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안전기본법 제정, 이태원특별법 재추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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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 루시드폴 <아직, 있다> 중
가수 루시드폴이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며 만든 추모곡 중 한 소절이다. 4·16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사흘 앞둔 13일 서울시청 앞 도로에서 열린 '4·16 기억문화제'에서 루시드폴 노래가 울려퍼지자, 그날이 떠오른 듯 시민들이 눈물을 훔쳤다. 4·16 기억문화제의 제목 '세월이 지나도 우리는 잊은 적 없다'처럼 개인과 공동체는 곳곳에 '세월'을 아로새겼다. 그렇지만 루시드폴이 노랫말로 희생자의 목소리를 대신 전한 것처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주라는, 약속 하나를 우리 사회는 지켰을까. '뒷일을 부탁한다'고 했던 세월호 의인 고 김관홍 잠수사의 유언을 지켰을까.
10년의 세월
단원고 학생 250명 등 승객 304명이 국가의 무능과 무책임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지 내일이면 꼭 10년이 되지만, 그날은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다. 전원 구조 속보와 오보, 구조도 하지 않고 먼저 탈출한 선장과 선원들, 선내 진입과 퇴선 조치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보는 해경, 재난구조 콘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할 정부의 부재 등 세월호 참사는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국가의 부재 속에서 배가 천천히 가라앉는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본 시민들의 분노는 들끓었지만, 진상 규명이나 책임자 처벌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수사를 맡은 검경 합동수사본부는 침몰의 직·간접 책임을 물어 38명을 기소했지만, 세월호 선장과 선원, 청해진해운 임직원, 운항관리자에만 집중됐고, 해경 지휘부는 모두 빠져나갔다. 책임자 처벌도 선장과 선원, 해운해사 임직원 등 민간에만 집중됐다. 해경 지휘부에선 당일 현장에 출동했던 '말단'인 해경 123정장만 징역 3년을 받았을 뿐이고, 윗선은 모두 책임을 회피했다. 시민들의 힘으로 끝내 국정농단을 했던 대통령에게 7시간 30분 부재의 책임을 물어 탄핵했지만,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정부에서도 제대로 된 진상 규명과 책임 묻기를 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구성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는 폐쇄회로(CC)TV를 복원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뒀지만 거기까지였다.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며 결론을 거칠게 미봉한 채 끝냈다. 기존 조사보고서에서 더 이상 나아가질 못했다. 청와대와 해경을 비롯한 주요 기관들이 참사 전후 어떤 조치를 취하거나 취하지 않았는지도 상당히 밝혀졌지만,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인지 대응 실패의 근본 이유는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다(4·16세월호참사 종합보고서 분석TF 자료집, 4·16연대). 아직도 유가족들이 "조사를 해도 제대로 된 조사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이유다.
사참위 권고도 극우 성향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실상 전혀 현실화하지 못하고 있다.사참위는 2022년 9월 활동을 종료하면서 △국가책임 인정과 사과 △중대재난조사위(가칭) 설립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을 포함한 12개 분야 권고를 했지만, 4·16연대 평가에 따르면 단 1개 분야(해양재난 수색구조 체계 개선)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는 미이행됐다. '추모 사업의 중단 없는 추진'을 권고했지만, 희생자 추모를 위한 '4·16 생명안전공원'은 지난해 착공해야 했음에도 기획재정부와 사업비 협의 과정에 발목이 잡혀 첫삽도 뜨지 못했다.
노란색과 보라색
아울러 세월호 이후, 재난안전법 개정을 통해 국무총리가 재난 발생 시 특별재난지역 선포에 관한 사항을 책임지고 재난 대응과 복구 총괄·조정은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맡는 등 일부 제도적 보완을 이뤄냈지만,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10·29이태원 참사를 보며 우리 사회는 제2, 제3의 세월호가 일어날 수 있다는 또다른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 유가족의 바람대로 세월호 전과 세월호 후는 달라야 한다고 굳게 믿었지만, 시민들의 최소한의 믿음도 깨졌다. 각자도생이라는 흉흉한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세월호 때처럼 이태원 참사에도 콘트롤 타워는 부재했고, 현장에 있어야 할 경찰은 없었다. 참사를 막겠다며 1조 5000억 원을 들인 재난안전통신망은 무용지물이었다. 대통령은 영정과 위패도 없는 분향소를 조문하고, 유가족은 만나지도 않았으며,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마저 거부했다. 경찰 특별수사본부 수사는 윗선에 대한 책임 규명은 없이 실무진만 처벌하는 꼬리자르기에 그쳤다. 참사 500일이 지났지만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무엇하나 제대로 이뤄진 게 없다. 과거보다 더 후퇴했다. 심지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윤희근 경찰청장 같은 책임자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서 이같은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법안이 생명안전기본법이었다. 생명안전기본법은 국가 시스템이 있어도 국민을 관리대상으로 보는 인식에선 참사 때마다 '진상 규명' '책임차 처벌'이라는 구호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반성에서 시작됐다. 2020년 11월 우원식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생명안전기본법은 모든 사람의 권리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를 명확히 하는 한편,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조사의 보장, 안전 관련 계획 등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그러나 법안은 여당 반대로 21대 국회 내내 계류됐고, 그러는 사이 159명의 젊은이가 이태원에서 또다시 별이 돼야만 했다. 유가족은 거리를 헤매야만 했다.
다행히 여소야대 22대 국회에서 제3의 세월호, 제2의 이태원을 막기 위한,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한 걸음은 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하루 앞둔 이날도 야당 의원과 당선인들이 앞장서서 이태원 특별법, 생명안전기본법 제정 재추진을 약속하고 나섰다. 다만 여기에서 그쳐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받는 한편, 봉인된 세월호 참사 관련 대통령 기록물을 공개할 수 있도록 길을 열고, 침몰 원인의 과학적 검증을 계속하기 위한 길도 열어줘야 한다. 중대재난에 관해 독립적으로 조사할 상설 조사기구(중대재난조사위원회) 설립도 추진해야 한다. 안전 가치를 제7공화국 헌법에 담아내려는 노력까지 나아가야 한다.
세월호의 노란색과 이태원의 보라색이 어우러졌던 지난 주말 4·16기억문화제에 참가한 세월호·이태원 유가족은 "안전할 권리 보장하고 생명안전기본법 제정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안전사회 건설을 다시 한번 다짐했다. 아이들과 함께 거리에 나온 시민들도 안전사회에 대한 바람은 마찬가지였다. 22대 국회에선 그들의 약속대로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최소한의 시작점을 반드시 마련해 루시드폴의 노랫말처럼 무너지지 않고 살아내주라는 '약속'을 다음 봄엔 지킬 수 있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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