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A Few Good Men'과 채해병 특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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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변호사이기 때문인지, 혹은 변호사가 되려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트릭과 음모로 구성된 줄거리, 그리고 이를 풀어나가는 약간의 스릴과 모험이 있는 법정소설이나 영화를 특히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는데 초등학생 때였는지 중학생 때였는지 분명치 않으나 많지 않던 집안의 책 중에 우연히 '어머니는 명탐정'인가로 기억하는 제목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아들은 형사인데 정작 가사에 종사하는 엄마는 아들한테서 들은 몇 가지 얘기만으로도 중범죄를 척척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내어 아들에게 가르쳐 주는 에피소드를 엮은 책이었다. 중요 사건의 배경을 살펴보고 추리를 해서 문제를 해결해가는 장면 장면이 하도 재미있고 신기해서 내 맘 속에 추리본능을 마구 자극했던 모양이다.
어른이 되어서는 ‘어머니는 명탐정’ 읽은 기억을 가물가물 뒤로 한 채, 미국식 법제도(legal system)에 대한 상당한 회의를 저변에 깔고 무언가 암울한 진실을 찾아 헤매는 듯한 존 그리샴(John Grisham)의 소설에 심취하고 있다. 최근 나온 몇 개 빼고는 전부 다 읽을 정도로 즐겨 찾는다.
가장 인상이 깊었던 소설을 꼽으라면 ‘어머니는 명탐정’과 그리샴의 소설들이지만 영화는 단연 탐 크루즈와 데미 무어가 출연하는 ‘A Few Good Men’이다. ‘채 해병 사건’이 정국을 뒤흔드는 요즘에는 그 영화의 한 장면 장면이 또렷이 떠오를 정도다. 내 또래의 사람이면 아마 명절 영화로도 한두 번은 보았을 것인데 나는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아무래도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보았던 것 같다. 1995년, 1996년 무렵부터는 비디오플레이어가 대중화되고 곳곳에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이 생겨 영화를 집에서 자주 볼 때였으니까.
대략의 줄거리는 쿠바 관타나모 미 해군 기지 내 어느 해병이 집단적인 따돌림과 ‘코드 레드(code red)’라는 암묵적이고 비공식적인 구타와 얼차려를 받다가 사망하자 이를 지시한 사령관과 소대장은 사망 책임을 해병 2명에게 전가하고, 갓 법무관이 되어 해병 2명의 변호를 맡게 된 톰 크루즈가 사건의 실상을 밝히려고 분투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중위에 불과한 탐 크루즈가 증인으로 법정에 선 사령관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사령관의 격정과 자존심을 자극해 사령관이 코드 레드를 지시하였다는 실토를 받아내는 장면이다.
실제 일어난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졌다는 이 영화에서 해병대 사령관은 쿠바로부터 영구 임대받은 관타나모 내 기지를 지키는 일선의 사령관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차고 부하들에게 과하다 할 정도로 엄격한 자세를 요구하는 자이지만, 정작 자신의 지시로 부하 해병이 사망하자 그 책임을 피하기 위해 모든 일을 직접 구타행위를 저지른 일반 병사에게 떠넘기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주인공이라 할 만한 탐 크루즈는 처음에는 사건을 대충 뭉개려다 데미 무어의 설득과 압박을 받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일에 뛰어든다. 사병 두 명은 상부의 지시를 받았을 뿐 사건을 지시한 것도, 그 사건을 축소, 은폐한 것도 사령관이라는 것이 진실이다. 그리고 미국영화에서 거의 다 그렇듯 영화는 큰 틀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왜 이 영화를 지금 이 순간 소개하는지 알 만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미국에서 실제 일어났고,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한 사건이 지금 우리 눈 앞에서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귀신도 잡는다는 해병대라는 배경, 젊은 사병의 죽음, 그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사단장, 겉으로는 명예를 떠들면서도 사병의 죽음과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조금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 그리고 그 사단장 뒤를 봐주고 있는 권력자들…
사실 우리에게 벌어진 일은 영화보다 더 암담하고 상상 이상으로 리얼하다. 해병이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을 제공한 사단장이라는 자는 어떻게든 자신이 살기 위해 어떤 경로로든 최고 권력자에게 손을 뻗쳤을 것 같고, ‘공정과 상식’을 내걸고 대통령이라는 최고권력의 자리에 오른 자는 FM 그대로 행동하고 실천한 해병대 수사단장의 수사결과를 자신이 직접 나서 ‘격노의 지시’로 뒤집어 사건 이첩을 막으려 했고, 스스로 수사단장의 수사가 옳다고 결재까지 한 일국의 국방장관은 최고권력자의 격노에 끽소리 못하고 꼬리를 내리는가 하면, 국방부 검찰단과 주변의 내시들은 수사단장을 집단항명죄 수괴라는 어처구니 없는 죄로 올가미 씌우고 구속을 시키려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정작 법정에 서야 할 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활보하고, 국민이 준 권한을 자기 자리 지키기 위해 이용하고, 버젓이 녹봉을 받으며 제멋대로 살고 있는 반면,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다하여 부하 해병의 사망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고, 법에 따라 책임 있는 자를 경찰에 이첩하려던 수사단장은, 비록 급한대로 구속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그 집단에서 따돌림 당한 채 법정에 선 피고인 신세가 되었으니 영화보다 더 극적이라고 할 수밖에…
나는 이 활극같은 비극이 앞으로도 얼마간의 가슴조리는 장면을 연출하겠지만 여느 활극과 무협극, 추리극이 다 그렇듯 권선징악으로 매듭을 지으리라 확신한다.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지 말라(自心不欺)는 구절 하나 제대로 따르지 못하면서 죽은 귀신을 잡는다고 뻥을 치는 해병대의 저 졸렬하고 무책임한 장군들, 제 천성을 이기지 못한 채 제 맘대로 사건을 자르고 붙이던 예전 특수부 검사 시절 버릇 그대로 어린 해병의 죽음을 난도질한 대통령이라는 자, 그리고 그 주변에 간신과 내시처럼 붙어서 시키는 것이면 옳든 그르든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장관과 대통령실의 졸개들, 수많은 악인들이 자신들이 손에 쥔 권력으로 진실을 덮으려 하지만, 한 사람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그 죽음의 원인을 캐내려고 의연히 맞서는 한 명의 수사단장과 이를 지키려는 몇몇 선인들이 더 단단하게 뭉쳐 맞서면서 국민들의 마음 속 깊은 응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어떻게 절제하고 통제해야 할지 모르는 악인들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의 늪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 허우적대고 있는 형국이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A Few Good Men’이 있어 참 다행스럽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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