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트럼프 중 '울며 겨자먹기' 미 대선
망가진 정치 책임을 누구한테 물어야 할까
민주-공화 난형난제지만 굳이 고른다면 공화
1960년대 달라지기 시작해 90년대 극우로
지난달 21일. 1차 미국 대선토론 일주일 전쯤, 버지니아의 일간지 데일리 프레스에 한 만평이 실렸다. 병약한 바이든(왼쪽)과 죄수 트럼프(오른쪽) 간의 토론회 모습. 돌이켜보면 선견지명의 만평이다. 상식과 이성을 배신하고 인민의 뜻을 외면하는 정치를 이 만평보다 더 날카롭고 착잡하게 풍자할 순 없을 듯하다.
토론회 이후 바이든 퇴진파와 퇴진 불가파—현재까지 바이든은 내가 물러날 이유가 없다며 버티는 중—가 맞서면서 혼돈에 빠진 민주당은 어느 쪽이든 거대한 장애물에 걸린 형국이다. 덕분에 트럼프의 지지율은 올라가고, 오는 15일 지명대회를 통해 후보로 확정되겠지만, 쿠데타 주모자에 파렴치범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미국 사회의 수준에는 경악할 수밖에 없다.
두 후보 다 못 믿겠다 65%, 지지정당 없다 49%
1. ‘이 사람들이 후보가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탄식하는 유권자 50% 이상, 트럼프의 행태와 바이든의 건강 상태로는 이들을 믿을 수 없다는 유권자 65% 이상. 지난 4월 퓨리서치 센터의 대선후보 관련 여론조사 결과.
2. 대립, 극단, 부패, 혼란, 염증, 수치, 무기력, 분노. 사람들이 미국정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퓨리서치센터 23년 7월 조사). 비슷한 시기의 갤럽조사에서 유권자 중 지지정당 없는 무당파 무려 49%, 역대 최고비율.
정치를 이토록 망가트린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고장난 미국정치의 첫 번째 원인 제공자다. 그러나 책임의 경중은 약간 다르다. 적잖은 전문가들은 ‘미국정치에서 망가진 곳은 공화당’이라고 말한다. 상대적으로 민주당보다는 공화당이 극단적 대립, 문제해결보다 혼란을 택하는 작동불능의 정치, 보는 사람들에게 염증과 수치, 분노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창당 이후 변천을 거듭했지만, 2차대전 이후 60년대까지 공화당은 본래적 의미의 보수정당에 가까웠다. 그러나 1960년대를 통과하면서 달라지기 시작, 90년대 들고부터 당은 극우의 길로 내달린다. 미국정치를 추락의 함정으로 이끈 공화당의 극우화, 그 경과와 원인, 맥락을 두 차례에 걸쳐 정리해 보기로 한다.
영욕으로 점철된 공화당의 짧은 이력서
공화당의 역사는 170년 정도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당의 역사에는 미국 현대사가 그대로 응축돼 있다. 1854년 노예제 반대를 기치로 창당된 후, 링컨 대통령과 함께 남북전쟁의 승리, 노예해방을 단행하면서 공화당은 ‘링컨의 정당’ ‘노예해방의 정당’으로 올라선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2차 산업혁명에 힘입은 미국의 폭발적 경제성장 시대를 이끌면서 당은 제2의 건국을 주도하는 정치조직으로 성장한다. 나라는 경제 규모에서 영국을 제치고 세계 1위를 넘볼 정도로 커졌다. 1912년, 민주당 윌슨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거의 50년, 미국은 공화당의 시대였다.
본래 공화당은 북부의 개신교, 노동자, 화이트칼라 전문가 계층, 기업, 농민, 흑인들까지 폭넓은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점차 자본가의 정당으로 변한다. 물론 T.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사회·경제 분야의 개혁정책(예: 독과점 금지, 식품의약규제, 자연보전, 어린이 노동금지법 등)을 추진했지만, 개혁노선은 지속되지 못한 채 경제 성공의 과실에 심취한 자유방임 노선을 지속해 왔다. 이는 1929년 후버 대통령 시절, 대공황 사태를 낳는 씨앗이 됐고, 당은 결국 나라를 망가뜨린 ‘대공황 정당’으로 각인됐다. 20세기 공화당 최대의 실패다. 이를 계기로 남부의 토호 정치조직 정도였던 민주당이 F. 루스벨트가 이끄는 뉴딜의 개혁 정당으로 확고한 자리를 구축하고 집권을 이어간다.
1962년, 2차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가 대선에서 승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공화당의 존재감은 살아난다. 아이젠하워의 공화당은 약간의 규제 완화와 정부 지출의 축소 정도를 제외하면 뉴딜의 기본틀을 유지하는 정책 노선을 취했다. 인종 문제에서도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다. 냉전 시기 J. 매카시 같은 극단도 존재했지만, 당 내부에서 그는 주변부 인물이었다. 1954년 품위 위반으로 징계처분을 받을 때 같은 당 의원 절반 이상이 동의할 정도였다.
노예해방 정당에서 풍요로운 50년대 이끈 온건 보수정당
60년대에도 아이젠하워 스타일의 정치를 이어가려는 온건 보수파가 당의 주류였다. 흔히 ‘합리적(moderate), 진취적(progressive) 공화당’이라 불리는 이들이다. 이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뉴욕 주지사 N. 록펠러—스탠더드 오일을 창립한 미국의 석유왕 J. 록펠러의 손자—다. 작금의 모습에 비춰보면 형용모순처럼 들리지만, 보수성향이면서도 합리적·개혁적 태도를 견지한 당시의 공화당은 사회문화적 영역(예: 낙태문제)에서 개방적 자세를 보였고, 인종문제에서도 민주당보다 오히려 적극적이었다. 1964년의 흑인 민권법안에 민주당 상원의원의 찬성률이 67퍼센트인데 반해 공화당은 80퍼센트, 1965년의 참정권 법안에서도 민주당은 63명 상원의원 중 16명이 반대했지만, 공화당의 반대표는 32명 중 단 2명에 지나지 않았다.
창당부터 이 시점까지 100여 년이 조금 넘는 기간, 공화당은 노예해방 정당에서, 시장 실패의 정당, 풍요로운 50년대를 이끈 온건 보수파 정당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60년대 초, 노선을 둘러싸고 당은 내외부의 우파와 50년대부터 세를 키워온 보수-극우단체의 강한 도전에 직면한다.
1960년 대선 – 본격적으로 시작된 보수-극우의 도전
반(反)뉴딜과 반공(멸공)주의를 축으로 50년대 보수-극우운동을 벌인 주체는 자유시장을 주창하는 기업과 경제이론가, 보수성향의 지식인, 냉전 반공(멸공)주의자, 남부를 지역적 지지기반으로 하는 인종주의 정치인, 전후의 폭발적 경제성장에 힘입어 성장한 중산층 등이다. 이들은 ‘시장의 자유가 자유로운 사회의 핵심이다’ ‘뉴딜은 사회주의 정책이다’ ‘공산제국을 확대하려는 소련을 절대 용인해서는 안 된다’ ‘인간들 사이에 천부적으로 존재하는 차이를 국가가 간여해서 평등하게 만들면 안 된다’ 등등의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뉴딜은 이즈음 대다수 미국인들이 당연히 받아들이는 사회체제였다. 왜냐하면 뉴딜을 통해, 물론 2차 대전이 제공한 경제적 기회와 함께, 미국은 경제적 풍요, 사회적 안정, 그리고 일정 정도의 분배적 평등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공화당이면서도 이 틀을 큰 변동 없이 유지했던 것도 풍요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뉴딜이 폭넓은 사회적 동의를 획득한 체제였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공화당과 보수-극우단체들은 구체적으로 뉴딜의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뉴딜을 철폐할 것인가, 아니면 뉴딜을 수정할 것인가? 등에 대해 분명한 입장과 대안은 없었다. 그러나 1960년의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공화당과 보수-극우운동 내부의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1964년 대선 — 일반 예상 깨고 골드워터 옹립 성공한 보수파
1960년의 대통령 선거는 뉴프론티어를 내세운 민주당 케네디와 반공주의를 내세운 공화당 닉슨의 대결로 치러졌다. 결과는 케네디의 승리였으나 닉슨은 전체 7천만 중 불과 12만 표, 지지율 고작 0.17퍼센트의 차이로 낙선했다. 이보다 더 주목할 것은 남부의 정당인 민주당이 정작 남부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플로리다와 테네시에선 아예 졌다. 사실상 패배였다. 뿌리 깊은 인종차별주의 지역 남부가 민권운동에 적극적인 민주당-리버럴에 보내는 불길한(?) 경고였다.
공화당 보수파 의원들과 외부 보수-극우단체들은 남부의 균열에 주목한다. 이들은 64년 대선후보로 애리조나주 상원의원 B. 골드워터를 미는 지원조직을 만든다. 그는 아이젠하워 정책 비판에 앞장서면서 ‘공화당의 장로, 존경받는 보수정치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한편, 당 개혁파는 록펠러를 후보로 내세워 가장 먼저 대선운동에 나선다. 그런데 앞서가던 그에게 이혼·재혼 문제가 터진다. 가정을 버린 비도덕적 인물이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지도자감이 아니라는 여론이 만들어지면서 지지율은 추락한다. 다음 해 1월, 망설이던 골드워터가 출마를 선언한다. 예비선거가 시작된 3월, 9명의 후보자가 나섰지만, 경쟁은 골드워터와 록펠러의 양자대결로 압축됐다. 골드워터는 자신은 보수의 기수라고 치켜세우면서 록펠러를 민주당의 아류로 몰아붙인다. 동부 엘리트 집안 출신이라 보통 사람을 모른다고 폄훼한다. 그의 사생활 문제도 다시 떠오른다. 보수파의 집요한 공세에 개혁파와 록펠러는 밀린다. 결국 골드워터는 캘리포니아 예비선거에서 승리하면서 대선후보로 사실상 확정된다.
최악 패배를 공화당 변신의 출발점 삼은 극우세력
그는 보수-극우의 구호인 반뉴딜과 멸공주의, 민권운동 반대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기업규제 철폐, 노동조합 약화, 공산국가 압박, 연방정부 및 복지제도 축소 등을 담았다. ‘베트남 핵 폭격’을 주장하는 한편, ‘나는 복지 수혜자의 표 같은 건 필요없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흑백차별 문제는 각 주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연방정부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민주당의 1964년 흑인 민권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당시 33명의 공화당 상원의원 중 27명이 찬성하고 6명이 반대표를 던졌는데 그 여섯 중 한 사람이다. 골드워터는 또 공화당과 민주당의 협치는 뉴딜을 인정하는 것이고, 아이젠하워 정부는 ‘싸구려 뉴딜’을 재현한 것일 뿐이라고 혹평했다. 뉴딜의 국가중심주의는 곧 전체주의 체제로 가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소련과의 ‘핫라인’을 개설했다며 민주당은 약해빠진 정부라고 비난했다. 냉전체제를 유지할 것이 아니라 공격적 노선으로 공산국가들을 압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극우파의 주장이 여기에 다 들어 있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골드워터와 존슨이 맞선 1964년의 선거에서 민주당은 압도적 대승을 거둔다. 선거인단 486 대 52; 상원 68 대 32; 하원 295 대 140; 주지사 33 대 17. 골드워터는 출신 주인 애리조나 포함,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오직 남부 6개 주에서만 이겼다(선거 지도 참조). 민주당으로서는 이보다 큰 정치적 승리가 없었고, 공화당으로서는 이보다 큰 정치적 패배가 없었다.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당 내외 보수-극우세력이 힘을 합해 록펠러 후보라는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골드워터를 후보로 선출해 냈다는 점, 둘째는 이들이 64년의 거대한 패배를 공화당 변화와 도약의 극적 전기로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골드워터가 매개한 공화당-극우세력의 연합전선
1964년의 대패로 공화당은 물론 보수주의 운동도 끝이 났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 평가였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실상은 달랐다. 당내 보수파는 패배가 아니라 남부를 당의 지지 권역으로 끌어들일 가능성을 확인했다. 보수주의 이론가와 운동가들은 공화당을 민주당의 아류가 아니라 제대로 된 보수정당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일선의 골드워터 지지자들은 선거 패배 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더 강한 보수의 전사로 뉴라이트 조직의 기반을 다졌다.
골드워터는 이렇게 주류 보수정당과 극우세력(예: 반뉴딜주의자, 반연방정부주의자, 멸공주의자, 근본파 복음주의 기독교도 등) 연합전선의 매개자가 됐다. 이것이 한편으로는 뉴라이트 조직을 탄생시키며 보수 우위의 사회 분위기를 다지는 출발선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닉슨, 레이건, 부시로 이어지는 공화당 정권의 디딤돌이 되었다.
공화당 극우화의 첫 발걸음은 이렇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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