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들고 나온 '양두구육' 인기 지속
홍준표, 물난리 골프로 징계받자 '과하지욕'
조국 추천 '압수수색'…볼 때마다 가슴 두근
연말이 되면서 여기저기서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보이고 있다. 대학교수들은 진작에 견리망의見利忘義(이익을 보기 위해 정의를 잊음)를 발표했다. 몇몇 기업 대표들은 언론과의 연말 인터뷰를 통해 지난 1년의 실적을 사자성어에 담아 자랑한다. 그런가하면 어떤 지자체는 주민 대상의 연말연시 사자성어 발표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다.
정치인만큼 사자성어를 즐겨 쓰는 사람들도 없다. 정치인들은 자신이 하고싶은 말을 사자성어에 에둘러 담아내곤 한다. 때로는 정적에 대한 공격과 수비의 무기로 사자성어를 사용한다. 지난 1년 정치인들은 어떤 사자성어를 선보였을까. 사자성어를 가장 효과적으로 써 먹은 정치인은 누굴까.
여의도 사자성어계의 일인자는 지난 27일 탈당한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다. 이준석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양두구육羊頭狗肉(양 대가리 내놓고 개고기를 팜)이라는 칼을 맹렬히 휘둘렀다. 그 칼은 몹시 날카로워 찔린 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양두구육1
이준석이 양두구육을 들고 나온 것은 지난해 여름이다. 7월 27일 페이스북에 “앞에서는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뒤에서는 정상배들에게서 개고기 받아와서 판다”는 글을 올린 것이다.
이준석의 양두구육 발언에 과연 ‘개고기’가 누구냐, 추측이 난무했다. 혹시 나? 설마 나? 여러 사람들이 전전긍긍했다. 국민의힘의 여러 인사들은 ‘개고기’ 발언을 나무랐다. 언론은 그들의 발언을 쫓으며 추적보도를 이어갔다. 양두구육은 여의도 사자성어 시장의 대박 상품으로 등극했다.
이준석은 대박 상품을 스테디 셀러로 만들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양두구육 출시 얼마 뒤인 지난해 8월 13일에는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들을 불러 양두구육 설명회를 가졌다. “일련의 상황을 보고 제가 뱉어낸 양두구육의 탄식은 저에 대한 자책감 섞인 질책이었다. 돌이켜 보면 양의 머리를 흔들면서 개고기를 가장 열심히 팔았고 가장 잘 팔았던 사람은 바로 저였다.” 극적 효과를 위해 이준석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양두구육2
양두구육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 조짐을 보였다. 부양책만 좀 쓰면 명예의 전당에도 오를 것 같았다. 하버드 나온 이준석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이준석은 기회 닿는대로 양두구육 마케팅을 이어 나갔다.
이준석은 지난 5월 3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김재원·태영호 최고위원이 망언으로 당 윤리위원회에 회부된 사실에 대해 “나는 양두구육으로 당원권 정지 1년을 받았다. (두 위원은) 5·18 민주화 운동, 제주 4·3 사건을 모두 모욕했으니 더욱 강한 징계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10월 5일에는 국민의힘 일각에서 자신에게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 선거에 나선 김태우 후보를 지원해달라고 요구하는 언론 기사를 봤다’며 페이스북에 “도와줬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는 것도, 양두구육 하는 후보에 속는 것도 각각 한 번이면 족하다”며 단칼에 거부했다.
이준석은 또 “김태우 후보는 지난 지방선거 이후에도 유튜브 채널 ‘김태우TV’에서 몇 달간 이준석 죽이기 콘텐츠를 계속 내보냈고, 지금은 ‘김태우TV’에서 활동하던 자들이 새로 채널을 파서 ‘이준석 학력 의혹’을 내보내며 끝없이 공격을 지속하고 있다”며 김태우를 양두구육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 모셨다.
결자해지
화무십일홍. 양두구육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휘발됐다. 신제품이 필요했다. 이준석은 새로운 사자성어를 들고 나온다. 결자해지.
이준석은 지난 10월 16일 국회 소통관에서 사자성어 발표회를 열고 윤 대통령을 향해 “오늘의 사자성어는 결자해지結者解之(묶은 사람이 풀어야 함)다. 여당 집단 묵언수행의 저주를 풀어달라”고 포문을 열었다. 또 “내부총질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여당 내에서 자유로운 의견을 표출하는 것을 막아 세우신 당신께서 스스로 그 저주를 풀어내지 않으면 아무리 자유롭게 말하라고 바뀌었다 해봤자 사람들은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결자해지는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으나 양두구육만큼은 아니었다.
배은망덕
이에 이준석은 다시 배은망덕背恩忘德(은혜를 원수로 갚음)을 들고 나왔다. 지난 18일 페이스북을 통해 “대통령 당적 박탈이 언급되기 시작했다”며 “추종할 때는 언제고 대통령을 내치라니, 개인의 엔성가노N姓家奴(여러 성을 가진 종놈) 문제가 아니라 그냥 집단 배은망덕 하려나 보다”라며 신제품 발표를 한 것이다.
엔성가노는 듣보잡 퓨전 사자성어다. 이준석이 지난해 8월 5일 발표한 삼성가노三姓家奴(세 개의 성씨를 가진 종놈)의 리메이크다. 삼성가노는 2017년 대선 당시 장제원이 반기문, 유승민, 홍준표 등 성이 다른 사람을 차례로 지지했던 사실을 꼬집은 것으로 보인다.
과하지욕
이준석이 양두구육으로 내리 2년 돌풍을 일으키자 도전장을 내민 사람이 있으니 홍준표 대구시장이다. 홍준표는 지난 7월 20일 밤 페이스북에 과하지욕跨下之辱(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굴욕)을 내놓았다.
지난 여름 홍수 때 즐긴 골프로 당원권 정지 10개월 징계를 받은 직후다. 자신에 대한 징계를 모욕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과하지욕은 나름 시장에서 선전했다. 하지만 이준석의 양두구육에 비하면 초라했다.
홍준표는 암중모색 끝에 지난 14일 페이스북에 한꺼번에 사자성어 3개를 발표했다. “면종복배面從腹背(앞에서는 복종하고 뒤에서는 배반함) 정치하면 안 된다. 감탄고토甘呑苦吐(달면 삼키고 쓰면 뱉음) 정치하면 안 된다. 배은망덕 정치하면 안 된다. 그런 정치는 말로가 비참해 진다. 이참에 용산, 지도부 홍위병으로 분수 모르고 설치던 애들도 정리해라. 싹수가 노란 애들은 더 큰 재앙이 오기 전에 정리해라. 그런 애들이 당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조속히 당이 정비 되어 총선 준비에 나섰으면 좋겠다.”
국민의힘 일부 인사와 용산을 싸잡아 비판한 글로 읽혔다. 그러나 이준석의 양두구육이라라는 거대한 산을 넘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배은망덕은 이준석이 이미 써 먹은 사자성어라 신선도가 떨어졌다.
압수수색
뭐니 뭐니 해도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할 만한 올해 최고의 사자성어는 압수수색押收搜索이다. 조국 전 장관도 추천한 사자성어다.
조 전 장관은 지난 4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디케의 눈물> 북 콘서트에서 “2023년을 관통하는 최고의 사자성어는 압수수색이다. 모두 압수수색을 두려워한다. 며칠 전 언론 통계를 봤더니 검찰 압수수색이 10일에 8번 일어난다고 한다. (…) 각종 수사·기소권 행사에 우리 모두 위축돼 있다”고 가슴 떨리는 발언을 했다.
사자성어 사전에 등재돼 있지는 않지만, 과연 압수수색이란 네 글자가 눈에 띄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한 해였다. 내년에도 압수수색이 우리를 가슴 두근거리게 할까. 아마 그럴 것이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