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원점 ③]
관자놀이에 총 맞은 20구 넘는 ‘위안부’ 시신
모두 스스로 자신들의 관자놀이를 쐈을까?
“일본군이 총살” vs “모두 권총으로 자결했다”
버마로 이송된 조선인 ‘위안부’ 1천명 이상
미군 사진 속 만삭의 ‘위안부’는 남포 출신 박영심
“그들의 존재이유는 일본군 ‘성욕 배출구’였을 뿐”
학살인가, 자결인가?
윈난성 텅위에(텅충)에서 일본군이 패주할 때 (사망한) 여성들이 일본군에 학살당한 것이라는 중국 쪽 자료가 발견됐다. ‘텅충 전역기간 장군계(騰沖戦役期間 将軍系)’(1981년)라는 자료를 입수한 저널리스트 니시다 루미코가 저서 <전장의 ‘위안부’>(아카시 서점, 2003년)에서 밝혔다. 이 자료에 시신들이 있던 현장 상황에 대해 사진 6의 중앙에 찍힌 중국군 장자오카이 중대장이 회상한 내용이 나온다. 귀중한 자료이므로 니시다가 저서에서 소개한 부분을 인용한다.
관자놀이에 총 맞은 20구 넘는 ‘위안부’ 시신
일본군을 섬멸하고, 우리 군이 전장을 정리하고 있을 때, 서문 성벽의 흙 구덩이에서 3명의 여성을 발견했다. 연령은 20세 전후, 용모 단려(端麗, 단정하고 아름답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들은 마치 활을 본 것만으로도 도망치는 새처럼 너무 놀라고 겁을 먹은 채, 총살당할까 두려워했다.
자세히 물어 보니 그녀들은 원래 대만의 동포였는데, 일본군에 의해 강제적으로 군기(軍妓, 위안부)가 된 여성들이라는 것이었다. '군기원'(軍妓院, 위안소)에 있었던 것은 이 세 사람만이 아니었다.
필자(장자오카이)가 텅위에(텅충) 성내에 들어가 전투가 끝난 뒤 성내를 돌고 있었을 때, 인간이 타는 악취가 가득하고, 여기저기 시신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토굴에 큰 구덩이가 있고, 거기에는 20구 이상의 시신이 있었다. 화장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립스틱을 바르고 있고 유행하는 옷을 입은, 가슴이 반쯤 보이는 반나체 상태였다. (그들은) 모두 군기의 시신으로, 구덩이 안에 흩어져 있었다.
그녀들의 몸에 총상 흔적은 없었고, 단지, 좌우의 관자놀이에 총에 맞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왼쪽에서 쏜 한 발의 총탄이 오른쪽으로 관통해 생명이 끊어진 것이다. 이것은 일본군이 전멸하는 마지막 날에 탈출·돌파를 결정했을 때, 군기의 생명을 지켜 주려 하지 않고 한 사람씩 그 자리에서 총살해 서둘러 구덩이에 유기했지만, 흙을 덮어씌울 여유도 없었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흙 구덩이에 숨어 있던 세 명의 여성은 아마 일본병이 혼란스러워한 나머지 잊어 버리는 바람에 목숨을 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들 세 명은 행운이었다. 세 명은 우리가 대만으로 돌려 보냈다.
모두 스스로 자신들의 관자놀이를 쐈을까?
전장을 정리하기 위해 시신들을 토굴에서 참호로 운반한 뒤 찍은 것이 사진 6이었던 것 같다. 텅위에에는 일본인, 조선인, 대만인 등 모두 50명 정도의 위안부가 있었다고 한다.
시신이 조선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20명이나 되는 여성들 모두가 왼손잡이로 스스로 자신들을 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일본군 병사가 지근 거리에서 관자놀이를 쏘았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당시 텅위에에 있던 중국인 신문 기자가 위안부에 관한 기사를 쓰고, 나중에 <텅위에 일보>에도 전재된 '텅위에에서의 전지(戰地) 기자의 보고'(1946년 9월 14일자)라는 기사에도 학살을 시사하는 내용이 있었다.
저널리스트 니시다 “자결이 아니라 일본군이 총살”
학살을 면한 10세 전후의 1명의 중국인 소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전멸하기 직전의 새벽, “갑자기 한 명의 일본 군인이 와서 총으로 13명의 영기(營妓, 위안부) 생명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이들 중국측 자료를 토대로 위안부들은 “자결한 것이 아니라 일본 군인에게 총살당했다”고 니시다는 결론을 내렸다.
라모와 텅위에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들은 중국군 사령부가 있는 쿤밍의 시설에 수용돼 조사를 받았고, 미군도 각서 형태로 기록을 남겼다. ‘전략 정보국(OSS)’(CIA의 전신)의 중국 전역(戰域) 관련 문서 ‘쿤밍의 조선인 및 일본인 포로(KOREAN AND JAPANESE PRISONER OF WAR IN KUNMING)’(1945년 4월 28일자)에 따르면, 포로가 된 사람은 조선인 25명(여성 23명, 남성 2명), 대만인 1명(남성), 일본인 81명(여성 4명, 남성 77명)이었다. 장자오카이의 회상 속에 있는 대만인 위안부 3명의 기록은 빠져 있었다. 조선인 여성의 경우 23명 가운데 10명이 라모, 13명이 텅위에에서 포로가 되었고, 포주 1명을 제외한 22명이 위안부였다.
중국군 보병 리시후 “모두 권총으로 자결했다”
돈 준장의 평전에 등장하는 중국군 보병 '리시후'는 “여성들은 모두 권총으로 자결했다”고 증언했으나, 장자오카이 중대장은 “군기들의 생명을 지켜 주려 하지 않고 한 사람씩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고 회상했다. 중국측 자료가 사실이라면 확실히 그녀들의 자결은 물리적으로 어렵고, 사살당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사람씩 총살했다는 장면을 아무래도 상상하기 어렵다. 그녀들이 방공호 속에 숨어 있었다면, 수류탄으로 한꺼번에 죽이면 되는데, 왜 한 사람씩 총살했을까. 그리고 관자놀이를 관통당한 그녀들은 왜 가만히 죽임을 당했을까. 무엇보다도 무엇 때문에 그녀들을 처형해야 했는지…
중국군의 총공격을 받고 있던 수비대에 20명 이상의 위안부를 학살할 정도의 여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남는다. 식사나 세탁, 탄약 운반까지 하고 있던 위안부들을 마치 “전우”처럼 생각했던 일본군 병사는 많았다고 한다. 위안소의 정보가 적에게 누설되는 것이 두려워 처형한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아마 여성들은 중국군에게 붙잡히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도 상상일 뿐이지만, 일본군이 옥쇄하는 가운데, 군인이 시키는 대로 함께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미군은 위안부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겼으며, 사진 촬영까지 했다. 현장에서 학살 정보를 얻었다면, 대일 심리전에 좋은 재료가 됐을 테니 상세한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미군은 앞서 언급한 문서에서,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한 조선인 여성들의 성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만약 학살 조짐이 있었다면, 같은 처지에 있던 그녀들이 뭐든 증언을 했어도 이상할 게 없다.
2018년 3.1절 공개 ‘학살당한 위안부’ 사진은 그 20년 전 이미 공개
아사노가 논문을 발표한 지 약 20년 뒤인 2018년, 서울시가 ‘3·1절’(1919년 3월 1일의 독립 운동을 기념하는 날) 99주년을 기념해 개최한 일본군 '위안부' 관련 국제회의 회의장에서 텅위에에서 학살당한 위안부의 흑백 필름 영상(사진 7. KBS 화면에서 캡처)이 공개돼 한국 언론이 크게 보도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영상(19초)을 발견한 것은 서울시의 지원을 받은 서울대 정진성 교수의 연구팀이었다. 연합뉴스(2018년 2월 27일자)에 따르면 일본군에 의한 학살을 입증하는 최초의 영상이며, “조선인 여성 30명이 총살당했다”고 전하는 연합군의 문서도 함께 공개됐다.
이 연구팀은 그 행사 2년 전에 같은 현장을 찍은 사진을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찾아냈고, 그 뒤의 조사에서 관련 영상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1년에 걸쳐 분석한 뒤 공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조사를 주도한 정진성은 “일본정부가 일본군의 위안부 학살을 부정하고 있는 가운데, 전쟁 말기에 조선인 위안부들이 놓여져 있던 상황과 실태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그 2년 전에 발견됐다는 그 사진은 20년 전 아사노의 논문에서 공개된 시신들의 현장 사진과 동일한 것이었다. 앞서 얘기한 <전장의 '위안부'>에도 실려 있어서 연구자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사진이다.
영상 공개에 맞춰 출판된 <일본군 '위안부'관계 미국자료(ⅠⅡⅢ)>(정진성 편저, 2018년 선인)에 서울대 연구팀이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한 미군 자료가 함께 공개됐다. “30명을 총살”했다고 기록한 문서는, Y군의 보고 일지 ‘G-3 Daily Diary’의 1944년 9월 15일자에 들어 있었다. 증언자는 미치나에서 그 몇 개월 전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텅위에로 이송된 버마인 저격수였다. 영국군 포로가 일본군 손에 처형당한 정보와 아울러 “(텅위에 함락 전날 밤인 1944년 9월) 13일 밤 일본군이 조선인 여성 30명을 총살했다”고만 증언하고 있다. 목격담인지 전문(傳聞. 전해 들은 말)인지는 모른다. 전문이라면 돈 준장의 평전에 등장하는 중국군 보병 '리시후'가 증언한 “여성들은 모두 권총으로 자결했다”는 내용 쪽이 실상에 가까울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최초의 기록 발견자는 재미 역사학자 방선주
정진성이 영상을 공개하기 2년 전에 출판한 <일본군 성노예제>(서울대출판문화원, 2016년)를 읽어 보니, 이 책에 이 기록의 존재가 이미 지적돼 있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이 기록을 발견한 것은 재미 역사학자 방선주로, 1997년 8월에 한국의 민방 MBC에서 소개했다고 한다. 사진도 기록도 20년 전에 발견된 것이고, 단지 그 관련 영상이 발견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자결을 강요했다고 해도 전쟁범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자결과 학살은 그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이러한 영상들이나 문서를 학살의 증거로 삼는다면 좀 더 설득력 있는 논증이 되어야 했다. 더욱이 문제는 한국 언론의 센세이셔널한 보도로 '학살'이 기정 사실로 혼자 앞질러 가 버린 것이다.
조사를 주도한 정진성은 '한국정신대 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현재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공동대표를 맡은 운동가로도 알려져 있다. 유엔 인권이사회의 자문위원을 맡아 이 영상이 공표되기 전 해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 위원(임기 3년)으로 선출됐다. 영상을 공개한 지 반년 뒤에는 제네바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회의에서 사용된 '성노예'라는 표현을 둘러싸고 일본정부 대표와 설전을 벌이며 주목을 받았다. 성노예라는 말에 집착하는 데에는 예사롭지 않은 점이 있는데, 이는 당시 정대협의 영어 명칭이 ‘일본군 성노예제도에 의해 끌려간 여성들을 위한 한국위원회」였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위안부들이 성노예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단정적인 견해는 실상을 왜곡하고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 일으킨다.
버마로 이송된 조선인 ’위안부‘는 1천 명 이상
라모와 텅위에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여성들의 출신지는 북쪽의 평안도에서 중부 경기도, 남쪽 경상도까지 다양하다. 미 전략정보국 문서에 따르면, 그녀들 중 15명이 조선을 떠난 것은 1943년 7월이었기 때문에 징집 당시 평균 연령은 23세 정도였다. 싱가포르 공장에서 일한다는 신문의 모집 광고에 응하는 등 여기에서도 속아서 이끌려 온 여성들이 많아, 같은 배로 적어도 300명의 여성이 남방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녀들보다 1년 먼저 버마에 보내진 미치나 위안부의 경우, 같은 배에 약 700명의 여성들이 타고 있었다. 전황(戰況) 악화 때문인지 위안부 동원 규모가 (그 1년 전보다) 조금 축소된 것처럼 보인다.
북버마의 전장에서 연합군의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는 모두 42명으로, 이름이나 출신지 등 개인정보에다 사진까지 발견됐지만, 신원은 거의 확인되지 않았다. 미치나의 포로들을 추적한 KBS가 그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은 여성을 제시했지만 이미 사망했다. 그 여성은 종전 뒤 계속 중국에 남아 10년 정도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종전 무렵에 출산한 것으로 보이는 아이도 있는 것 같다. 미치나에서 포로가 된 위안부 중에는 자신이 임신 초기였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인도에서 구류생활을 하던 중에 출산한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라모에서 포로가 된 만삭의 위안부는 반세기 이상 지나도록 북한에서 생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 김학순이라는 피해여성이 처음으로 공개 증언에 나선 이듬해(1992년)에 북한에 '종군위안부·태평양전쟁 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나중에 '조선일본군 성적 노예 및 강제연행 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조대위]로 개칭)가 발족해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호소했다. 1998년까지 신고자 수는 218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43명이 공개 증언에 응했다. 이 시기에 도쿄에서 결성된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 네트워크’가 예전 일본군의 '위안부 제도의 책임자'를 심판하는 민간법정 '여성 국제전범 법정'을 여는 것을 제창했고 북한도 호응했다.
미군 사진 속 만삭의 ‘위안부’는 남포 출신 박영심
텅위에의 중국측 자료를 발굴한 니시다가 전 일본군 병사의 증언이나 전기(전쟁기록)의 기술과 북한의 신고자 정보를 대조하고 확인해, 미군의 사진에 찍힌 만삭의 위안부가 박영심(2006년 사망)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박영심은 포로가 되자마자 사산한 뒤 쿤밍의 수용소로 보내졌다. 종전 직후 포로가 된 조선인 여성들은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인도돼 종전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다. 위안부가 된 지 7년 뒤(1950년) 박영심은 마침내 조선 북부에 있는 고향 남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2000년 8월 평양을 찾은 니시다와 면회한 박영심은 "지금까지 임신한 것에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일본군의 아이를 뱄다는 게 너무 굴욕적인 일이어서 도저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 (<전장의 ‘위안부’>)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같은 해 말 도쿄에서 열린 여성 국제전범 법정에 참여하기 위해 박영심은 태어나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일본행을 결심한 것은 "그들이 어떻게 심판받는지 이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쇼와 천황(히로히토)에 유죄 판결을 내린 이 민간 법정은 보수 측으로부터 ‘극좌 프로파간다’라는 비난을 받은 파란의 이벤트가 됐다. 라모의 전멸전에서 살아남은 박영심은 반세기 뒤의 일본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위안부’는 과연 일본군의 ‘전우’였을까?
라모에서 살아남은 일본병사들의 청취 조사를 한 작가 엔도 미유키가 2009년에 발표한 ‘전장의 사회사: 버마 전선과 라모 수비대의 1944년 6월-9월’에 따르면, 라모와 텅위에의 포로가 수용된 쿤밍의 수용소 생활은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박영심을 잘 아는 일본군 상병 출신의 하야미 마사노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쿤밍의 수용소에서) 와카하루 [박영심의 위안소에서의 이름] 씨는 잘 챙겨 주었고, 세탁 등을 하러 자주 와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니 유스케 하사관과 사이가 좋았습니다. 와카하루 씨는 일본어도 잘 하고, 일본 노래도 잘 불렀으며, 자주 유행가를 불러 주었습니다. 매우 쾌활하고 기분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재회한 병사와 위안부들이 오랫동안 힘들었던 라모의 나날들을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생사를 함께 한 일본군 병사들과 위안부들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것과 관련한 생각을 나눈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작가 엔도 ”그들은 일본군 ‘성욕 배출구’였을 뿐“
하지만 일본군 병사 출신자들을 청취 조사한 엔도는 그들이 위안부를 '전우'라고 부르고 있던 것에 위화감을 느끼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그녀들의 존재 이유는 장병들의 성욕 배출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여성들의 치욕과 고통, 원한은 몸과 마음에서 평생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들은 모두 식민지에서 태어나 열등의식에 시달리며 자랐다. 거기에다 위안부를 강제당한 신세였다. 병사들의 전우였을 리가 없다. 적군의 손에 구출됐지만 긴 위안소 생활의 속박에서 벗어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들의 몸에 스며든 당시의 행동이나 언동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굴욕적인 처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매춘의 실태라고 주장해도,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 군이 관여한 사실이 밝혀져 있는 이상, 여성들의 인권을 짓밟은 국가범죄라는 비난과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참고자료
【일본 자료】
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編 「政府調査「従軍慰安婦」関係資料集成①警察庁関係公表資料」、1997年
和田春樹 「政府発表文書にみる「慰安所」と「慰安婦」」『「慰安婦」問題調査報告・1999』財団法人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1999年
浅野豊美 「雲南・ビルマ最前線における慰安婦達―死者は語る」同
西野瑠美子 『戦場の「慰安婦」』明石書店、2003年
尹明淑 『日本の軍隊慰安所制度と朝鮮人軍隊慰安婦』明石書店、2003年
遠藤美幸 「戦場の社会史:ビルマ戦線と拉孟守備隊1944年6月―9月」慶應義塾経済学会、2009年
永井和 「日本軍の慰安所政策について」、2012年
山本晴太 「日韓請求権協定解釈の変遷」、 2014年
永井和 「破綻した「日本軍無実論」」『世界』2015年9月号
【한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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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성 편저 <일본군 위안부 관계 미국 자료 ⅠⅡⅢ> 선인 2018년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미래사 2019년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미래사 2020년
【미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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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bi-theater.com/roundup/roundup113044.html)
Korean and Japanese Prisoners of War in Kunming,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China Theater, April 28,1945
Research Report No.120, Allied Translation and Interpreter Section, November 15,1945
Chan, Won-Loy, Burma, The Untold Story, Preside Press, 1986
Ravenholt, Betty, West Over the Seas to the Orient, 2009
Cornebise, Alfred Emile, Soldier Extraordinaire, Combat Studies Institute Press, 2019
(https://www.armyupress.army.mil/Portals/7/combat-studies-institute/csi-books/soldier-extraordinaire-the-life-and-career-of-brig-gen-frank-pinkie-dor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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