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미성 재즈 가수
임미성 재즈 가수

전을 부치며 생각한다. 전이라는 음식처럼 각기 다른 재료가 고유의 맛을 잃지 않으면서도 화합하고, 잔칫상과 제사상에 오르며 사람들에게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도록 자비를 베푸는 친절한 음식이 있을까.

연주의 앙상블 이루는 악기 톤과 모둠전의 브라운 톤

모둠전처럼 각기 다른 장르를 조합해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애환과 기쁨을 동시에 자유롭게 소환하는 재즈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음식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명절에 갖가지 색으로 차려지는 모둠전은 대충 부치면 만들어질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지난한 여정을 거쳐야 하는 까다로운 음식이다. 일단 하루 반나절 기름 냄새를 감내할 헌신이 필요하다.

재료들을 씻고, 다듬고, 소금 밑간을 하고, 밀가루를 묻혀 달걀옷을 입히는 과정도 섬세한 감각이 요구되지만 전을 부칠 때 타이밍을 놓치면 타버리기 일쑤라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기름이 많아져 느끼해서도 안 되고, 반죽이 물러져 금방 부서져서도 안 된다.

최고의 전을 만드는 비법은 달궈진 철판과 재료들의 긴밀한 상호작용에 있다. 먼저 구워진 전들은 철판의 가장자리로 내보내고, 달걀옷을 입힌 새 반죽들을 가운데로 모아 센 불에 지글지글 부쳐지면 바로 불을 끄고, 잠시 기다리며 어느 정도 익은 전들을 부드럽게 살살 돌려주어야 한다. 불을 끄고 켜기를 반복해야 골고루 바삭하게 익힐 수 있다.

잘 구워진 노릇한 전은 마음의 평정으로 빚어진 인내의 결과다. 모든 연주자의 숙명처럼, 이 지루한 반복은 최고의 모둠전을 만들기 위한 통과의례다. 전이라는 음식이 보기에 쉬워 보여도 만만치 않듯이 재즈도 들을 때는 흥겨워서 누구라도 쉽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세계에 들어서면 끝없는 연습의 시간들이 결코 흥겹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연주자들의 악기 톤은 연주의 앙상블을 이루는 핵심이다. 모둠전 역시 모든 재료가 바삭하게 구워진 브라운 톤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연주자들 간의, 혹은 재료들과의 소통과 공존이며 결합이다.

달라이 라마의 말까지 떠올리게 하는 재즈와 모둠전의 앙상블

유럽 문화와 아프리카 문화가 미국 남부 뉴올리언즈에서 ‘재즈’라는 장르로 융합되었다면 고기와 야채와 생선과 꽃이라는 다양한 재료들이 검은 철판이라는 대지 위에서 춤을 추는 모둠전으로 하나를 이룬다.

조화와 화합속에 모두 함께 즐기되 개성과 맛을 잃지 않는, 따로 또 같이 (alone together)다. 재즈와 모둠전의 속성은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므로 모두가 주인공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지나친 개성으로 흐트러질 수 있는 앙상블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두를 위해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을 추스르고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기”를 권하는 달라이 라마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동태전, 버섯전, 고추전, 김치전, 파전, 소고기로 만든 육전, 깻잎전, 꽃잎을 부쳐 만든 화전, 갖가지 재료를 꼬치에 끼운 꼬치전까지 한 접시에 담겨진 화려한 모둠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 짓게 한다. 한 접시로 담아내어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모둠전. 시련의 과정은 뒤로하고, 기쁨과 위로를 주기 위한 이 아름다운 연대는 다정함과 연민이 스며든, 타인을 위한 환대다.

독일 디자이너 디터 람스의 유명한 철학인 “더 적게, 하지만 더 좋게(weniger aber besser)”는 디자인에서뿐만 아니라 쿨재즈(단순한 선율)나 모둠전(적은 기름)에도 절묘하게 맞는 표현이다.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비밥 연주에 다소 지친 이들에게 쿨재즈의 느린 선율은 고요한 힐링의 경지를 선사한다. 전을 맛있게 부치기 위해서는 많은 기름이 필요하지 않다. 단지 적절한 타이밍에 전을 뒤집어 부칠 수 있는 ‘순간 결정력’이 요구될 뿐이다.

 

재즈를 위해 태어난 비운의 가수 빌리 할리데이.
재즈를 위해 태어난 비운의 가수 빌리 할리데이.

재료에 담긴 역사 이야기를 먼저 하는 모둠‘전(傳)’

한 개의 전이 만들어지기까지 모든 과정은 하나의 연주곡이 시작되어 끝나는 모든 과정처럼 시간과 노력으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모둠전이 나에게 모둠‘전(傳)’으로 이해되는 것은, 모둠전을 먹는 날은 특별한 날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생일이나 기일, 결혼식, 혹은 승진하는 날이거나 집들이 날일 수도 있다. 이처럼 전은 혼자 먹을 때보다 같이 먹을 때 더 맛있는 음식이다. 장마철에는 파전이 제격이다.

전 중에서도 녹두전은 조선시대부터 우리 선조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었는데 전 하나에 담긴 역사를 떠올리면 짐짓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모둠전은 재료를 미리 알려준다. 김치전은 김치에 대한 이야기고, 화전은 꽃에 대한 이야기다. 꼬치전은 재료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해야 한다. 모든 이야기가 재료로 담긴 모둠전은 상황에 따라 모둠‘전(傳)’이 되기도 한다.

역사라는 거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자잘한 일상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은 매 순간 이야기로 짜여져 있다. 재즈곡의 가사를 보면 실제의 삶을 표현한 경우가 많은데 빌리 할리데이의 대표곡인 ‘스트레인지 프루트(Strange Fruit)’는 인종차별로 죽임을 당한 흑인들에 대한 묘사로 탄압을 받기도 했다. 피아니스트 폴 데스몬드의 명곡 ‘테이크 파이브(Take Five)’는 연습하는 중에 잠시만 쉬자고 제안한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곡이다.

 

'테이크 파이브(Take Five)'로 잘 알려진 재즈 피아니스트 폴 데스몬드.
'테이크 파이브(Take Five)'로 잘 알려진 재즈 피아니스트 폴 데스몬드.

재즈는 제국주의로 붉게 물든 대륙 간의 분쟁 스토리로 충돌해 분출된 비극적인 스토리다. 이렇게 시작된 재즈는 개방성과 저항정신을 토대로 시대마다 혁신적이고 다양한 장르를 창조해냈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 재즈를 미국의 국보로 지정했다고 한다)

모둠전처럼 ‘은밀한 바삭’으로 날마다 축제인 재즈

무한 확장해가는 재즈처럼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다시 쓰여져야 하는 운명이다. 로마시대 시인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시(詩)’는 한자의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말로 만든 절’이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세계는 말로 지어지고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살며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그 시인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다.

모둠전은 밀가루를 묻혀 달걀옷을 입힌 다음 기름을 두른 철판에 구워내는 기본적인 폼(Form) 안에서 재료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재료가 달라지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모둠전은 재즈처럼 과거의 형식에 머물지 않는 개방성으로 새로운 장르(종류)를 시도하며 시대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재즈뮤지션 베니 굿맨이 “재즈는 연주자가 오리지널리티 그 자체의 음악”이라고 말한 것처럼 모둠전은 의도 없이 즉흥적으로 달라질 수 있기에 그 자체로 모둠‘전(傳)’이 될 수 있다.

뭐니뭐니 해도 모둠전의 가장 위대한 비밀은 ‘은밀한 바삭’이다. 기름에 첨벙 튀기지 않아 소리 없이 구워진 전은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입 속에서 ‘바삭’ 하는 소리로 운명을 다한다. 이 부드러운 사운드가 모두 사라질 즈음 모둠전의 제전은 막을 내린다. 페이드아웃으로 엔딩하는 연주곡처럼. 헤밍웨이처럼 파리에 가야만 날마다 축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재즈를 들으며 전을 먹는 시간을 잠깐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여기는 날마다 축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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