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원점 ⑤] 일본 책임과 배상문제
설명 안된 청구권 자금과 “최종적 해결”간의 인과관계
일본 대법원 중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겐 ’화해‘ 권고
중요한 ’관부 재판‘ 판결...보상과 일본국가 책임 명시
일본정부에 과거범죄 배상할 "‘법적 작위 의무’ 있다"
미완의 '법적 작위 의무’
한일은 1965년의 청구권·경제협력협정의 제1조에서, 무상 3억 달러·유상 2억 달러의 공여와 대출이 한국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규정한 다음, 제2조 1항에서 “양국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의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본에서 다툰 한국인을 원고로 하는 전후 보상소송에서 원고는 '개인의 청구권'은 협정에 따라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했다. 이에 대해 피고인 일본정부는 실체적 권리를 가리키는 '재산, 권리 및 이익'뿐만 아니라 개인의 청구권도 '외교보호권에 의해서만 실현되는 권리'이기 때문에 그 협정으로 소멸했다고 반론하고 있다.
또한 중국인을 원고로 하는 전후 보상소송에서도 일본 대법원(최고재판소)이 2007년에 원고 청구를 물리치는 결정을 내려, 일본 사법에 의한 구제의 길은 완전히 폐쇄돼 있다. 그때의 대법원 판단은 개인의 청구권을 포함해 전쟁 수행 중에 발생한 모든 청구권을 서로 포기하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틀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인의 전후 보상 소송에서도 청구권협정 및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틀'에 따라 원고 패소가 결정되어 개인의 청구권은 재판상 소구할 수 없는 '구제 없는 권리'로 간주된 것이다.
설명되지 않은 청구권협정 자금 제공과 “최종적 해결”간의 인과관계
청구권협정은 태평양전쟁 중의 국민징용령과 징병제 시행으로 피해를 입은 한반도 출신의 군인, 군속, 징용공(강제동원 노동자) 등의 대일 청구권을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협정에 부속된 ‘합의 의사록’은 징용당한 사람들에게 지급되지 않은 자금이나 보상금을 포함해서 청구에 관해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 협정 제1조의 경제협력 자금과 제2조에서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의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되어 있지 않다. .
이것은 한일 양측의 사정에 따른 것이었다. 1965년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 제2조가 한일병합과 식민지배에 대해 “이미 무효”라고 규정한 것과 관련해, 일본측이 그것은 쌍방의 합의에 의한 합법적인 것이었지만 (한국의 독립으로 비로소) '이미 무효‘가 됐다고 해석한 반면, 한국측은 일방적인 침략행위로 한국 병합은 '(침략 및 식민지배) 당초부터 무효'라고 해석했다. 식민지 지배를 합법이라 주장하는 일본은 배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경제협력이라고 했고. 식민지 지배는 불법이지만 경제건설 자금이 필요했던 한국은 경제협력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배상이어야 했기에, (양국이 각자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도록 한) 그런 애매모호한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국정부가 떠맡은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은 무상 3억 달러 중 5.4%에 그쳤으며 대부분이 국내 인프라 건설에 쓰였다.
강제동원 피해자들 배상 책임, 1965년 협정으로도 소멸 안돼
노무현 정권이 발족되면서 청구권협정 당시의 외교문서가 2006년에 공개된 것을 토대로 협정에 관한 한국정부의 공식 해석을 보여주기 위해 국무총리(총리)가 주최하는 '한일회담문서 공개 민관공동위원회'(민관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이 위원회는 무상 3억달러에 대해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갖고 있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됐다”고 결론지어 한국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보상 조치가 불충분했다고 판단했다. 한편 일본 정부에게는 일정한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정부·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
반관반민의 '아시아 여성기금'의 보상사업과 정부예산으로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의 보상은 모두 '구제 없는 권리'를 보상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그것을 한국의 위안부 지원 단체가 거부한 이유는 명확한 국가배상이 아니면 피해자의 존엄성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의 국가배상이란 전쟁피해에 의한 손해의 보상, 즉 (한국이 참여하지도 못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틀에 근거한 보상이 아니라 일본이 합법이라 주장하는 식민지 지배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의한 피해에 대한 보상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관공동위원회의 견해와 같다. 협정으로 해결이 끝났다는 입장을 바꿀 수 없는 일본정부와, 식민지 지배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정부의 주장의 격차는 크고, 이대로는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일본 최고재판소, 중국 피해자들에겐 ’화해‘방식 권고
중국인 원고의 호소를 물리친 앞서 얘기한 일본 대법원(최고재판소) 판결은 재판상 소구할 수 없는 '구제 없는 권리'의 해결책으로서 관계자에 의한 '화해'를 암시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틀에서도 개별 구체적인 청구권에 대해 채무자 측에서 임의의 자발적인 대응을 하는 것은 방해받지 않는 바, 본건 피해자들이 입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이 매우 큰 한편으로, 상고인[피고기업]은 앞서 언급한 근무조건으로 중국인 노동자들을 강제노동에 종사하게 해 상응하는 이익을 얻었고, 나아가 상기의 보상금을 취득하고 있는 등의 제반 사정을 감안하면 상고인을 포함한 관계자들이 본건 피해자들의 피해 구제를 위해 노력할 것으로 기대되는 바이다.
판결에 따라 피고기업인 '니시마쓰 건설'이 제안한 ’화해‘가 나중에 성사됐다. 법적 책임에 관하여 원고와 피고 사이에 견해의 일치를 보지는 못했지만 피해자 측이 납득한 형태(배상 아닌 위로 차원의 화해금 지불, 가해 기업의 사죄 및 재발방지 약속)로 문제를 해결한 매우 드문 예이다.
중요한 ’관부 재판‘의 판결…포상과 일본국가 책임 명시
조선인 전 위안부 등이 일본에서 제기한 재판에서는 원고가 그나마 일부 승소한 경우도 하나뿐이다. 부산시 등에 사는 전 위안부 3명과 전 정신대 대원 7명이 1992년 야마구치 지방재판소(지법) 시모노세키 지부에 제소한 ‘부산 종군 위안부·여자 근로정신대 공식 사죄 등 청구 사건’(관부 재판)이다. 야마구치 지방재판소는 피고의 나라(일본)에 대해 전 정신대원의 청구는 기각했지만, 전 위안부에 대해서는 30만 엔의 배상을 명했다. (이마저 결국) 대법원에서 원고 패소가 확정되었지만, 관부재판의 판결은 일본 전후 보상에 엄격한 반성을 촉구하는 동시에 문제해결을 위한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한 획기적인 판결이었다.
판결은 먼저 위안부 제도가 철저한 여성 차별, 민족 차별로 여성 인격의 존엄을 근저로부터 침범한 제도였음을 인정하고, “20세기 중반 문명 수준에 비추어도 매우 반인도적이고 추악한 행위였던 것은 명백했으며, 적어도 일류 국가를 표방하는 제국 일본이 그 국가 행위에서 가담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고 단언했다. 거기에다 국가에게는 원고에게 추가 피해를 증대시키지 않도록 보증해야 할 '법적 작위 의무', 즉 배상입법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그것을 게을리하고 다년간 원고의 고통을 방치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는, 1993년의 고노 담화와 함께 발표된 일본정부의 조사 결과에 따라, 그로부터 3년이 경과한 1996년에는 법적 작위 의무가 명확해졌음에도, 1998년의 판결 시점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1년여의 법률 제정 지연에 대한 '입법 부작위'의 배상이 30만 엔이고, 본래의 배상은 국가에 특별 입법을 해서 배상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 고등재판소는 사실 인정만 확정하고 배상은 기각했으며, 최고재판소는 이를 최종 확정했다)
국가의 법적 작위 의무에 대해 판결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일본정부 과거사 범죄 배상할 ‘법적 작위 의무’ 있다
일본국 헌법 제정 전의 제국 일본의 국가행위에 의한 것일지라도 이와 동일성이 있는 국가인 피고에게는 그 법적 침해가 실로 중대한 만큼 피해자에게 더 이상의 피해를 증대시키지 않도록 배려, 보증해야 할 조리상의 법적 작위 의무가 부과돼 있다고 해야 하며, 특히 개인의 존중, 인격의 존중에 근원적 가치를 두고 있고 또 제국 일본의 군국주의에 관하여 부정적 인식을 갖고 반성하는 일본국 헌법을 제정한 뒤에는 점점 그 의무가 무거워져, 피해자에 대한 손해 회복 조치를 어떻게든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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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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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armyupress.army.mil/Portals/7/combat-studies-institute/csi-books/soldier-extraordinaire-the-life-and-career-of-brig-gen-frank-pinkie-dor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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