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민주유공자법 등 거부권 행사 수순
국토부·보훈부 장관, 거부권 행사 건의해
국민의힘, 야당 주도 5개 법안 거부권 건의
5개 모두 거부한다면 15번째 거부권 행사
윤석열 대통령이 21대 국회 본회의 마지막 문턱을 넘은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 민주유공자법 제정안 등 주요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앞서 윤 대통령은 일주일 전인 지난 21일 채해병 특검법에 대해 10번째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다. 대통령이 이번에 또다시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거부권 남용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행정부 수반이 거부권을 남용해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의 입법권을 마비시키는 '행정독재'라는 말까지 나온다.
앞서 국회는 28일 오후 본회의를 열어 △전세사기 특별법 △민주유공자법 제정안 △농어업회의소법 제정안 △지속가능한한우산업지원법 제정안 △4·16 세월호참사피해구제지원특별법 개정안 등 5개 주요 법안을 통과시켰다. 국민의힘은 이들 법안이 여야 합의 없이 처리됐다는 이유로 표결에 불참했다. 아울러 5개 법안 전체에 대해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추경호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오늘 본회의를 통과한 법안은 여야 합의 없이, 사회적인 논의도 거치지 않은 무리한 법인 만큼 대통령에 재의요구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건의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21대 임기 만료 직전 거부권 '꼼수'
자정에 법안 넘겨 재의결 차단할 듯
통상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자구 정리 후 정부로 이송되기까지 통상 일주일가량 소요된다. 대통령은 법제처가 법안을 접수한 날로부터 15일 안에 법안 공포를 할지, 거부권을 행사할지 결정해야 한다. 지난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채해병 특검법의 경우, 닷새 뒤인 7일 정부로 이송됐으며, 윤 대통령은 21일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번에 통과된 5개 법안은 21대 국회 임기 만료(5월 29일)를 하루 앞두고 통과했기 때문에 통상적인 절차를 따른다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22대 국회 개원(5월 30일) 이후에야 가능하다.
그러나 22대 개원 이후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해석에 있어 다툼이 발생할 수 있다. 국회 사무처는 21대 국회와 22대 국회는 별개의 회의체이고, 21대 국회에서 발의안 법안을 22대 국회에서 재의결이 가능한지에 대해 선례가 없어 자동폐기와 재의결 등 여러 반론이 맞설 수 있다는 입장이다. 헌법학자들도 자동폐기와 재의결을 두고 의견이 엇갈린다. 다만 대통령이 29일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국회 사무처는 21대 국회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22대 국회에서 재의결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대통령이 29일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국회가 재의결하지 못하면 21대 국회 임기만료로 법안은 자동 폐기된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법안을 당일 국회에서 받는 '긴급 이송' 절차를 밟기로 했다. 법제처 관계자는 <시민언론 민들레>와 통화에서 "긴급이송 절차를 밟은 5개 법안이 모두 정부로 넘어왔다"고 전했다. 대통령실과 정부는 22대 국회 개원 이후로 넘어가면 법적 다툼의 소지가 있는 만큼 29일 곧바로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거부권을 행사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해 21대 국회가 끝나는 29일 자정 무렵에 국회로 법안을 돌려보내는 '꼼수'로 재의결 가능성까지 원천 차단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21대 국회 임기 만료에 맞춰 거부권을 행사해 표결을 못하더라도 다툼의 여지는 남아 있다. 지난 2016년 5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19대 국회에서 통과한 '상시청문회법'(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국회 임기 만료 직전 거부권을 행사했을 당시에도 여야 간 해석이 엇갈렸다. 결국 재의결 없이 법안은 폐기됐지만, 당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당은 20대 국회에서 재의결이 가능하다고 맞섰다.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정부, 여당이 거부권 행사를 서두르는 데에는 22대 국회의 달라진 지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22대 국회에서 범야권 의석수가 192석인 만큼 재의결에서 8명의 이탈표만 발생해도 거부권 무력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채상병 특검법 재의결이 사실상 이탈표 없이 부결됐지만, 재의결을 앞두고 국민의힘 내에서 5명이 공개적으로 특검 찬성 의견을 밝히며 반발한 것이 대통령에게도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5개 법안 모두 거부하면 15번째 거부권
전세사기·민주유공자법 거부권 확실시
대통령실은 여당이 거부권을 건의한다면 이를 존중하겠다는 입장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먼저 당의 입장을 청취해야 한다"며 "당에서 거부권 행사 건의가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고위 관계자도 "당의 의견이 중요하다"며 여당의 요구를 존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다만 대통령실은 여당이 쟁점법안 5건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공식 건의할 경우 5건 모두에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선별적으로 재의를 요구하는 방안 등을 두고 고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이 선별 재의를 고려하는 것은 잦은 거부권 행사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 때문으로 풀이된다. 윤 대통령은 이승만(45회)을 제외하고 역대 가장 많은 거부권(10회)을 행사했다. 이번에 5개 모두 행사한다면 15번째 거부권 행사가 된다. 매년 7회 이상 거부권을 행사한 셈이다. 거부권 남용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이승만·윤석열 두 사람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거부권을 행사한 노태우 전 대통령도 5년 임기 내내 7번 거부권을 행사했다.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 "행정독재"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이같은 비판에도 대통령실과 정부, 여당은 아랑곳하지 않은 모습이다. 특히 야당과 시민사회가 법안 통과에 공을 들인 전세사기 특별법과 민주유공자법에 대해선 거부권 행사가 유력시 된다. 이들 법안의 경우, 여당뿐만 아니라 주무부처 장관까지 나서서 거부권을 건의한 상태다. 이날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 통과 뒤,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이 2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긴급 브리핑을 연뒤, "특별법 개정안이 정부로 이송되면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법률안에 대한 재의요구안'을 제안할 것"이라고 말했고,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민주유공자법 통과 직후 입장문을 내고 거부권을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실과 정부, 여당이 거부권 행사를 시사한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은 실효성 없는 특별법을 보완하기 위해 '선 구제 후 회수' 방식으로 지원하는 내용을 담았다. 직접적인 현금 지원 없이는 피해자들이 빚을 내서 빚을 갚는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절박한 목소리를 반영한 법안이다. 개정안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관이 전세사기 피해 주택의 보증금 반환 채권을 매입해 피해 임차인을 우선 구제해주고, 추후 임대인에게 구상권을 청구해 비용을 보전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또 전세사기 피해자 요건 중 임차보증금 한도를 현행 3억원에서 5억원으로 상향 조정하고, 피해자 인정 범위에 외국인도 포함했다. 대통령실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22대 국회에서 야당이 법안을 재발의하더라도 수개월의 시간이 걸리는 만큼 피해자들은 오랜기간 사각지대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민주유공자법은 특별법이 있는 4·19와 5·18을 제외한 다른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도 유공자로 지정해 본인과 가족에게 혜택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독재자와 부패한 정치인들에 맞서다 죽거나 다친 민주화 운동가들을 위한 법안이다. 고령의 유가족들은 그간 삼보일배와 오체투지까지 하며 법안 통과를 촉구해왔다. 22대 국회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된 우원식 의원이 대표발의한 만큼 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새 국회에서 재추진될 전망이지만, 민주열사 가족들은 이미 오랜 투쟁으로 지쳐가고 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는 "4년간 법 제정 투쟁 과정 속에서 이한열 열사의 모친, 이석규 열사의 부친, 박종철 열사의 모친 등이 하나 둘씩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더 이상 열사의 유가족들은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외쳤다.
그러나 강정애 보훈부 장관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민주유공자를 가려낼 심사기준이 없어 부산 동의대 사건, 서울대 프락치 사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관련자 등 사회적 논란이 있어 국민적 존경과 예우의 대상이 되기에는 부적절한 인물들이 민주유공자로 인정될 수 있다"며 "행정부의 결정으로 정권 또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민주유공자 결정이 가능해 자유민주주의의 숭고한 가치가 훼손될 여지가 있다"고 했다. 법안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해 금고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된 사람은 법 적용 대상으로부터 배제된다는 조항(25조)를 담고 있지만, 강 장관은 "국보법 위반자도 유공자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어 국가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을 불러오게 될 것"며, 거부권을 건의하겠다고 했다.
한편 이날 국회 본회의에선 국민들의 관심이 높은 '채해병 특검법' 재의의 건이 상정됐으나, 총 투표수 294표 중 찬성 179표, 반대 111표, 무효 4표로 결국 부결됐다. 본회의장에서 표결을 지켜보던 해병대 예비역 연대 회원 등은 표결 직후 "국민의힘은 사과하라" "니들이 보수냐"며 거세게 항의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표결 직후, 기자들과 만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희생, 헌신하신 장병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수사 과정의 외압, 사건 조작의 의혹을 규명하자는 것에 대해서 왜 이렇게 극렬하게 반대하는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며 "채 해병 사망사건의 진상 규명을 해내고, 그에 더해서 정부와 여당이 왜 이렇게 극렬하게 진상규명을 방해하는지에 대해서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절대 포기 하지 않고 끝까지 (규명)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 해병대 예비역들 눈물·절규…"국힘은 보수 사칭 쓰레기" ☞관련 기사 : 이변 없는 '윤석열 방탄' 국힘…채해병 특검법 재의 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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