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미성 재즈 가수
임미성 재즈 가수

세계 제1차 대전 이후, 경제 호황을 누리게 된 미국에서 재즈와 스윙 댄스가 대중화된 1920년대를 흔히 ‘재즈의 시대(Jazz Age)’라고 한다. ‘재즈의 시대’ 키워드는 재즈, 패션, 영화, 문학, 자동차, 담배, 스포츠, 찰스턴 댄스였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변화하고, 스포츠가 유행하면서 새로운 패션 아이템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성들의 허리를 조여 질식사까지 가져왔던 코르셋을 리틀 블랙 드레스로 해방시킨 코코 샤넬은 길이(샤넬라인)와 컬러(블랙)로 디자인의 혁명을 일으켰다. 그것은 여성들에게 해방과 동시에 구원이었다.

코르셋에서 여성을 해방시킨 패션계의 잔다르크 샤넬

샤넬은 다름 아닌 패션계의 잔다르크였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란 샤넬은 7년 동안 바느질을 배우게 된다. 그녀는 성당의 스태인드 글라스에서 영감을 얻으며, 그전까지 금기와, 죽음, 수행을 상징하던 블랙을 창조의 원천으로 삼았다. 모자가게의 성공을 시작으로, 이전에 상류층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화려함의 세계’를 ‘우아함의 세계’로 전복시킨 그녀는 항상 새로운 것을 시도하며 아름답고 실용적인 옷을 추구했다.

 

샤넬의 플래퍼 스타일. 
샤넬의 플래퍼 스타일. 

재즈클럽에서 스윙재즈에 맞춰 춤을 추던 무용수들은 움직임이 편한 디자인이 필요했다. 재즈가 패션의 변화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샤넬의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보이시 룩, 보브헤어, 단발머리, 춤출 때마다 흔들리는 비즈와 스팽글 장식을 단 플래퍼 룩(말괄량이 룩), 그리고 남성 의상에 쓰였던 옷감인 저지(jersey)를 활용한 원피스는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운전기사의 코트에 착안해 만들었던 고무 레인 코트를 만들어 세상을 놀라게 한 샤넬의 유연함은 모조품에 대한 관대함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재즈의 시대에 유행했던 문화가 고스란히 드러난 소설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이다. 혹은 우디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재즈가 흐르는 파리에서 활보하고 있는 피츠제럴드와 피카소, 헤밍웨이를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아드리아나(피카소의 뮤즈)가 입고 있는 플래퍼 스타일(허리 선이 없는 심플한)의 원피스들이 인상적이다. 샤넬에게 의상을 배운 감각이 새겨진 패션.

재즈와 패션의 가장 공통되는 원동력은 협업이다. 장르나 스타일이 창조될 때 개념이나 컨셉은 한 사람이 창조할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합주와 협업를 통해 이루어진다. 재즈와 마찬가지로 패션도 시대상을 빠르게 반영하기에 변화와 혁신, 그것을 이끌어내는 감성의 자유로움이 필요하다. 샤넬의 디자인 혁명과 찰리 파커의 비밥 혁명은 기존 질서나 관념을 타파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그것은 패션이나 연주 스타일이 아닌 문화현상으로 작용한다.

청바지 입고 재즈 들으며 기성세대에 반기 든 비트세대

청바지는 19세기 캘리포니아 광부들이 입던 텐트 천으로 만든 작업복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유래된 스타일이며 흔히 데님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데님은 프랑스의 도시인 ‘님’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에서 따온 이름이다. 청바지는 50년대 비트세대, 68혁명의 히피세대를 거쳐 21세기인 현재에도 전 인류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업복(?)이다. 50년대 비트세대를 창조했던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가 출간된 후 수십 억 벌의 리바이스 청바지가 판매된 것은 비트세대를 표현해주는 것이 청바지와 가죽잠바, 그리고 오토바이였기 때문이다. 부모세대에 반기를 든 비트족들은 재즈를 들으며 선불교에 심취하고 마약에 빠져 오토바이로 도로 위를 질주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첨예한 갈등이 빚어낸 68혁명은 프랑스 정부의 실정과 사회적 모순에 저항한 대학생들의 봉기로 시작되었고, 독일과 미국 등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혁명은 끝내 실패했으나 평등, 인권, 생태주의 등 진보적인 가치들이 프랑스를 이끄는 데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프렌치 시크를 대표하는 제인 버킨은 68혁명 때 세르주 갱스부르를 만난다. 그녀는 운동화와 티, 청바지만으로도 시크함을 연출하는 아방가르드한 예술가였다. 배우이자 가수로 보헤미안의 삶을 추구하는 그녀의 스타일은 영화와 패션계뿐만 아니라 환경보호 운동에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진정한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르몽드지가 추모한 것처럼 그녀는 “인류애를 가진 열정적인 예술가”였다.

 

영국 디자이너 폴 스미스
영국 디자이너 폴 스미스

’위트 있는 클래식‘의 대명사인 세계적인 영국 디자이너 폴 스미스는 15세에 난독증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으로 ’핏‘과 실루엣을 연구했다. 정식으로 디자인을 배운 적이 없는 그는 난독증이라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위트를 잃지 않았다. “매일 매일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뭔가를 목격한다.” 스미스는 그래픽 디자인과 영화포스터 디자인에서도 독특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또 다른 슬로건은 ’디테일과 반전‘이다. 단추구멍에 다른 색을 넣는 것에서 스미스식의 작은 디테일을 발견할 수 있다. 역동적인 ’무지개 스트라이프‘는 폴 스미스의 브랜드 시그니처로서 많은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옷 안에 비밀을 숨겨 놓는 걸 좋아한다. “수트는 몸에 붙거나 헐렁하지 않고 알맞게 감싸줘야 한다”는 그의 따뜻한 철학은 그가 디자인하는 모든 제품에 반영되어 있다. 원단에 사진을 프린트하는 아이디어도 폴 스미스다운 시도였다. “영감은 당신의 온 주위에 있다.” 폴 스미스가 즐겨 하던 이 말은 즉흥연주를 하는 내게는 무엇보다 필요한 말이다.

난독증 폴 스미스, 독서광 라거펠트가 내게 영감을 준 말들

20만 권이 넘는 도서관. 실은 칼 라거펠트의 개인 서재다. 한 장의 사진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그의 독서 편력은 다양한 지식에 대한 탐구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고 있다. 그의 디자인 철학은 로맨티시즘과 미니멀리즘, 샤넬의 디자인을 재구현한 페미니즘, 시크함과 우아함 등 모든 컨셉을 갖추고 있다. 패션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칼 라거펠트는 철저한 자기관리로도 유명하다. 그는 화려한 파티를 뒤로하고, 틈만 나면 책을 읽는다. 서평을 기고하고, 홍보물을 직접 만들며 외국어에도 능통하다. 그는 트렌드를 정확히 짚어내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다. 패션에 포스트 모더니즘을 도입하며 젊은이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과거를 회상하고 존경한다면 창작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기에 그에게 회고록은 의미가 없다.

 

칼 라거펠트
칼 라거펠트

그는 패션에서 리드미컬한 하모니를 강조하며 평범하면서도 위트있는 스타일을 제시한다. 꽁지머리에 흰 셔츠와 검은 선글라스를 고집하는 그의 일관된 스타일과는 달리 매 시즌 패션쇼에서 보여지는 의상들은 마치 클래식 연주자로 보이는 피아니스트가 실제로는 아방가르드 재즈를 연주하는 듯한 반전을 선사한다. “옷(즉흥연주)은 순간을 반영해야 한다. 너무 빠르거나 늦으면 소용이 없다.” 그만큼 패션에서도 즉흥성과 타이밍이 중요한 것이다. 칼 라거펠트의 최고의 명언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은 오지 않았다”는, 내가 예전에 연주했던 스탠다드 재즈곡인 <The Best Is Yet To Come>의 제목과도 운명처럼 닮아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인생관 닮은 <ZARA>의 패스트 패션

나는 <ZARA> 매장에 들를 때마다 늘 드는 의문이 있었다. 도대체 이 브랜드의 컨셉을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옷도 너무 자주 바뀌었다. 파티복 드레스와 비쥬로 장식한 자켓이 걸려 있던 자리에 샤넬풍의 단아한 정장이 걸려 있기도 하고, 너무 타이트하거나 지나치게 헐렁한 힙한 청바지까지… 그래도 다양하게 고를 수 있어 가끔씩은 들르게 되는 게 또<ZARA>였다. 그러다 우연히 ZARA 창립자인 아만시오 오르테에 대한 기사를 읽고 나서야 모든 궁금증이 풀렸다. 어려운 환경에서 독학한 오르테는 16세에 지점 매니저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1975년 <ZARA>를 창립하게 되는데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그리스인 조르바>를 따서 <조르바>를 쓰려고 했으나 주변에 있는 Bar이름이 조르바여서 대신 ‘Z’를 살린 <ZARA>를 탄생시킨 것이다. 천방지축의 조르바. 오로지 지금, 여기에만 사는 조르바의 흔적이 내게는 정신없는 컨셉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2016년에 세계 최고 1위 부호로 선정되기도 했던 오르테에게는 그만의 경영철학이 있었다. 소비자들의 니즈를 최대한 빠르게 분석하고 반영해서 중저가로 공급하는 것이다. 일명 패스트 패션이라고 하는 브랜드 전략은 일주일에 두 번씩 디자인 컨셉을 바꾸는 데 있다. 제조와 유통을 회사가 맡아서 관리하고 광고와 마케팅 비용을 줄임으로써 최신 패션을 싼 가격에 판매하는 것이다. 그래서 <ZARA>는 광고가 없다. 인기있는 제품이라도 한 달 이상 진열하지 않는다고 한다. “유행이 지난 옷은 어제 잡은 생선처럼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그의 사업철학은 패스트 패션의 성공 신화를 이룰 수 밖에 없음을 공감하게 된다.

히스토리를 알게 된 후, 나는 <ZARA> 매장에 가서 옷을 고르며 조르바를 상상하는 습관이 생겼다. 특히 어느 것을 고를지 주저하게 될 때, 이 한 번의 상상으로 나의 결정력은 단단해진다. 옷을 입은 거울 속 나에게 조르바가 되어 질문하는 것이다. “자네, 지금 무엇을 입는가?” 내가 어떤 옷을 고르더라도 최고라고 믿어주는 질문이다. 유쾌하고 진지한 조르바만이 건넬 수 있는 질문.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주저한다는 건 다 입고 싶다는 내재된 욕망임을 조르바가 일깨워 준 셈이다.

한 장의 천으로 주름옷을 만든 이세이 미야케의 휴머니즘

혁신의 상징이 된 급진적인 디자이너 장 폴 코티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샤넬이 여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던져버렸던 코르셋을 외출복으로 불러 들였다. 코르셋을 아우터로 대체시킴으로써 고전을 파격적으로 재해석한 고티에는 80,90년대 패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스티브 잡스가 15년 동안 입었던 블랙 터들넥은 일본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의 작품이다. 이세이 미야케는 모든 면이 접힌 주름옷을 세계에 유행시키며 주름 디자이너(플리츠 플리즈)로 불린다. 그가 디자인에 도입한 주름은 일본의 종이 공예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그는 옷을 만들 때에도 옷감 사이사이에 종이를 끼워 압착하는 방식으로 주름을 잡는데 옷 전체에 주름을 잡는 이유는 옷을 입은 사람이 옷이 접혀질까 노심초사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원자폭탄 피폭 후유증으로 힘들었던 어린 시절에 갖게 된 생각들은 “파괴되는 것이 아닌 창조적이고 아름다운 것이 기쁨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디자인 철학을 만들어냈다. 그는 입체적 재단이 아닌 평면적 재단을 통해 봉제를 없애고 소재의 낭비를 줄이는 친환경적인 디자인을 개발하며 미래 디자인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한 장의 천이 옷이 되는 기적. 이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휴머니즘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이세이 미야케만의 세계다.

변화와 혁신, 독창성과 즉흥성은 재즈와 패션의 원동력이다. 요즘엔 패션이 재즈보다 더 재즈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패션에서 보여주는 소재와 장르의 ‘경계없음’은 프리재즈처럼 자유롭다. 디자이너의 옷이 미술관에서 전시되는 게 요즘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올 가을에는 재즈클럽의 컨셉으로 패션쇼를 개최한다는 뉴스도 있다.

“나 자신에 대한 위트도 멈추지 않겠다. 시크하게…”

지금은 ‘경쟁의 시대’가 아니라 ‘창조의 시대’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style을 연구해야 하는 ‘디테일의 시대’. 독자적인 style을 만들어 내려면 끊임없는 열정과 함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는 습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리학자 셸던 글래쇼는 ‘아름다움’을 나침반으로 삼았다. 아름다움은 삶의 이유없는 기쁨이다. 나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할 때 바로 가까이에 있는 아름다운 모든 것에 눈길이 가게 된다. 자기를 아는 사람만이 시크할 수 있다. 나 자신에 대한 진정한 위트. 시크하다는 건 ‘하나의 수확’이다.

내가 2009년 파리에서 녹음하고 한국에서 낸 <코리안 포에틱> 1집도 내 나름의 독자적인 style을 만들어 내려고 열정을 끌어올린 작품이다. 그러나 이 앨범에 수록된 <아리랑>은 너무 파격적이라는 평과 함께 거의 연주되지 않았다. 멜로디를 상실한 아리랑을 누가 아리랑으로 듣겠는가. 나아가도 너무 나아갔다. 다음 프로젝트인 <허난설헌의 시>를 통해 너무 파격적이지 않으면서 혁신적인 모험을 다시 도전해볼 생각이다.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것이다. 시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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