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주의 성향 중·상위 노동계급 청년 시위 주도

'기성체제 편입' 부모 세대의 대중 운동 극복 시도

'말 따로, 행동 따로' 케냐 루토, 신뢰 위기 봉착

가혹한 서민 증세안 철회에도 대통령 사임 요구

'아무 생각 없었던' 케냐 Z세대의 정치적 각성

"청년들, 우리가 너무 게을러서 못했던 걸 해"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다. 많은 사람이 우리보다 먼저 죽었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 교외 마을 주자에 사는 청년 안두루 오우코는 27일 시위 참가차 18km를 걸어가면서 알자지라에 이렇게 말하고 "더 많은 사람이 죽겠지만, 우리는 정치인들에게 바보로 취급받는 우리 세대를 위해 일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 도심 거리에서 경찰관들이 항의 시위에 대한 진압 작전을 펼치고 있다. 2024. 06. 27 [EPA=연합뉴스]
케냐 수도 나이로비 도심 거리에서 경찰관들이 항의 시위에 대한 진압 작전을 펼치고 있다. 2024. 06. 27 [EPA=연합뉴스]

'아무 생각 없던' 케냐 Z세대의 정치적 각성

가혹한 서민 증세안 철회에도 루토 사임 요구

윌리엄 루토 정부의 대대적 서민 증세 재정법안 추진에 반발해 18일 시작된 항의 시위는 날로 격렬해지면서 나이로비를 포함한 케냐 전국으로 확산했고, 급기야 의회에서 입법 표결을 강행한 25일 경찰의 실탄 사격 등으로 최소 23명이 시민이 숨지는 유혈 참사가 벌어졌다. 더 거세질 시위를 우려한 루토 대통령은 그날 오후 본인이 밀어붙인 재정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해 폐기하겠다고 밝혔지만, 청년 시위대는 루토의 대통령직 사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항의 시위의 주축은 케냐의 Z세대(1990년대 중후반∼2000년대 초반생)이다. 2년 전 총선 때만 해도 투표장에 가지 않아 "아무 생각 없는" 세대로 케냐 민주주의의 구멍이란 조롱을 듣기도 했지만, 불과 2년 만에 정치적으로 몰라보게 각성한 셈이다. 이들이 대거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데 대해 정치 연구가이자 작가인 난잘라 냐볼라는 "그들은 보는 대로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논평했다.

일련의 시위는 인스타그램, 틱톡, X와 같은 소셜 미디어 플랫폼들을 통해 논의, 조직되고 실행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일요일인 지난 22일 '트위터 스페이시즈'(Twtter Spaces)에서 6만 명이 모여 진행한 7시간의 마라톤 토론이었다. 여기서 시위 계획을 세우고, 기금을 모으고, 부상 대비 의료팀과 헌혈봉사단도 조직했다.

 

28일 케냐 수도 나이로비 거리에서 서민 증세안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의회 의사당에서 사망한 이브라힘 카마우(19)의 관을 유가족과 친지, 동료들이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2024. 06. 28 [AFP=연합뉴스]
28일 케냐 수도 나이로비 거리에서 서민 증세안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의회 의사당에서 사망한 이브라힘 카마우(19)의 관을 유가족과 친지, 동료들이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2024. 06. 28 [AFP=연합뉴스]

"40년 이어진 슬로 모션 혁명의 최신 단계"

기존 질서를 뒤엎는 방식으로 디지털 활용

제네바의 비영리 언론매체인 '더 뉴 휴머니타리안'의 파트릭 가타라 선임 에디터는 25일 알자지라 기고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 행동을 조직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 기존 질서를 흔들고 뒤엎는 방식으로 인터넷, 디지털 기술, 소셜 미디어 같은 첨단 도구를 활용한다"며 "그들은 주류 미디어보다는 소셜 미디어를 활용해 메시지를 퍼뜨리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젊은이들은 그들을 장악하려는 정치인들의 시도에 저항해왔다"며 "지금의 운동은 그동안 루토(대통령)가 마주했던 그 어떤 운동보다 훨씬 덜 위계적이고 훨씬 더 동등하다"고 진단했다.

가타라 에디터는 케냐의 현 상황을 "40년 넘게 이어져온 '슬로 모션 혁명'의 최신 단계"라고 규정했다. 케냐 국민은 오랜 기간 케냐 정부의 독재와 부패, 민생 방치 등과 싸워 왔지만, 이번에 새로운 청년 세대가 그 부모 세대로부터 싸움의 바통을 이어받게 됐다는 게 그의 견해다.

1980~1990년대 성년이 된 이들의 부모 세대는 케냐의 민주화를 위해 독재 체제와 싸우면서 나름 많은 성취를 이뤘다. 가타라는 "이들의 부모 세대는 (그 이전의) '독립세대'가 설정한 참여의 룰(규칙)을 거부했다. 그 룰은 대체로 민주주의적 자유와 개인의 인권을 희생하면서 개발과 단결, 평화 같은 관념들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미국을 국빈방문 중인 윌리엄 루토 케냐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공식 환영식을 하는 동안 백악관 발코니에 함께 서 있다. 2024. 05. 23 [로이터=연합뉴스] 자료사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미국을 국빈방문 중인 윌리엄 루토 케냐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공식 환영식을 하는 동안 백악관 발코니에 함께 서 있다. 2024. 05. 23 [로이터=연합뉴스] 자료사진.

부모 세대, 대중 운동으로 '모이 24년 독재' 종식

경제개발 구실로 자유·인권 희생한 '독립세대' 거부

가타라는 "그들(부모 세대)은 억압적인 체제와 고압적인 국가에 대한 새로운 관여 방법을 개발했다"며 "그들은 집회 등 대중 행동을 통해 정치 시스템의 개혁을 요구하면서 냉전 종식 같은 글로벌 정세 변화를 활용했으며, 국가 바깥(시민사회)에 강력한 동맹과 제도들을 구축해 대중적 불만을 의미 있는 행동으로 연결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부모 세대의 대중 운동에 힘입어 2002년 24년의 다니엘 아랍 모이 독재 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1964년 영국에서 독립한 직후부터 시작된 카누(KANU) 당의 40년 지배도 종식됐다. 그 결과 케냐의 정치는 달라졌고, 권력 경쟁 공간이 열렸으며, 개인의 자유 범위가 확장했고, 경제 발전에 다시 시동이 걸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 한계도 드러났다. 가타라에 따르면, 대중 운동에 몸담았던 부모 세대 중 상당수가 선출직 정치인이나 임명직 공무원 등 제도권으로 들어갔다. 독재자 모이 반대 시위의 기반이었던 시민사회 조직들은 힘을 잃었고, 독립언론이나 종교 단체 같은 운동의 다른 주요 기둥들도 새로운 정권 담당자들과의 관계에 편승함으로써 비판적 기능을 대부분 상실했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 도심 기리에서 항의 시위를 시민들이 폭동진압 경찰에 맞서고 있다. 2024. 06. 27 [AFP=연합뉴스]
케냐 수도 나이로비 도심 기리에서 항의 시위를 시민들이 폭동진압 경찰에 맞서고 있다. 2024. 06. 27 [AFP=연합뉴스]

부모 세대 '제도권화'…언론·종교 비판 기능 상실

"세계주의 성향 중·상위 노동계급 청년 주도"

부모 세대의 한계와 관련해 그는 "자신들이 싸웠던 약탈적 식민 국가를 대부분 복제했던 이전의 '독립세대' 처럼 그들 역시 경쟁적 정치를 혼탁하게 하고 책임성을 훼손하고 어떤 점에선 케냐인이 성취한 자유에 역행을 시도하는 부패한 옛 네트워크들을 재구축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논란이 된 2007년 선거에 뒤따른 폭력 사태의 영향으로 (부모 세대의) 개혁 운동은 잠시 재편성된 다음 그들 세대의 최고 성취인 신헌법 채택을 밀어붙였다. 이는 케냐에서 국민이 참여한 상황에서 협상이 이뤄진 최초의 사례다"라고 평가했다.

가타라는 이제 청년 세대가 부모 세대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하고 있다고 봤다. 그는 "지금의 (케냐) 청년들은 부모 세대가 구축한 세계에서 성장해 부모 세대가 '성취'로 보는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며 "그들의 시선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확고하게 맞춰져 있어 그들의 시야는 필연적으로 더 넓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월오브그레이트아프리칸스'의 카를레스 오냐은고-오보 기자는 '케냐의 Z세대와 혁명의 위기'란 26일 자 '네이션' 기고를 통해 서민증세에 항의한 거대한 청년 시위는 "케냐나 다른 아프리카에서 봐왔던 어떤 것과도 달리, 시작 단계에서 대부분 선거권이 없는 세계주의 성향의 중·상위 노동계급 청년들에 의해 주도됐다"며 "날이 갈수록 사태는 더 커져 더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시위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도심 거리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는 청년들이 반정부 구호를 외치고 있다. [AFP=연합뉴스]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도심 거리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는 청년들이 반정부 구호를 외치고 있다. [AFP=연합뉴스]

'말 따로, 행동 따로' 케냐 루토, 신뢰 위기 봉착

"청년들, 우리가 너무 게을러서 못했던 걸 해"

현재 청년 시위대는 대통령직 사임을 계속 요구하고 있지만, 루토 대통령은 침묵하고 있다. 특히 이번 시위 대처 과정에서 루토 대통령은 그의 '이중성'이 드러나 신뢰의 위기를 맞았다. 한편으론 청년들을 향해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경찰에게 강경 진압을 지시해 결과적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위 핵심 리더들 일부는 납치됐으며, 실종된 것으로 현지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정치 분석가인 헤르만 마뇨라는 이젠 루토 정부가 Z세대 시위대의 목소리를 듣는 길밖에 없다는 견해를 내놨다. 마뇨라는 "의회 급습과 뒤이은 대통령의 문제법안 철회를 비롯해 지난 며칠 간의 사건들은 (루토) 정부가 심각한 정통성 문제에 직면했다는 한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라며 "이런 수준의 분노는 그냥 시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마뇨라는 "이 나라는 새로운 케냐로 안내할 의도를 갖고 국가 차원의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이런 새 정신을 활용, 조직해야 한다"며 "이를 통해 케냐 경제 발전의 기초인 정치를 바꾸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시위 과정에서 조카 엠마누엘을 잃은 은잠바는 "그(루토)가 일주일 전, 한 달 전에 그 법안을 철회했더라면, 엠마누엘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것"이라며 "Z세대는 성년이 됐다. 그들은 늘 우리가 너무 게을러서 못했던 걸 하고 있다. 나는 지금 비통하지만, 우리 아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그를 한 명의 영웅으로 가슴 속에 묻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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