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 아현동~신수동 총연장 2076미터

지하수로 입구가 마포형무소 근처라는…

마포나루사단법인에서 펴낸 <강상대고활>(2012, 대표집필 남자영)이란 책을 보면 선통물천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아현동과 공덕동을 지나 마포로 흘러 한강으로 합류했던 개천의 명칭은 원래 선통물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물건이 먼저 통과하는 개천이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선통물천의 앞글자인 선 자는 먼저 선(先)자에서 어느새 착할 선(善)자로 바뀌었다. (중략)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지천 물길에 변화가 생겼다. 이 사업은 1923년부터 5개년 사업으로 진행되었는데 조선 건국 이래 최초의 인공하수터널이 뚫린 것도 이때였다. 선통물천 터널은 아현천이 공덕천으로 불리기 시작한 지점에서 시작되어 쌍룡산을 가로질러 뚫렸다. 이 터널을 통해 기존의 물길은 염리동 쪽으로 갈라져 흐르다가 대홍동과 신수동을 지나면서 봉원천 하류를 만나 서강대교 북단에 이르렀다.

현 아현3 재개발구역에서 숭문중고등학교 정문에 이르는 구간이 새롭게 만들어진 선통물천길이다. 이 구간은 대략 길이 620미터, 폭이 4미터 정도 되는 인공 하천이다. (중략)

1960년대 도시정비사업이 한창이던 마포구는 하수도 공사를 활발히 시행하면서 선통물천 일부 구간을 복개하였다. 복개된 자리에는 염리시장이 들어섰다. 1962년의 공사는 아현동 일대 고지 배수 구역의 빗물을 인공하수터널을 통해 대흥동으로 유도하여 직접 한강으로 방류함으로써 공덕동과 마포 저지대로 집수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현재 선통물천의 모든 물길은 복개되었고 지천을 따라 흐르던 물길은 하수 및 우수 통로로 사용되고 있다.’

뒤죽박죽 종잡을 수 없는 주장을 굳이 언급하는 까닭은 검증없이 기술한 내용들이 사실처럼 유통되어 진실을 오도하기에 바로잡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946년 마포지역 지도.

 

쌍룡산 지하수로 설계도.
쌍룡산 지하수로 설계도.

‘善通物’이란 표기는 윗글 필자가 언급한 쌍룡산 수로터널 입구 명석(名石)에 보인다. (쌍룡산 자락이 재개발되면서 터널이 매몰되고 이와 함께 명석도 지하에 묻히고, 현재 모조품만 근처에 세워져 있다.) 작은 글씨로 부서한 휘호필자는 현재 쪼아내 알 수 없으나 우가키 가즈시게(宇垣 一成)로 알려져 있는데, 후술하는 문서들을 보면 확실하다. 우가키는 1931년 6월 17일부터 1936년 8월 4일까지 5년에 걸쳐 제6대 조선총독을 지낸 인물이다. 이에 앞서 1927년 4월 4일부터 12월 10일까지 8개월간 총독 권한대행을 지낸 바 있다. 쌍룡산 터널입구의 善通物 표기는 우가키의 총독재임 기간에 새겨졌으며 이는 터널을 포함한 인공수로가 그의 재임기간에 완성되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

선통물 표기는 마산에서도 확인된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마을 연못의 아치형 배수구에 浩堂(호당)이라는 자가 쓴 것으로 호당은 제2대 조선총독을 지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호다. 하세가와의 재임기간은 1916년 10월 14일부터 1919년 8월 12일이다. ‘신마산’ 월영마을에는 국군마산병원의 전신인 일본군 병원이 있던 곳으로 1909년부터 일본 군사기지로 조성돼 군병원 외에 중포병대대가 해방 전까지 주둔했다. 마산 선통물은 일제가 군 주둔지를 조성하면서 정비한 물길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사례로 미루어 선통물은 강점기 대규모 토목사업 가운데 포함된 물길정비 결과로 만들어진 인공수로에 붙여진 이름 또는 휘호라고 추론할 수 있다. 강점기에 만들어져 쓰이기 시작한 일본식 조어라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타베이스에 통물, 또는 선통물이라는 키워드 검색에서 유효하게 추출되는 사례가 없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조선총독부는 ‘선통물천’은 왜, 어떻게 만들었을까. 다행히 국가기록원에 설계도면이 남아있어 이를 정확히 알 수 있다. ‘한강 개수 마포 방수 고지배수 공사’ 기록이 그것인데, 공사를 위해 사전에 작성한 설계도면 및 실제 준공도면이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 오랫동안 연구자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까닭은 해당 인공수로가 선통물, 또는 선통물천이란 명칭으로 인지되었을 뿐 왜, 어떻게 만들었는가에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지배수 1공구 설계도
고지배수 1공구 설계도
고지배수 2공구 설계도. 쌍룡산 터널수로에 해당한다.
고지배수 2공구 설계도. 쌍룡산 터널수로에 해당한다.
터널 입구쪽 개구부 도면. 
터널 입구쪽 개구부 도면. 

1939년(소화14년) 3월24일 작성된 ‘마포방수 고지배수로 공사 준공 조서’를 보면 전모가 잘 드러나 있다. 고지배수로는 아현정에서 신수정까지 총연장 2076미터에 이르며 공사비 34만3479원이 들었고, 1930년(소화 5년)부터 1938년(소화 13년)까지 9년에 걸친 공사였다. 공사기간은 우가키 총독의 재임기간과 거의 겹친다.

공사는 1공구, 2공구, 3공구로 나뉘어 진행됐다. 1공구는 현재 숭문중고등학교 앞에서부터 경의선을 가로질러 봉원천 합류지점에 이르는 1306미터의 개구부. 도랑은 폭 2.5~4미터, 깊이 1.5~4미터로 콘크리트로 시공하고 군데군데 다리를 놓았다. 2공구는 쌍룡산 지하수로에 해당하며 높이 4.15미터, 폭 3.3미터, 길이 620미터의 말굽형 터널과 터널 입출구 개구, 출구쪽 계단식 수로로 구성돼 있다. 3공구는 마포형무소를 에두른 인공수로다. 난공사에 해당하는 터널굴착은 비교적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되며 노지 쪽 공사는 일찍 종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기할 점은 ‘한강개수마포방수제1공구공사변경설계서 및 도면’에 포함된 지도. 이는 공사명이 이렇게 길게 붙여졌는지를 보여준다. 즉, 고지배수는 마포방수와 짝을 이룬다는 것. 고지배수로를 통해 아현천의 물을 한강 하류쪽으로 빼돌리고, 한강변 제방축조로써 강물의 유입을 막아 마포 일대의 침수를 막는 게 공사의 목적이다.

기공식 당시 신문기사(1930년 11월 26일 동아일보)와 설계도면을 종합하면 마포 방수는 경성부 원정 2정목을 기점으로 암근정 마포동 및 토정리를 경유하여 고양군 현석리에 이르는 총연장 2350미터의 둑을 쌓는 것으로 자연도로를 겸하도록 했다. 장래 전차궤도를 부설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제방높이는 대정 14년 대홍수의 최고 수위보다 1.5미터 여유를 두었다고 한다. 구용산 및 마포본류 연안에 총연장 300미터의 물양장(일종의 화물터미널)을 축조하고 마포동 둑 안에는 유수지를 만들었다.

조선총독부는 왜 이렇게 조선 최대의 지하수로를 만들면서까지 마포일대 수방공사를 했을까.

 

한강개수마포방수일반평면도.
한강개수마포방수일반평면도.
한강개수마포방수일반평면도 부분확대.
한강개수마포방수일반평면도 부분확대.

한강개수마포방수일반평면도를 확대해 보면 방수공사의 비밀이 엿보인다. 고지배수로와 마포방수제 사이에는 용산 주둔 일본군부대의 배후시설인 탄약고, 화력발전소, 이와 관련된 일본인들 집단거주지 청수정이 위치해 있다.  

설계도면 상 고지배수로의 입구를 마포형무소쪽, 출구쪽을 학교라고 표기한 데 주목한다. 마포 주민들을 수해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이지만 속내는 마포형무소와 수감자들이 노역하는 기와공장의 침수를 막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본다. 설계도에 첨부한 평면도를 보면 마포형무소 바로 위쪽에서 고지배수로를 굴착하고, 별도로 형무소를 ㄱ자로 감싸는 인공수로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을축년 대홍수가 난 1925년 7월 23일자 신문을 보면 큰물로 기와공장에서 40만 장의 기와가 유실되었다. 그 정도의 물적 피해가 났다면 형무소 수형자들이 꽤나 동요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강점기에 대대적으로 만든 형무소는 군경 주둔지와 더불어 조선인에 대한 억압적 통치의 근간이었음을 염두에 두면 마포 수방공사의 비밀이 풀린다. 신용산쪽, 즉 용산 군 주둔지 쪽의 욱천(만초천) 수방공사가 1920년대에 추진됐는데, 이는 일본제국이 조선에서 펼친 토목공사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선통물'은 인공수로의 일본식 명칭임이 확실하다. '무엇인가 잘 통하게 한다' '잘 통하게 하는 시설' 정도의 뜻으로 풀이된다. 일제가 조선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세운 통치 슬로건으로 맞춤하다.     

선물통천은 조선통독부가 조선을 통치하면서 주안점을 어디에 근간을 두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하지만 현재 인공수로는 모두 지하에 매몰됐다. 터널수로는 입출구 쪽에 모두 아파트를 지으면서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개구부 역시 모두 복개되어 도로로 쓰이고 있다. 경의선과의 교차지점에 물둠벙을 만들어 선통물천이라고 이름한 것은 무척 아쉽다.

 

을축년 대홍수 당시 경성부 수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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