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의안 377A'…회원국에 무력사용 권고 가능
한국전쟁 때 미국 주도, '소련 비토' 무력화 조치
팔 대사 "미국 거부권, 이스라엘에 살육 허가"
팔 1만8205명 사망…이스라엘 "전투 몇주 더"
EU "가자 파괴, 2차대전 때 독일보다 극심"
미국과 EU, 서안 유대 정착민 폭력 제재 추진
극한에 내몰리는 가자의 인도주의 위기에도 휴전을 거부하는 미국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휴전 촉구 결의안이 미국의 '비토'(거부권 행사)로 번번이 무산되자 아랍‧이슬람권 국가를 중심으로 결의안을 유엔총회에 제출하는 비상조치에 들어갔다. 아랍국을 대표한 이집트와 이슬람협력기구(OIC) 의장국인 모리타니가 '유엔총회 결의안 377A(V)'를 발동한 것이다. 두 나라는 데니스 프랜시스 유엔총회 의장에게 서한을 보내 공식 통보했다. 이는 국제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사태에도 특정 상임이사국의 거듭된 '비토'로 안보리 기능이 마비됐을 때 유엔총회가 그 나라를 '패싱'해 집단적 대응 조치를 천명하는 비상 수단이다.
'미국 패싱' 유엔총회 비상조치…제 덫에 걸린 미국
팔 대사 "미국 거부권, 이스라엘에 살육 허가"
이에 따라 유엔은 12일(뉴욕 현지시간) 긴급특별총회(ESS)를 열어 휴전 촉구 결의안을 표결한다. 이집트와 모리타니가 제출한 결의안은 8일 부결된 안보리 결의안과 유사하게 가자지구의 재앙적 인도주의 상황에 중대한 우려를 표명한 뒤, 즉각적인 인도주의 휴전과 모든 인질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유엔총회는 10월 27일 즉시 일시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엔총회 결의는 안보리 결의와는 달리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국제사회의 기류 변화와 그 강도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앞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52년 만에 '비상대권'인 유엔 헌장 99조를 발동해 안보리 특별회의를 소집하고 아랍에미리트(UAE)가 주도하고 100개국이 서명한 휴전 촉구 결의안을 상정했지만, 유일하게 미국이 비토해 무위에 그쳤다. 이에 대해 구테흐스 총장은 10일 도하 포럼에서 "유감스럽게도 안보리가 인도주의적 휴전 촉구에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덜 필요해진 것 아니다"라며 휴전 촉구를 거듭 호소했다. 리야드 만수르 주유엔 팔레스타인 대사는 11일 안보리 의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안보리가 가자에서 즉각적 인도주의 휴전에 실패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쟁 기계는 계속해서 팔레스타인인을 살육하는 허가를 받았다"며 "세계의 의회인 유엔총회는 이 흐름을 바로잡을 기회와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호소했다.
'유엔총회 결의안 377A'…한국전쟁 때 미국 주도
'소련 비토' 무력화 비상조치…무력사용 권고 가능
'평화를 위한 단결'(Uniting for Peace)로도 불리는 유엔총회 결의안 377A(V)는 1950년 11월 3일 한국전쟁 당시 종전 결의안에 대한 소련의 '묻지 마 비토'에 대응하고 국제사회를 반소 전선에 묶어두기 위한 목적에서 미국이 주도해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이 타깃이 됐다. 제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격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유엔총회 결의안 377A(V)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유엔총회에 "필요한 경우 무력 사용"을 포함한 집단적 조치를 회원국에 권고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점이다. 실제로 '무력 사용 권고'를 했던 사례는 한국전쟁 때가 유일하다. 1950년 11월 중순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자, 이 결의안에 근거해 유엔총회는 유엔 결의안 498(V)를 채택하고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했다. 이에 대해 알자지라는 "유엔이 전쟁 중에 어떤 나라를 침략자로 규정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썼다. 또한 당시 결의안은 한국에서의 유엔 행동과 관련해 군사를 포함한 모든 지원을 해달라고 전 회원국에 촉구했다. 한편, 유엔총회 결의안 377A(V)은 안보리 이사국 중 최소한 한 곳이나 유엔 회원국 중 일정한 그룹이 발동할 수 있다. 그동안 발동된 대표적 사례는 콩고 위기(1960년)와 인도-파키스탄 분쟁(1971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1980년)과 관련해서다.
팔 사망자 1만8205명…이스라엘 "전투 몇주 지속"
하마스 "전면 휴전 없으면, 추가 인질 석방 없다"
'하마스 섬멸'을 내건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공습과 지상 작전이 가자 북부에 이어 피란민이 밀집된 칸 유니스 등 남부로 이동하면서 인명 피해도 계속해서 늘고 있다. 가자지구 보건부에 따르면, 전쟁 66일째인 11일 현재 최소 1만8205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숨졌고, 4만9645명이 부상했다. 또한 가자지구 내 주택의 절반 이상이 파괴 또는 손상됐으며, 가자 주민 230만 명 중 80%가 넘는 190만 명이 피란 중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지난달 24일부터 7일간 일시 교전 중지에 합의하고 하마스가 납치한 인질과 팔레스타인인 수감자를 교환했지만, 이후 연장 협상은 결렬되자 이스라엘은 1일부터 가자 공격을 재개했다. 이스라엘은 유엔 등 국제사회의 거듭된 인도주의적 휴전 촉구를 일축하고 하마스 군사력의 완전한 해체와 모든 인질 석방이 이뤄질 때까지 가자 공세를 지속한다는 뜻을 고집하고 있다. 하마스 수뇌부를 잡을 때까지 휴전 협상을 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AP 통신에 따르면,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현 단계의 작전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갈란트는 군사작전의 시한은 언급하지 않은 채 공군력이 뒷받침하는 현 단계의 격렬한 지상전이 몇 주간 지속될 수 있으며, 추가적 군사 활동은 몇 달간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는 "다음 단계는 포위된 채 저항하는 세력과의 저강도 전투가 될 것이며 그때는 이스라엘 부대들이 작전의 자유를 갖게 될 것"이라며 "그것이 다음 단계가 시작됐다는 신호"라고 말했다. 하마스도 전면적 휴전이 없으면 추가 인질 석방은 없다고 맞서고 있다. 현재 억류 중인 인질은 137명이다.
미국 이어 EU, 서안 유대 정착민 폭력 제재 추진
"가자 파괴, 종말 온 듯…2차대전 독일보다 극심"
10‧7 사태 초기 이스라엘 편이었던 유럽연합(EU)의 기류도 변하고 있다.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11일 오후 브뤼셀에서 EU 외교장관회의를 주재한 뒤 행한 기자회견에서 가자지구 파괴는 비례적으로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겪은 것보다 "훨씬 더 극심하다. 재앙적이고 종말이 온 듯하다"라고 말했다고 AP와 알자지라 등 외신들이 전했다. 또한 보렐은 하마스의 공격에 대한 이스라엘의 군사 대응은 "믿기 힘든 수의 민간인 사상자를 낳았다"고 말했다. 특히 보렐 고위대표는 요르단강 서안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한 이스라엘 극단주의자들의 폭력을 거론했다. 그는 "서안에서 벌어진 극단주의 정착민의 폭력은 EU에 경각심을 불렀다"며 최근 국제법을 위반하며 동예루살렘에 1700채의 유대인 주택 건설을 승인한 이스라엘 정부의 결정을 비난했다. 보렐은 "이제 말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서안에서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폭력행위와 관련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조치를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이스라엘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제재를 회원국에 정식 제안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조 바이든 행정부도 팔레스타인 주민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한 이스라엘 극단주의자 수십 명을 미국 비자 발급 금지 대상에 올렸다. 앞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11월 30일 이스라엘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만났을 때 서안에서 폭력을 저지른 이스라엘 정착민에게 책임을 묻는 조치를 즉시 취하라고 촉구했다.
서방, 유대 정착민 폭력 거론은 휴전 물타기?
유엔에 따르면, 10‧7 사태 이후 서안에서 이스라엘군의 습격과 정착민 공격 사건은 두 배 넘게 늘었으며 어린이 63명을 포함해 최소한 275명이 살해됐고 3365명이 다쳤다. 1967년 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서안과 동예루살렘 등을 점령한 뒤 이곳에 정착촌을 건설해 유대인들을 이주시켰다. 유엔 등 국제사회는 서안과 동예루살렘의 유대인 정착촌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올해 1월 현재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에는 총 144개의 정착촌과 100여 개의 불법 정착촌이 있다. 서안에는 45만여 명, 동예루살렘에는 약 22만 명의 유대인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다. 동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은 3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미국에 이어 유럽이 서안에서 팔레스타인 주민을 상대로 벌이는 이스라엘군과 정착민의 야만적 폭력행위에 경각심을 느끼고 비자 발급 금지 등 제재에 착수한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의 자위권 보장과 하마스 해체를 지지하면서 즉각적인 인도주의 휴전을 거부하는 구실로 활용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그럴 경우 미국과 유럽에는 두고두고 가자 대량 참극의 '공범'이란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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