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칵 솟은 눈물을 닦고 40년후배가 쓴 스포일러

 

며칠 전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푸른역사)을 다 읽고 나서 소감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많이 망설였다. 김수경(金壽卿, 1918~2000)이 한국(남한 또는 북한이 아니라 한반도 단위의 코리아)의 언어학 또는 국어학 연구사에 반드시 그 이름이 기록되어야 할 인물이니 그의 평전은 당연히 서평이 나올 만하고, 일독을 권유하는 소식도 입소문에 올라타 꽤 확산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같은 문외한이 독후감을 쓰건 말건, 그것은 관심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무명거사라고 고민이 없을 리 없었다. 나의 고민은, 사적인 소감을 솔직하게 쓰면 이 신간의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고 왈칵 솟는 눈물에 한동안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던 몇몇 대목들을 언급하지 않고 글을 쓰는 건 왠지 김빠진 맥주, 앙꼬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그런 글이 과연 글값을 할 수 있을지...

그런 고민 끝에 일단 손끝이 가는 대로 몇 자 써보기로 했다. 어떤 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사실 그런 점은 이 책의 주인공 김수경의 삶도 일견 비슷했다. 김수경 자신이 중학교와 대학 시절, 모범생에 탁월한 외국어 학습능력을 가진 학생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목표를 내세우며 돌진하는 이념형 인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해방 직후 좌익 계열의 연구자 단체에 들어가 활동한 것이 그러했고, 해방공간에서 월북한 것이나 한국전쟁 때 해방구에 파견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북으로 귀환한 것 등도 모두 그랬다. 일정한 흐름 속에 있기는 했으되 최일선에서 그 흐름을 주도한다든가, 무엇인가를 꼭 이루기 위해 운동선상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따라 활동하는 적극적인 삶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러면 그는 어떤 유형의 사람이었나? 경성제대 예과 시절 학우회보에 쓴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어쨌든 우리는 행하기에 앞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 나가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먼저 필요한 것은 자기의 확립이고, 이 달성을 위하여 일반적 교양 확립에 힘쓰는 것은 가장 타당한 방법이 아닐까.” 대단히 근사하게 들리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가 적어도 대학 시절에 행동형의 인간은 아니었음을 단박 알 수 있다. 내적인 성찰과 수신에 힘쓰고, 사회적 자아보다 인문적 자기 확립에 더 큰 관심을 두며, ‘지금 여기’보다는 ‘내일의 목표’를 지향하는 단정한 청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어쩌면 청년기의 우리 모습은 대개가 투사형보다는 이런 유형에 훨씬 가까운/가까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군산중학교 시절 1933년 3월 4일 촬영한 군산중학교 송별 기념사진이다. 당시 군산중학교는 전북에서 하나뿐인 중학교였다. 제일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수경이다. 군산중학교 졸업 후 김수경은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했다. ⓒ 김혜영
군산중학교 시절 1933년 3월 4일 촬영한 군산중학교 송별 기념사진이다. 당시 군산중학교는 전북에서 하나뿐인 중학교였다. 제일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수경이다. 군산중학교 졸업 후 김수경은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했다. ⓒ 김혜영

그렇게 김수경은 한두 살 위의 동급생들 속에서 경성제대 예과 3년을 마친 뒤 법문학부로 진학해 철학과를 선택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필생의 목표로 언어학을 선택했다. 당시 경성제대에는 언어학을 전공한 교수는 한 사람 있었지만 그 분야의 강좌는 전혀 개설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철학과 시절, 미래의 전공을 위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의 외국어 공부와 논리적 훈련에 집중했다. 한국어의 성격을 일반언어학의 토대 위에서 규명하려는 원대한 꿈이 그를 이런 길로 이끌었을 것이다. 졸업논문은 헤겔철학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여기서 사족을 조금 단다. 나는 김수경보다 40여 년 늦게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해서 공부했다. 내가 갖고 있는 2002년판 <동문명부>를 찾아보았다. 1940년 제12회 졸업생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가웠다. 그런데 송구스럽게도 그의 이름은 한자로 ‘金壽鄕’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벼슬 경(卿)’이 비슷한 모양의 ‘시골 향(鄕)’으로 잘못 읽힌 결과라고 추측됐다. 최근 명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월북자에 대해 누가 관심이나 두었겠는가? 그저 비슷한 이름으로 흔적이나마 남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지...

한 가지 더. 그해 졸업생은 김수경을 포함해 모두 3명이었다. ‘김홍길’과 ‘정해진’이 더 있었다. 이번 김수경의 평전에 그들의 활동상이 조금 포함되어 있다. 이들 셋은 모두 월북자였다. 그중 전남 보성 출신의 정해진은 나중에 공작원으로 남파되는 바람에 일가족이 말 그대로 풍비박산 나는 비극에 휩싸였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들 세 명은 졸업생 명부에 이름 외에 아무런 표기가 없었다. 하다못해 ‘별세’라는 기록도 없었다. 하긴, 월북 후 무슨 일을 하고 살았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마당에 무엇을 적을 수 있었을까? 거기 ‘남파’라고 쓸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그러고 보니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철학과 출신들 중 절반 이상의 ‘직장 및 주소’ 난이 휑뎅그레하게 비어 있었다. 모두 김수경이나 정해진과 비슷한 처지였을까? 말하자면 나의 40~50년 선배인 이들 이름 뒤의 빈칸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며 아프게 눈을 찔러 왔다. 참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 빈칸은 언제쯤 채워질 수 있을까? 그 빈 자리를 채우는 날이 우리의 아픔도 치유할 수 있는 날이 아닐까?

김수경은 북으로 갔지만 거기서 최소한 남파와 같은 험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실력과 국어학자인 김두봉의 병풍이 크게 작용해 탄탄대로를 걸었다. 김일성대학의 정식 교수가 된 것은 물론이고, 과학원의 언어학연구실 책임자 등의 역할을 맡았고, 각종 한국어문 문법서와 훈민정음에 대한 연구, 정서법의 개혁, 새로운 문자체계의 구상 등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1950~60년대 북한에서 발간된 모든 한국어 규범 및 연구서에는 그의 이름이 빠지는 법이 없었다. 그는 실제 상당수 작업의 실무 책임자이기도 했다. 그런 흐름은 1956년 이른바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와 소련파가 대거 실각하고 숙청되면서 김두봉도 사라졌지만 본래 당파색이 없던 김수경은 그 이후 적어도 1968년까지는 활발하게 연구 및 실무 작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뒤 20년 정도 공백기가 있지만 말년에 다시 복권돼 연구를 이어갔다. 그만 하면 전체주의 사회에서 행복한 케이스였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그의 연구 및 한국어 규범작업의 내용은 평전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른바 ‘대위법적 구성’이라는, 이타가키 류타 선생이 취한 독특한 기술방식이 그 수단이었다. 김수경의 개인사, 특히 한국어 연구작업을 대체적으로 시대순으로 기술해 나가는 가운데 그 사이사이에 별도의 챕터로 학설사(그 연구작업의 구체적인 내용)를 소개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구성은 대단히 유용하고 적실하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 비슷하다고 해야 할지, 두세 가닥의 볏짚으로 새끼줄 꼬는 작업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지... 다만, 한쪽 새끼줄에 해당하는 문법 등의 구체적인 내용을 뛰어 넘어가면서 읽어도 김수경의 삶의 전체상을 파악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큰 장점이 거기에 있었다. 절반만 읽어도 된다!

우리는 북한 지역의 어문규칙에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이 평전을 통해서다. 나는 한국어 교육을 받는 초등학교~대학교의 16년 동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어느 책을 통해서도 나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한국어로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신문기자였으면서도 내가 게을렀기 때문일까? 이 책은 그것을 남한의 ‘표음주의’와 북한의 ‘형태주의’의 대립구조로 아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어느 쪽이 맞는지(혹은 유용한지)는 별개의 문제이고, 아주 명료하게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평소에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 사람들은 서로 대화가 가능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전혀 표준화된 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고 자기 고향을 벗어나 본 적도 없는 함경도 할머니와 전라도 할머니가 장터에서 처음 만나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대화할 수 있었겠느냐는 얘기다. 스페인 사람과 포르투갈 사람이, 핀란드 사람과 에스토니아 사람이 어렵지 않게 대화할 수 있듯이 우리도 적당한 수준에서 의사소통할 수 있었으리라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다. 그러면 영화 <황산벌>에서처럼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백제의 의자왕,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만나 정상회담을 한다면 통역이 필요했을까, 아니면 필요 없었을까? 나는 이런 것이 정말 궁금했다.

그런데 이 평전에 따르면 김수경은 1989년에 <세나라 시기의 언어력사>라는 논문을 통해 이 문제를 짚었다고 한다. 그 제목 자체가 ‘3국시대’의 순우리말 표현 아닌가? 그 논문은 국내에서도 출간된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곧 구해서 읽어보고 싶다.

이 책의 미덕은 외국인이 쓴 한국어 연구사이다 보니 오히려 그런 기본적인 질문들에 충실하다는 점에 있다. 위와 같은 아주 상식적인 질문들에 대한 설명이 그러하다. 한국어 문법의 기본적인 용어만 알면 이 평전의 학설사 부분(말하자면, 교직하는 두 가닥의 새끼줄 가운데 다소 까다로운 한 가닥)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읽어 내려가면서 평소 개인적으로 가졌던 의문을 해소하는 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김수경의 행로는 가족과 묘하게 엇갈렸다. 한국전쟁 시기에 전라남도 진도의 해방구에 교육사업을 위해 내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걸어서 평양으로 귀환했지만, 부인과 자식들은 그가 남쪽에서 낙오한 것으로 생각하고 오히려 월남하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는 수십 년의 이산이었다. 그 사이에 김수경은 재혼해서 별도의 자식들을 두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필설로 다하기 어렵다. 우연히 남편 김수경이 북한으로 돌아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쪽의 부인이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호적에서 남편의 ‘실종’을 ‘사망’으로 고치는 이야기라든가 어떤 방식으로든 재회를 위해 남쪽의 가족들이 캐나다로 가 그 나라 국적을 취득하는 이야기, 캐나다의 둘째 딸이 우연히(그것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이 평전의 저자 이타가키 선생을 만나는 이야기, 그 딸이 결국 평양을 방문해 김수경을 만나 그가 아내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받는 이야기, 그렇지만 아내가 남편을 만나기를 거부하는 이야기 등은 모든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선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애써 갖는 ‘희망’과 인간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갖는 ‘한계’가 교차하는 이야기들이다. 이보다 더 절실하기도 힘들다. 그 교차점에 ‘운명’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덮으며 한동안 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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