시장기능을 개선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시장에서는 일본은행이 기준을 정해 장기금리를 낮게 억제함으로써 10년물 국채 이자율이 극단적으로 내려가 시장에서 자유롭게 정해져야 할 장기금리가 좁은 폭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기업 회사채나 지방채를 원활하게 발행할 수 없었고 국채 매매가 이뤄지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또 해외 투자자들은 일본이 결국 금융완화정책을 수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내다보면서 국채를 계속 매각해 ‘해외세’와 일본은행 간에 장기전이 펼쳐졌다. 따라서 이번 조치를 일본은행의 패배, 해외세의 승리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본의 금리 억제정책은 특히 올해 봄 미국과 유럽 중앙은행들이 치솟는 물가를 누르기 위해 금리 인상을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시장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금융정책 방향이 어긋나면서 엔화 약세가 가속돼 지난 10월에는 약 32년만에 엔화가 1 달러당 151 엔까지 떨어졌고, 우크라이나 정세 악화에 따른 에너지 가격 폭등 등으로 물가가 급등해 기업이나 가계의 부담이 커지면서 일본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따라서 이번 조치를 이런 상황에 따른 여론 악화를 의식한 조치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극단적인 금융완화정책을 통해 일본경제가 선순환을 그릴 것이라던 아베와 구로다의 예측은 10년 가까이 지나도록 실현되지 않았다. 일본은행이 보유하는 국채는 정부발행 잔고의 50%를 넘어 국채시장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부작용이 심각했다. 이에 따라 구로다 총재의 임기(내년 4월 8일)가 끝나가는 지금 결국 극단적 금융완화정책이 막다른 골목에 처했다는 지적도 있다. 이미 세계최악의 부채의존 재정 상태인 일본정부가 23조 엔 가까운 국채를 증발하는 종합경제대책을 내놓고, 방위비를 5년간 17조 엔 증액하는 계획을 발표하는 것도 일본은행이라는 ‘요술방망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일본은행이 시장에서 대량의 국채를 매입해 온 결과 정부는 낮은 금리로 거액의 국채발행을 계속해 올 수 있었다. 그 결과 국채 총 잔고가 1천조 엔이 됐다. 구로다를 기용해 아베노믹스를 밀어붙인 아베 전 총리는 사망하기 약 두 달 전인 올해 5월 “일본은행은 정부의 자회사”라고 말해 정부와 일본은행 ‘일체화’에 대한 우려가 시장에서 더욱 커졌다.
일본정부가 저금리로 정부 빚을 무제한 불린 결과, 일본은행이 금리를 올릴 경우 정부의 부담이 커지는 리스크도 떠 안게 됐다. 재무성의 시산으로는 금리가 1%만 올라가도 2025년도의 원리금 상환액이 3조 7000억 엔이나 증가한다. 이는 기시다 정권의 방위비 배증계획에 따라 늘어날 연간 방위비 추가 증액분을 충당하기 위해 상정하고 있는 증세분을 훨씬 능가하는 규모의 세출 증대로 이어진다. 지금도 정부예산의 상당 부분이 재정부채 이자 상환으로 나가고 있는 현실에서 금리 인상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
일본은행 자체도 당좌예금 형태로 쌓아 두고 있는 타은행들로부터의 국채 매입대금이 470조 엔에 달해, 앞으로 금리를 올리게 되면 일본은행이 다른 금융기관들에 지불해야 할 이자도 크게 늘어나 일본은행이 채무초과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일본은행은 올해 9월 말에 보유 국채 시가가 매입 당시의 가격보다도 낮아져 아베노믹스 시작 이후 처음으로 8749억 엔의 평가손이 발생하기도 했다.
극단적인 저금리 정책은 또 시장에서 도태돼야 할 기업들, 이른바 ‘좀비기업’들을 연명시켜 일본경제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데이코쿠 베이터뱅크에 따르면, 3년 이상 연간 영업이익이 차입 금리 반환분을 밑도는 기업을 좀비기업이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차입금 이자도 지불할 수 없을 정도의 부실한 기업들이다. 이런 좀비기업들이 2020년에16만 5천개 사로 전체의 약 11%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됐다. 2008년의 리먼 쇼크(월스트리트발 세계 금융위기)로 이 수치가 급증한 뒤 감소했으나 아베노믹스의 극단적 저금리정책으로 2014년 이후 10% 전후를 기록하다 이처럼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책을 밀어붙인 아베 전 총리가 사망한 뒤 일본은행이 그 전과는 달리 여론의 거센 풍파에 직접 노출되면서 정책전환을 서두르는 움직임이 내부에서 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구로다 일본은행 총재는 금융정책결정회의 뒤의 기자회견에서 이번 조치가 “금리인상은 아니다. (금융완화를 끝내는) 출구정책이라거나 출구전략을 향한 한 걸음이라거나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면서 금융완화정책 효과를 좀 더 효과적으로 파급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번 조치가 2013년에 물가를 2%로 올리겠다는 내용을 담아 발표했던 정부와 일본은행의 공동성명의 수정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구로다 총재는 “우리나라의 경제 물가는 착실히 개선돼, 디플레 없는 상태는 실현됐다. 현시점에서 공동성명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며 자신이 10년 동안 고수해 온 아베노믹스 경제정책을 옹호했다.
경제평론가 가야 게이이치는 이번 조치를 “사실상의 금리인상으로 생각해도 좋다”면서, 일본은행이 지정하는 이자율로 국채를 매입해 온 정책의 범위를 조금 더 확대하는 것으로, 엔 약세는 상당 정도 억제할 수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이번 조치로 단기적으로 경제에 큰 변화는 없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일본도 마침내 금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도쿄단자주식회사 수석 이코노미스트 가토 이즈루도 이번 조치를 사실상의 금리인상으로 보면서, “물가상승률 전망이 애초 상정한 것보다 높아져 수정한 것”이라며 “구로다 총재는 이번 조치가 시장기능 회복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그 설명은 이해할 수 없다. 시장 기능이 지금 떨어진 것이 아닌데, 지금까지는 괜찮다고 해 놓고 왜 이제는 안 된다는 것인가.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가토는 이번 금리 수정 조치를 정면으로 설명하면 ‘다음 변동폭 변경은 언제냐’는 (국채 매각 등을 통한) 시장의 압박이 커질 것이므로 ‘다음 (금리변동폭) 확대는 언제냐’는 압박을 피하기 위해 이런 방식을 취했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이를 꿰뚫어 본 시장의 압박이 커질 가능성이 높아 앞으로도 금리억제정책 수정을 기습적으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가토는 이는 지금까지의 금리 상한선을 정해 놓은 극단적인 금융완화정책 자체가 만들어낸 딜레마라며 애초에 그런 수법을 쓰지 말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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