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식민통치 위해 검사 권한 크게 늘려

해방 후 '일제 순사' 잔영으로 수사권까지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소준섭 전 국회도서관 조사관
소준섭 전 국회도서관 조사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후보가 검사 권한이 일제시대 때 부여됐다고 주장한 데 대해 법무부가 "일제시대와 무관하며 갑오개혁 때 도입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갑오개혁'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인 1944년 경성제국대학 교수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가 '근대조선에서의 정치적 개혁'이란 논문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다. 그는 이 '갑오개혁'에 대하여 "전쟁의 긴박 속에 개혁 필요성을 자각한 조선 관료의 혁신 분자들이 일본 정부의 전면적 원조를 얻어 메이지 유신의 홍업(鴻業, 대업)을 본받아 500년 구체제를 타파하고 근대국가의 모습을 정비하려 기도한 사업"이라고 규정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고종 감금 하에 시행된 갑오개혁

1894년 일제는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조선에 무단 출병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농민군과 화약을 맺고 청나라와 일본 양국에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이 요청에 응했지만 일본은 거부했다. 일본은 조선 내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변란이 계속 일어나고 있으므로 내정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전까지는 철수할 수 없다고 강변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6월 21일, 군대를 동원해 불법적으로 경복궁을 습격해 점령하고 고종을 감금했다. 당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 공사는 조선 정부에게 이른바 <내정개혁방안 강령 5개조>를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김홍집이 총재관을 맡았다. '의정부 관제안'이 1894년 6월 28일 가결됐으며 7월 20일에 정식으로 시행됐다. 이를 필두로 조선의 모든 제도를 일본식으로 전환시키려는 조치가 이뤄졌고, 이것이 곧 갑오개혁이었다. 그러나 갑오개혁의 주도자였던 김홍집은 조선인들로부터 '왜대신(倭大臣)'이란 비난을 받았으며,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피살된 을미사변으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아관파천 당시 성난 군중들에 의해 타살됐다.

결국 갑오개혁이란 근대성으로 포장한 일제의 침략 도구로써, 조선을 병탄하려던 일본이 먼저 조선에 일본식 제도를 강제로 적용하려는 목적으로 강행된 것이었다. 즉, 조선 식민지화의 토대를 쌓기 위한 일제의 사전 공작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이미 1876년 강화도 침략 때부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으며, 사실상 '갑오개혁'에 의해 그 야욕은 이미 절반 이상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의 모습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의 모습

일제강점기 식민통치 위해 특별히 강화된 검사의 권한

따라서 갑오개혁에 의해 검사(개념)가 출현했다는 것은 그리 내놓고 자랑할 일이 결코 아닐 터이다. 갑오개혁에 의한 '재판소구성법'과 1895년 3월 '평리원(平理院, 고등재판소) 검사국' 설치로 검사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명칭이 '고등법원 검사국'이었다는 점에서 갑오개혁 때의 '평리원 검사국'이란 제도가 법원에 검사가 소속된  특수한 조직형태를 띠고 또 동일한 범주의 명칭을 이어감으로써 결국 100% 일본식이라는 점이 역설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재판소구성법' 역시 일본의 '裁判所構成法'이란 명칭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일제는 1912년 조선형사령을 제정했다. 그 핵심은 바로 영장제도의 배제로서 검사와 사법경찰에게 예심판사에 준하는 강제처분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이 '조선형사령'은 검사가 현행범이 아닌 사건이라도 "급속한 처분이 요하는 때"는 공소 제기 전에 영장을 발부해 검증, 수색, 물건 압수를 하거나 피고인과 증인을 신문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또 검사에게는 20일 이내의 피고인 구류권도 허용했다. 판사의 영장 없이도 피의자를 일정 기간 구금한 채 강제 수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급속한 처분이 필요한 때"라는 불명확한 규정으로 그 판단의 주체를 전적으로 검사에게 맡기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위해 인신구속과 구금이 가장 필수적인 요소로 파악했다. 그래서 조선 총독을 정점으로 총독이 식민지 검사를 임명하고 그 하부 보조기관으로 사법경찰관을 배치해 인신구속과 체포를 무소불위로 자행함으로써 식민지 통치권력의 극대화를 꾀했다. 이 조선형사령이라는 악법에 의해 무수한 독립운동가들이 희생됐다.

해방 후 '일제 순사' 잔영 덕에 수사권까지 갖게 된 검사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이러한 독소 조항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악명 높았던 '일제 순사'라는 이미지 때문에 경찰에는 수사권을 줄 수 없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결국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 경찰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국회는 검찰에게 기소권뿐 아니라 수사권과 수사지휘권까지 주었던 것이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갑오개혁의 일본식 '관료개혁'의 내용 중에는 서기관을 비롯하여 사무관, 주사, 서기 등 새로운 관제에 의한 직급 명칭도 포함돼 있었는데 이 명칭들은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현재 공무원 사회의 필수 공문서 양식도 갑오개혁 때부터 강행됐다. 당시 공문서를 근대적으로 개편한다는 명분 하에 칙령 제1호로 이른바 '공문식(公文式)'을 제정했다. 그러면서 모든 공문서 양식을 '~함', '~음', '~임' 등으로 문장을 끝내는 '개조식(個條式) 문장'으로 획일화했다. 이는 일본제국헌법을 비롯하여 법령 혹은 국가 명령 등 권위가 필요한 공문서 문장을 '~함'으로 마무리하던 당시 일본의 '문어(文語)'를 조선에 그대로 이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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