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생명 볼모 잡고 갈등만 키우는 정부-의사
국민들만 피해…수술도 못하고 119도 안 받아
간호법도 거부해놓고 이제와서 …진정성도 의심
의사 숫자만 집착하고 공공의대 설립 등은 무시
야당 선제적으로 중재안 마련해 이슈 선점해야
이재명 “비상대책기구 만들어 협조 끌어내겠다”
정부와 대한의사협회(의협), 전공의(인턴, 레지던트)들이 의사정원 확대 문제를 두고 ‘강 대 강’ 대치를 하면서 국민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양측의 ‘치킨게임’(어느 한 쪽이 양보하지 않을 경우 양쪽이 파국으로 치닫는 게임)은 의대 정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 필수의료·지역의료 공백 문제는 논의에서 한참 뒤로 밀려있는 모습이다. 정부가 국민 여론과 총선을 의식해 강경 대응을 이어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면서, 국민의 생명과 건강은 뒤로 한 채 갈등만 키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국민들의 피해를 줄일 절충점을 찾고 의료 공공성을 강화할 야당의 역할이 강조된다.
보건복지부는 21일 오후 10시 기준 주요 100개 수련병원을 점검한 결과 소속 전공의의 74.4%인 9275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22일 밝혔다. 이들 100개 병원에는 전체 전공의 1만 3000여 명의 약 95%가 근무한다. 근무지 이탈자는 소속 전공의의 64.4%인 8024명으로, 하루 전보다 211명 늘었다. 그러나 정부의 대응은 강경 일변도다.
법무부, 행정안전부, 대검찰청, 경찰청은 전날 브리핑을 통해 업무개시명령에도 의료현장에 복귀하지 않고 집단행동을 주도하는 주동자 및 배후 세력에 대해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하고, 정상 진료나 진료 복귀를 방해하는 행위도 엄중히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정당한 사유 없이 수사기관 출석 요구에 계속 불응하는 경우 체포영장을 발부받는 등 강제수사한다는 방침도 세웠다. 병무청은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에 반발해 집단행동한 병역 미필 전공의들이 국외여행허가를 신청하면 보류하도록 지방청에 지시했다.
정부의 이러한 강경 대응은 국민 여론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갤럽이 지난 13~15일 전화조사원 인터뷰(CATI) 방식으로 전국 만 18세 이상 100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76%가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해 '긍정적인 점이 더 많다'고 답했으며, 16%만이 '부정적인 점이 더 많다'고 했다. 9%는 의견을 유보했다. 대부분의 응답자 특성에서 의대 증원에 긍정적이며, 여야 지지자 간에도 이견이 없었다(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과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정부도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 지지율 만회를 위해 강경책을 추가로 내놓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윤 대통령이 지난 20일 국무회의에서 “2000명 증원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확충 규모”라며 타협안에 선을 그은 것도 이같은 여론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 19~21일 만 18세 이상 남녀 1005명으로 대상 조사해 22일 발표한 대통령 국정운영 평가에 따르면 긍정평가는 38%로 지난주보다 1%올랐으며, 부정평가는 55%, 모름/무응답은 8%로 나타났다(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정치권에선 대통령 지지율 추이에 따라 정부가 대응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긍정 여론이 높아질 경우 강경 기조가 한동안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긍정 여론에 힘 입은 정부와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사들이 국민 생명을 볼모로 ‘치킨게임’을 하면서 애꿎은 국민들의 피해만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한 첫날 서울 ‘빅5’ 대형병원에선 외래 및 응급실 대기시간이 길어지면서 환자와 가족들이 피해를 입었다. 수술이 급하지 않은 입원 환자들은 퇴원·전원 조치됐으며, 중증환자들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수술실 가동률도 절반 밑으로 떨어지고, 암이 전이된 환자의 수술이 취소되는 등 의료공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수술 뒤 반강제로 퇴원조치된 사례도 확인됐으며, 시급한 신생아 치료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119 구급대의 응급환자 병원 이송도 병원들이 환자를 거부하고 있어 차질을 빚고 있다.
의사들의 집단행동도 명분이 부족하지만, 정부의 진정성이나 의도 역시 의심스러운 면이 많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5월 보건의료 인력의 기득권인 의사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해 간호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간호법은 우리 사회의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의료 서비스 확대와 간호사 처우 개선 등을 위한 법안이었다. 특히 의사만큼이나 간호사 부족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대한간호협회(간협)의 ‘병원간호사회, 병원간호인력 배치현황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1년 신규 간호사 중 1년 이내 사직한 비율은 52.8%에 이른다. 사직 비율은 2014년 28.7%에서 2016년 35.3%, 2018년 42.7%, 2020년 47.4%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의사들은 간호법을 제정하면 간호사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빼앗을 수 있다고 주장했고, 윤 대통령은 “간호 업무의 탈 의료기관화는 국민들의 건강에 대한 불안감을 초래하고 있다”며 의사들의 손을 들어줬다. 심지어 윤 대통령은 대선후보 당시 간호법 개정을 약속하기까지 했지만, 자신의 약속을 손바닥 뒤집는 듯 뒤집어 2년여의 법 개정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국민 일반의 보건의료에 혜택이 돌아가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던 정부가 이제와서 의대 정원 확대를 밀어붙이는 이유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번 의대 정원 확대도 숫자 자체에만 집중하면서 응급실, 중환자실, 소아과, 산부인과 등 의사 부족 문제와 공공병원 및 지방의료 문제는 뒤로 밀려나 있는 모습이다. 지난 1일 정부는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를 내놨지만, 만성적인 의료 취약지 문제 해결을 위한 공공의대 확대나 지역의사제 도입 등은 빠져 있어 필수·지역 의료 생태계 회복과는 거리가 먼 ‘졸속’이란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당근책’으로 수가(의료행위 대가) 인상을 거론하고 있지만, 정부가 적정 선에서 타협할 경우 수가만 늘어나고 그만큼 국민 부담만 커질 수 있다. 수가 인상이 수익 위주의 민간 의료 중심 체제에선 대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흉부외과, 산부인과 등 기피 분야에 대한 수가 인상이 이뤄졌지만 의료 쏠림현상은 해소되지 않았다.
의료 문제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지만, 정부가 그동안 각종 현안에서 타협없이 일방 통행했던 것처럼 의사와 대치를 이어가면서 의료대란 장기화는 현실이 되는 모습이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야당의 역할론이 커지고 있다.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적정한 의사 수를 늘리는 쪽으로 협의하고 공공·지역 의료를 확충하는 방향으로 안을 만들겠다는 복안이다. 홍익표 원내대표는 지난 18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의대정원 확대에 “원칙적으로 찬성한다”면서도 “단순히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다. 숫자가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며 “필수 공공 지역의료 기반 확충을 위한 공공의대와 지역의대 설립, 지역 의사제 도입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명 대표도 지난 19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 정부에서 10년간 연간 400명 정도를 증원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 여당의 반응이 어땠는지 생각이 된다. 그런데 무려 그 400명의 5배가 되는 연간 2000명을 지금 당장 증원을 하면 지금 현재 의대들이 수용할 수 있는가. 저는 불가능하다고 본다”며 “의사 수를 늘리는 일은 단순히 덧셈하는 산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이어 “정원 확대 목적을 분명하게 하고, 그것이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산하고, 타협하고, 협의하고, 조정해야 되는 국정 과제이고, 고차방정식”이라며 “공공의료·필수의료·지역의료 확충을 위해서 정원 확대가 필요하지만, 그 내용 역시도 공공의대 설립, 또 지역의대 설립·지역의사제 도입 같은 그런 중요한 콘텐츠들이 있어야 한다. 총선용 포퓰리즘·정략이 아니고 국민을 살리는 실현 가능한 정책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에서 심각한 의사 정원 증가 문제로 인한 사회적 갈등·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비상대책기구를 만들어서 의사협회 측과 협의하고 정부·여당과도 협조를 끌어내겠다”며 “과격한 방식이 아니라 합리적인 방식으로, 점진적으로 적정한 수의 의사 수를 늘리는 쪽으로 협의하고, 그 내용조차도 공공·지역의료를 확충하는 방식으로 가능한 안을 만들어내겠다”고 강조했다.
다만 정부와 의사가 ‘말 대 말’을 넘어 ‘행동 대 행동’ 강 대 강 대치를 이어가고 있고 대통령이 집권 이후 야당과 사실상 협치를 거부하고 있어 민주당이 현실적으로 중재할 경로가 마땅치 않아 보인다. 그런만큼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 합리적인 중재안을 마련해서 선제적으로 제시하고 제1야당으로서의 존재감을 높여야 할 필요성이 있지만, 정부·여당이 이를 수용할지도 미지수다. 대통령의 사당이 된 여당은 정부의 입장을 되풀이할 뿐이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이날 여의도 중앙당사 출근길에 기자들이 ‘정부와 의료계의 강 대 강 대치 상황에서 당이 중재할 역할이 없는지’를 묻자 “환자 곁을 떠나 의사들이 집단행동을 하는 것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며 정부의 강경 대응을 지지한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코로나19 유행 당시 문재인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신설을 반대했지만, 한 위원장은 유체이탈한 듯 “(의대는) 20여년간 한 명도 증원하지 못했다”며 “(집단행동은) 단호하게 국민의 이름으로 막아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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