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법 거부권' 하루 앞, 유족들 마지막 절규
20분이면 걸어갈 거리인데…꼬박 2시간 걸려
유가족 "남아있는 마지막 희망을 앗아가지 말라"
종교계 "인면수심…거부권 행사한 자 거부할 것"
10·29 이태원 참사가 있었던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부터 대통령실 앞까지 약 1.6㎞, 성인이 빠른 걸음으로 20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2시간 동안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오체투지(두 무릎을 땅에 꿇고, 두 팔을 땅에 댄 다음 이마가 땅에 닿도록 하는 절)하며 행진했다.
유가족들이 또다시 추운 날씨에 오체투지에 나선 이유는 윤석열 대통령이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안'(이태원 특별법)에 대한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할 것이라는 소식 때문이다. 정치권에선 윤 대통령이 오는 30일 국무회의에서 거부권 행사를 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온몸으로 거부권을 막기 위해 나선 것이다.
29일 오후 1시 59분 오체투지에 나선 이태원 유가족과 시민, 4대 종교(개신교·불교·천주교·원불교) 종교인들은 "마지막 유가족들의 절규와 호소에 정부가 부디 특별법 공포로 응답해 주기를 기원한다"면서, 다시 한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참사가 벌어졌던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섰다. 이들의 호소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이정민 운영위원장(고 이주영 씨 아버지)은 오체투지 행진을 앞두고 가진 약식 기자회견에서 "오호통재라, 분하고도 원통한 영혼들이여!"라며 희생자들의 넋을 불렀다. 이어 "보고싶은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고 먼 하늘의 별이 될 수밖에 없었던 외롭고 서글픈 159개의 청춘의 별들이여…미안하고 또, 미안하구나"라고 외쳤다.
그러면서 "보고싶어도 볼 수 없는 이 참담한 현실에, 찢어지도록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통곡하며, 또 통곡한다"며 "이제 약속하건대, 너희들을 품에 안은 우리는, 진실을 은폐하고 덮으려는 그 어떤 세력과도 당당히 맞서 싸울 것이며, 기필코 우리에게서 너희를 뺏어가버린 그 간악한 자들을 응징하고 가슴깊이 맺힌 한을 풀고 너희들의 눈물을 닦아주려 한다"고 했다.
아울러 이 운영위원장은 윤 대통령에게도 다시 한번 호소했다. 그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희망을 앗아가지 말라"며 "괴로움에 미쳐버릴것 같은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외면하지 말고 귀를 기울여달라"고 했다. "우리 가슴에 두 번씩 못 질하는 비정한 짓은 하지말아 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재차 "특별법을 공포하라"면서 "그것만이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159개의 별들과 하루아침에 이들을 잃고 매일매일을 고통 속에 방황하는 가족들의 아픔을 해소해주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에게) 이런 절실한 마음에 다른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음을 정확하게 알려드린다"며 "제발 오판하지 말길 당부드린다"고 했다.
유가족들은 호소문 낭독을 통해 "10.29 이태원 참사 특별법 공포 여부를 결정하는 국무회의를 하루 앞두고 있다"며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정부에 특별법 공포를 촉구하기 위해, 159명의 희생자들이 눕혀져 있던 이 차디찬 아스팔트에 두 무릎과 두 팔꿈치 그리고 이마를 찧으며 '오체투지'로 이곳 이태원 참사현장에서 대통령실 앞까지 행진한다"고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이어 "국무회의가 임박한 가운데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하고 유가족들에 대한 지원책을 발표할 것이라는 언론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면서 "유가족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태원 참사의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다시는 이런 참사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도록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공포하는 것만이 유가족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지원책"이라고 했다.
이들은 "다시 한 번 강조한다. 159명 희생자들의 유가족이 바라는 것은 10·29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의 공포와 진실규명뿐이다. 특별법 공포로 진상규명을 위한 첫 걸음을 떼는 것 말고 우리가 바라는 것은 없다"면서 "그날의 진실 규명만이 유가족들을 위하는 일이고 살리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오체투지에 함께 나선 종교인들도 특별법 공포를 한 목소리로 외쳤다.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실천위원 시경 스님은 "윤 대통령은 부인인 김건희 여사의 과오와 허물에 대해 언론과 사람들의 지적은 못 참으시고 화를 낸다. 심지어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도 그만두라고 한다"면서 "사랑하는 자식을 억울하게 잃은 부모의 마음은 어찌 이리도 외면하느냐"고 했다.
시경 스님은 "부처님께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울부짖으며 찾아오시자 '고통 중에 자식을 잃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고 말씀하셨다"면서 "어머니의 고통이고, 눈물은 곧 국민들의 고통이고 슬픔"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아픔을 외면하지 말고 거부권을 행사하지 말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린다.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말길 간곡히 요청드린다"고 했다.
성가소비녀회 정대철 수녀는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세상은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고자 하니까 너무 가슴이 아픈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보듬고 안아줄 수 있는 제도적인 사회가 제대로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며 "여러분들도 마음을 모아서 정말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원불교 시민사회 네트워크 강현욱 교무는 "사람의 얼굴을 가졌으나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들을 인면수심이라고 한다. 지난 2022년 10월 29일 이 자리에서 있었던 참사 이후 정부와 여당에서 그런 사람들을 너무도, 너무도, 너무도 많이 봤다"며 "오늘 우리는 그들의 마음 안에 부디 단 한 조각 사람의 마음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예수살기 촛불교회 최헌국 목사는 "진상규명과 거기에 따르는 책임자 처벌을 해달라며 유가족들은 정말 너무나 힘들게 단식과 오체투지, 삼보일배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그래서 어렵게 이태원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런데 그 같은 국민들의 바라는 일들 앞에 대통령은 거부권을 운운하고 있다"며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가. 세월호 참사 때도 특별법에 대해서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외쳤다.
최 목사는 "(정부는) 유가족들이 무슨 보상을 바라는 양 피해자 지원 보상 이런 얘기만 하고 있다. 가족들은 결코 그것을 원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진상규명을 통해서 책임자 처벌을 통해서 다시는 내 자식과 같은 이런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들이 우리 사회 앞에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만약 우리의 이 간절한 행동 앞에서도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유가족과 종교인들은 거부권을 행한 자를 거부하는 행동에 돌입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가족 70여 명, 시민사회 및 종교계 인사 30여 명 등 100여 명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이태원 참사가 있었던 골목에서 묵념을 한 뒤, 오후 2시 26분부터 오체투지 행진에 나섰다. 유가족들은 방진복을 입고 무릎 보호대를 차고 빨간 목장갑을 낀 채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 두 무릎을 꿇은 뒤, 배를 깔고 두 손과 다리를 펴서 이마를 땅에 닿으며 절을 했다.
유가족들은 세 걸음마다 한 번 절을 하다가 집회 시간에 맞춰 다섯 걸음에 한 번, 일곱 걸음에 한 번 절을 했지만 속도는 더뎠다. 이태원역에서 약 200m, 성인 걸음으로 3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행진하는 데 15분 걸렸다. 유가족의 얼굴엔 땀과 눈물이 함께 흘렀다. 버스에 타고 있거나 길을 걸어가던 시민들도 추운 날씨에 오체투지를 하는 유가족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유가족들은 지난해 11월 29일 특별법이 국회에 자동 부의된 이후 2개월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몸을 혹사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유가족들은 영하 10도를 밑도는 혹한에도 국회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며 연내 특별법 국회 통과를 요구했고, 이같은 노력에 해를 넘긴 지난 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러나 국민의힘이 지난 18일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하면서 다시 유가족들이 거리에 나오게 됐다. 특별법이 국회에서 정부로 이송되기도 전이었다. 유가족들은 거부권 행사 요구에 맞서 대통령실 앞에서 삭발을 하고 혈서를 쓴 데 이어, 영하의 날씨에 밤을 새우며 1만 5900배 절까지 했다.
하지만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25일 유가족들이 "10분만이라도 만나달라"고 면담을 요청했지만,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고 있다. 유가족들은 참사가 일어난 뒤 수차례 면담을 요구했지만, 윤 대통령은 단 한 차례 반응도 보이지 않고 묵살하고 있다.
유가족은 오체투지를 시작한 지 2시간 뒤인 오후 4시 26분쯤 대통령실 앞에 도착했다. 오체투지를 한 거리는 약 1.6㎞, 도보로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온몸으로 기어 2시간 만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대통령실 앞 삼거리에 울타리(질서유지선)를 치고 유가족들이 대통령실로 갈 수 없도록 막았다.
유가족들은 대통령실 맞은 편 전쟁기념관 앞에서 대통령 집무실 방향으로 돌아서서 "윤석열 대통령님! 윤석열 대통령님!,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즉각 공포하십시오! 유가족들과 시민들의 염원입니다! 특별법을 공포하라!"라고 소리높여 외쳤다. 법이 허락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이어 유가족은 전쟁기념관 앞 울타리와 가로등 기둥 등에 대통령이 볼 수 있도록 손팻말을 붙인 뒤, 대통령실을 향해 한 차례 더 함성을 외치고 해산했다. 유가족들이 붙인 손팻말엔 "거부한자가 범인이다" "거부권을 거부한다" "거부권은 국민에 대한 거부다"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날 정치권에서도 이태원 특별법 거부권 전망이 나오자 피도 눈물도 없는 정권'이라고 비판하며 특별법 수용을 촉구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정권"이라며 "대통령 눈에는 칼바람 속에서 1만 5900배를 하면서 온몸으로 호소하던 유족들의 절규와 눈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냐"고 비판했다. 이어 "민심을 거역하며 또다시 거부권을 남용한다면 국민은 더는 분노와 좌절에 멈춰있지 않을 것"이라며 "온전한 진상규명으로 국가 책임을 바로 세워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찬대 최고위원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마저 정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분열의 정치, 증오의 정치를 악화시키는 일"이라며 "이태원 특별법을 거부하지 말고 대통령과 정부에 주어진 책임과 역할을 망각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군주민수(君舟民水·임금은 배, 백성은 강물이라는 뜻)다. 국민의 뜻을 거역하는 정권은 결국 국민으로부터 심판받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송두환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지난해 11월 '유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 위원회'(자유권위원회)가 대한민국의 자유권규약 이행 제5차 국가보고서 최종 견해를 채택할 때 이태원 참사를 조사하고 진실을 규명할 독립적인 기구 설립을 권고한 것을 언급했다.
송 위원장은 "우리나라는 유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가입한 당사국으로서 유엔 자유권위원회의 최종견해 이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국제인권사회는 이태원 참사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 권리 보호에 관한 우리 정부의 이행 노력에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회적 참사의 적절한 진상규명 과정은 그 자체로 유가족 등 피해자들의 참사 아픔을 딛고 일상으로 회복하도록 돕는 의미가 있다"며 "특별법이 조속히 공포돼 독립적인 조사기구에 의한 참사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이 진행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내일 국무회의에서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취임 1년 8개월 만에 9번째 거부권을 행사하게 된다. 윤 대통령은 김건희 특검법 등 그동안 여야가 대립하는 법안에 대해 8번의 거부권을 행사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역대 최고 기록이다.
이전까지 역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기록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7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 6건, 박근혜 전 대통령 2건, 이명박 전 대통령 1건 순이었다. 김영삼·김대중·문재인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단 한 차례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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