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과 언론 ②] 대량 해고 뒤의 충성 경쟁
신군부, 편집국 들이닥쳐 '제작 거부' 기자들 연행
무더기 해고 대학살극, 박정희 때 기록 갈아치워
'창작과비평' '씨알의소리' '뿌리깊은나무' 등 폐간
자리 지킨 기자들, 상상 초월 전두환 우상화 쏟아내
"청렴결백" "숨은 별" "수도승" "12‧12는 바른 길"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진실 보도는커녕 검열 지침에 따라 계엄군에 저항하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묘사하도록 강요받았던 기자들 중 상당수는 이럴 바에야 차라리 신문과 방송 제작을 거부하는 것이 기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5월 21일부터 언론계에 제작 거부 운동이 벌어졌다. 가장 적극적이던 경향신문에서는 평기자 대부분이 제작 거부에 동참했다. 그러나 소수 간부들에 의해 신문이 변칙적으로 제작됨으로써 발행 중단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차장급 이상 간부들만으로 신문과 방송이 계속 만들어져 광주의 진실은 한층 더 왜곡됐고, 제작 거부를 주도한 기자들은 대량 해직 사태를 당하게 된다. 이후 '살아남은 기자'들이 보도를 주도해 나가면서 언론은 본격적으로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게 된다.
박정희 때 기록을 갈아치운 전두환의 언론인 대학살
전두환 신군부는 실질적으로 권력을 움켜쥐자 단순한 검열 통제에 그치지 않고 민주화 성향이 있는 언론인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향으로 언론을 재편성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신군부는 언론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되었는데, 여기엔 1980년 6월 국보위 문공분과위 언론과가 작성한 '언론계 부조리 유형 및 실태'라는 문서가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언론사 사주들 행태를 조사해보니 썩을 대로 썩어 있어 다루기가 아주 쉽겠다는 것이었다. 신군부는 그런 부패한 사주들의 약점을 악용해 언론계에서 말 안 듣는 기자들을 솎아내겠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됐다.
5·18 광주항쟁 기간 제작 거부를 했던 기자들에게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불길하게 퍼져있던 가운데, 신군부는 마침내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을 1차 타깃으로 삼았다. 1980년 6월 9일 오전 9시 30분쯤 합수부 수사관 서너 명이 경향신문 편집국으로 들이닥쳐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자 여러 명을 연행해 갔다. 수사관이 편집국에 들어와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자들을 연행한 것은 박정희 유신 독재 아래서도 없던 폭거였다. 문화방송 보도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합수부는 해당 기자들이 제작 거부를 하면서 "베트남은 망한 것이 아니라 통일되었다" 느니 "고려연방제는 통일의 밑거름이다" 등의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시켜 국론 통일과 국민적 단합을 저해한 혐의가 농후해 부득이 8명의 현역 언론인을 연행, 구속했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런 내용의 기사는 그날 석간신문 1면에 일제히 보도됐다. 합수부는 이들 기자 중 김대중을 지지하는 사내 세력을 선동해 검열 거부 운동을 사주한 경우도 있었다며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과 연계시키기도 했다. 모두 날조된 것이었다. 합수부는 제작 거부를 주도한 기자들을 족집게처럼 정확하게 집어냈는데, 이는 경영진 등 언론사 내부에서 밀고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경향신문 서동구‧이경일‧홍수원‧박우정‧박성득‧표완수, 문화방송 노성대‧오효진 등 8명의 구속은 1980년 8월 언론인 대학살극을 여는 서막이었다.
언론인 대량 해직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준위 이상재가 보도 검열단에 가담해 만든 언론대책반이 '언론계 자체 정화계획'을 작성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두환은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 전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해직 대상은 "언론계의 반체제 인사, 용공 또는 불순한 자,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동조한 자, 편집 제작 및 검열 주동 또는 동조자, 부조리 및 부정 축재한 자, 특정 정치인과 유착되어 국민을 오도한 자" 등이었다.
이 기준에 따라 7월 초 이상재는 각 언론사에 파견된 보안사,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요원들로부터 넘겨받은 검열 거부자, 제작 거부자, 포고령 위반자 등을 취합하고 명단을 작성해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에게 보고했다. 이에 따라 7월 29일과 7월 31일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가 각각 '언론 자율정화 및 언론인 자질 향상에 관한 결의문'을 발표한다. 군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언론인 숙정을 추진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그 결의문이 나오자마자 신군부는 7월 31일 '사회불안 조성' '계급의식 조장' '음란 저속' 등의 이유로 정기간행물 172종을 폐간했다. 여기엔 <기자협회보>,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씨알의 소리>, <뿌리 깊은 나무> 등 당대 지식인과 학생들의 사랑을 받으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정론성 잡지들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언론인 강제 해직은 8월 2일 중앙매스컴(중앙일보·월간중앙·동양방송 등)에서 시작됐다. 중앙일보사가 '자율'이라는 구실로 언론인 32명을 무더기로 해고한 것이다. 그 회사 기자들은 그해 5월 한국기자협회와 함께 전국의 기자들이 전개한 검열 거부 및 제작 거부에 앞장선 바 있다. 이어 8월 4일 합동통신사, 9일 동아일보사, 10일 한국일보사 등의 차례로 16일까지 전국 39개 언론사에서 900여 명이 축출됐다. 박정희 정권 때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해직당한 160여 명이 한국 언론 사상 최다 기록이었다. 그러나 1980년 여름 신군부는 단숨에 신기록에 도달했다.
언론인 학살극이 끝나고 8월 16일 당시 이수성 문공부 공보국장이 작성한 공식 문건인 '언론인 정화 결과'에 의하면 희생자는 총 933명이었다. 검열 거부를 주도했던 한국기자협회 집행부 전원과 기협 분회 간부, 검열과 제작 거부 등 자유언론 운동에 앞장섰던 기자들이 대부분 포함됐음은 물론이다. 이중 보안사 언론대책반이 소위 '정화 조치'를 요구하며 작성한 명단은 모두 336명이고 실제 해직된 사람은 298명이다. 933명 가운데 298명을 뺀 나머지 635명은 보안사의 정화 조치 요구에 편승해 각 언론사 측에서 소위 '끼워 넣기'를 한 것이었다. 언론사 경영진이 평소에 못마땅하게 보던 기자들을 숙청 대상에 끼워 넣었음이 정부 문서로 확인된 셈이다.
살아남은 기자들의 중세시대, 전두환 신격화
신군부와 언론사 사주들이 의식 있는 언론인들을 한꺼번에 쓸어냄으로써 언론계에서는 권력에 대한 저항의 불씨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언론의 체질은 완전히 체제 순응적으로 바뀌었고, 학살에서 제외된 기자들에게는 위로금 조로 특별 보너스가 지급됐다. 뒤이어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언론의 상상을 초월한 충성 경쟁이 벌어졌다. 신군부의 시책을 무조건 지지하고 전두환을 향한 궁극의 찬양과 상징조작 작업이 전개된 것이다.
현대판 용비어천가로서 1980년 여름부터 시작된 일련의 전두환 찬가에 필적할 만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겨우 석 달 전 광주 일원에서 수백 명을 살상한 군부 독재자를 향해 "새 시대의 지도자 자질" "청렴결백을 몸소 솔선수범해온 표본" "수도승" "물욕을 초월한 성격" "어릴 때부터 비범" 등으로 칭송했다. 그야말로 흠집이라고는 전혀 없는 초인 또는 신 같은 존재로 떠받들었다. 각 신문사의 아카이브 자료를 일일이 찾아보며 필자도 새삼 개탄을 금치 못했는데, 그중 몇 가지 '작품'을 보자.
권력의 주구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경향신문이 맨 먼저 1980년 8월 19일부터 3회에 걸쳐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이라는 제목으로 기획 기사를 내보냈다. 최상의 미사여구가 난무하는 제1회의 부제는 '서릿발 같은 결단력 뒤에 훈훈한 인정 느낄 서민풍이…' '사생관(死生觀)선 의리와 정직의 성품' '나라 구하는데 가시밭길 못 갈소냐' '구멍가게 즐겨찾아 애들 과자 선물' 등이다.
"(제11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고 있는)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어려운 일에 앞장서지 않은 예가 없으며 만난(萬難) 극복의 의지가 넘쳐있고 위기에 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숱한 위기에 대처하고 극복하는 탁월한 솜씨가 오늘의 전 위원장을 창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26 사태, 12·12 사건, 대규모 학생 시위, 사북 광부 난동 사건,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김대중 연행조사, 광주 소요사태, 사회정화작업, 공무원과 공직자 대규모 숙정 등을 처리해나가는 과정에서 오랜 군인 생활에서 신조로 삼아온 결연한 사생관의 일단이 엿보인다.
'나라를 구하는데 어찌 가시밭길과 불을 피해 갈 수 있느냐. 내가 주저하지 않고 이 길을 뚫을 수만 있다면 백번 죽어도 한이 없다. 책임을 나눠 갖지 말고 최선을 다하다 죽으면 할 수 없다.'
항상 명쾌하고 확고하며 눈치를 보지 않는 성격을 지닌 전 위원장은 국가 운영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출할 새 시대의 지도자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적재적소에 인물을 기용하는 판단력이 투철하다. 인맥과 지연, 학벌과 혈연을 중요시하지 않고… (중략)
영관급 지휘관 시절, 어느 부하와 탁구를 쳤으나 실력이 모자라 진 적이 있었다. 그 부하가 얼마동안 교육을 받고 돌아와 보니 전 위원장은 왼손에 라켓을 들고도 자신을 굴복시키더라는 것이다. 단점의 보완에 전력투구하는 전 위원장의 성품을 읽을 수 있는 일화다.
전 위원장은 부정부패를 멀리하고 청렴결백을 몸소 솔선수범해온 표본이다. 좋은 음식과 좋은 물건을 즐기지 않는 생활 습성, 치즈와 오린지주스를 싫어하고 콩나물, 된장찌개 등을 즐겨 먹는 식성 등을 지켜본 부하들은 항상 자기들과 고락을 같이하는 동지의식과 전 위원장이 명령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는 복종 의식에 젖어있다고 털어놓는다."
신문 한 면을 통째로 장식한 장문의 기사 중 몇몇 부분을 발췌했는데, 특별히 과도한 대목이 있는 게 아니라 시종 이런 식이다. 용비어천가도 미치지 못할 경악스러운 찬양과 존숭으로 일관한다. 2회 '출생과 가정환경' 편도 일부 소개하면 이렇다. 부제는 '어릴 때부터 비범…우애도 지극' '편견 없는 성품은 항상 약자편' '하루 일과는 새벽 4시부터 독서로 시작' 등이다.
"이 마을 지강초등학교 진석렬 교감은 '예부터 상봉(上峰)에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천지(天地) 연못이 있는 용덕산 아래에서 큰 사람이 태어날 것이라고 전해왔는데 이 구전(口傳)은 전 장군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겠느냐'고 말한다.
천지 연못엔 순채라는 이상한 식물이 자라고 있다. 연꽃의 일종으로 줄기에 물때가 묻은 이 순채는 나라에 변이 생기면 없어지고 나라가 안정되면 다시 돋아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마을 출신인 전 위원장이 드디어 우리나라의 대들보 같은 인물이 되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게 해주었기 때문에 순채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고들 설명하고 있다.
김 여사는 전 위원장을 잉태했을 때 이상한 태몽을 꾸었다. 첩첩산중의 험한 산길을 가다가 큰 웅덩이가 보였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안을 들여다보니 크고 밝은 달이 있어 치마폭에 쌌다. 계속 달이 떠올라 정신없이 담다 보니 치마에서 흘러내려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었다는 얘기를 생전의 김 여사가 전 위원장에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서울신문이 1980년 8월 19일부터 무려 7회에 걸쳐 연재한 <새 시대를 여는 새 지도자 전두환 장군>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다. 1회 '장군은 누구인가'를 음미해 보자.
"그렇다. 장군은 숨은 별이었다. 비록 그의 가슴에 그의 머리에 이 민족, 이 국가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무엇이 이 겨레를 살리는 길인가를 위해 위대한 경륜과 포부를 쌓고 있었더라도 그가 바로 우리의 지도자요 목자임을 우리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나대니얼 호돈'의 '큰바위 얼굴'은 장군 - 바로 그 자신이었다."
4회 '황강의 새벽' 편에서는 "장군의 고향인 내천 뒷산 용덕산과 이어져 하나의 지맥을 이룬다. 이 가운데 영봉 황매산의 정기를 타고날 인물이 세 사람 있다. 그중 두 사람은 이미 태어났고 한 사람은 뒤에 태어날 것이다. 이미 태어난 두 사람은 조식 선생과 무학대사이다"라고 기사가 아니라 위인전을 전개하는데,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는 읽는 이의 모골을 송연케한다.
"서울신문 특별 취재반은 밤하늘 별빛을 받아 번쩍이는 황강의 물줄기를 끼고 참으로 험하고 먼 길을 돌아 나오며 이렇게 기원했다. 조국이여, 이 겨레여, 장군과 함께 광영 있으라…."
북한의 김일성 일가 우상화 뺨을 치는 이런 종류의 기사와 사설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한국일보가 같은 해 8월 23일부터 상·중·하로 실은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육사 입교에서 대장 전역까지>,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바로 다음 날인 8월 28일부터 중앙일보가 4차례 연재한 <합천에서 청와대까지-전두환 대통령 어제와 오늘> 역시 제목만으로도 기사 내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조선일보 8월 23일자 3면 전체에 걸쳐 실린 <인간 전두환-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와 행동>은 이 신문의 진면목을 상징하는 사례로서 한국 언론사를 다룬 책들에서 자주 거론된다. "수도승에게서나 엿볼 수 있는 청렴과 극기의 자세"를 지녔다고 전두환을 칭송한 이 기사에는 '사(私)에 앞서 공(公)…나보다 국가 앞세워', '자신에게 엄격하고 책임 회피 안해' '이해관계 얽매이지 않고 남에게 주기 좋아하는 성격'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조선일보는 치부를 감추려는 것인지 아카이브에서 유독 해당 지면만 누락하고 있어 기사 전문을 어렵게 찾았는데 주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영화 <서울의 봄>이 재현한 '전두광'의 행적을 떠올리며 읽다 보면 욕지기가 솟을지도 모르겠다.
"'여보. 나 나갑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장 전두환 장군의 한결같은 아침 출근 인사다. 여느 남편들처럼 '다녀오겠다'는 여운이 깃든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군인이란 나라에 바침 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지만 이 짤막한 아침 인사에서도 그의 사생관(死生觀)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영관 장교 시절 매일 새벽처럼 집을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그를 붙잡고 칭얼대는 어린 자식들에겐 '군인이란 나라를 위해 죽고 나랏일에 밤낮이 어디 있느냐'고 달랜 적도 있다. 그는 매사에 있어서 사(私)에 앞서 공(公)이고, 나에 앞서 나라 걱정이다.
그의 투철한 국가관과 불굴의 의지, 비리를 보고선 잠시도 참지를 못하는 불같은 성품과 책임감,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에겐 한없이 자상한 오늘의 '지도자적 자질'은 수도(修道) 생활보다도 엄격하고 규칙적인 육군사관학교 4년 생활에서 갈고 닦아 더욱 살찌운 것인 듯하다.
상대방에게 무섭도록 강인한 인상을 안겨주는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지독하리만큼 엄격한 그의 청교도적(淸敎徒的) 엄격성이 풍겨주는 인상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스포츠라면 축구에서 야구, 탁구, 테니스, 수영, 달리기 등 못하는 종목이 없지만 화투나 카드놀이라던가 잡기(雜技)를 모른다. 초급 장교 때도 다들 즐겨 찾는 당구장에조차 들른 일이 없으며, 주석(酒席)에도 주도(酒道)를 즐겨 찾고 가정교육에 더 관심이 깊은 쪽이다.
그는 모든 사항의 판단 기준을 이처럼 정의와 대국(大局)에 놓을 뿐 세세한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다. 전 장군의 밑을 거쳐 간 부하 장교는 그의 통솔 방법을 3분의 1만 흉내 내면 모범적 지휘관이란 평을 얻을 수 있다는 게 군 내의 통설로 되어 있다.
그에게서 높이 사야 할 점은 수도승(修道僧)에게서나 엿볼 수 있는 청렴(淸廉)과 극기(克己)의 자세인 듯하다. 지난날 권력 주위에 맴돌 수 있었던 사람치고 거의 대개가 부패에 물들었지만 그는 항상 예외였다. 그는 확실히 챙겨 넣는 것보다도 남에게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 쪽이다.
살을 깎는 자기단련을 육사 졸업 후 25년간 해오는 사이, 동기생일지라도 어쩌다 그를 대할 때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암벽을 대하는 느낌이 들 때가 없지 않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돌 정도다.
그가 국가원수 시해사건에서 보여준 집요하고 철두철미한 사건 규명으로, 그의 당당함은 자신도 모르게 이미 군의 의지를 결집시키는 촉매제가 되었고,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적인 결단은 그를 군의 지도자가 아니라 온 국민의 지도자상으로 클로즈업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2․12 사건만 해도 그렇다. 정승화(鄭昇和) 육참총장 쪽에 서면 개인 영달은 물론 위험부담이 전혀 없다는 걸 그도 잘 알았으리라. 이미 고인(故人)이 된 대통령의 억울함을 규명한다고 하여 누가 알아줄 리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배우고 익혀 온 양식으로선 참모총장이 아니라 그보다 높은 상관일지라도 국가원수의 시해에 직접-간접적인 혐의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철저히 그 혐의가 규명되어야 바른 길이었다.
10․26 사태 이후 그가 보여준 일련의 행위는 육사에서 익히고 오랜 군대 생활에서 다져진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행위라는 게 주위의 얘기다. 이러한 전 장군을 두고 요즘 군내에선 위기에 강한 사람이라고 일컫고 있다. 대소의 위기 때마다 아무도 앞장을 서려 하지 않을 때 그만은 자신의 도덕관에 비추어 옳다고만 판단되면 위험 여부를 가리지 않고 앞장서서 난관을 극복해 왔기 때문이리라.
그가 혼신의 정열을 쏟고 있는 사회정화, 정치풍토의 개선도 그의 구국(救國)적 도덕관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는 사회 각계의 지도자는 기본적으로 나라에 몸을 바친다는 각오 아래 행동하고 처신해야 한다는 생각인 듯하다. 지도자가 사심 없는 행동, 당당한 태도를 지닐 때 정상적인 윤리가 제대로 통하는 밝은 사회가 이룩될 수 있다는 얘기다."
동아일보가 8월 29일 실은 <새 시대의 기수 전두환 대통령 우국충정 30년…군생활 통해 본 그의 인간상>은 위 기사들보다는 좀 약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반적인 기조는 오십보 백보다. 훗날에 드러날 '5공 비리'를 미처 예견할 순 없었다 하더라도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 '물욕을 초월했다'는 인물평을 과감히 개진한다.
"청렴결백의 성품은 전 대통령의 또 다른 특성이다. 그것은 사치를 모르는 물욕을 초월한 그의 성격 때문이다. 사치스러운 외국제 물건을 전혀 모를 정도로 청렴결백한 생활로 일관했다."
소위 레거시 미디어들이 이처럼 기사를 가장해 독재 권력을 향한 충성 구애를 쏟아내거나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는 행태는 한국 언론의 한 속성으로 고착돼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다. 전두환은 언론의 벌거벗은 충성 경쟁과 여론 조작을 발판으로 '국가 영도자'의 지위에 올라 철권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다.
['서울의 봄'과 언론 ③]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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