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관위 책임론 ①] 선거법 파행 '입꾹닫' 안돼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오래 전 시골사람들 사이에선 서울은 너무나 복잡해서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의 코도 눈 깜짝할 사이에 베어가니 단단히 조심하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나는 이 말을 중앙선관위에 해주고 싶다. 정치권과 선거판이란 데가 본디 가만히 있는 사람의 코를 베어가도 모를 만큼 시끌벅적한 곳이니 한시도 경계의 끈을 놓지 말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 중앙선관위가 중심을 잃으면 정치판이 야바위판으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다. 실은 이미 4년 전에도 정치권과 선거판이 시끌벅적 죽기 살기로 선거법논란과 위성정당논란을 벌였었다. 중앙선관위는 당시에도 지금처럼 굳세어라 입을 열지 않았다.

위성정당 소동으로 중앙선관위가 앉은 자리에서 코를 베였다

그러자 정치권이 옳다구나, 떴다방 위성정당을 만들어 중앙선관위의 코를 슬쩍 베어갔다. 이때 납작해진 중앙선관위의 콧등이 다 자라기도 전에 정치권은 똑같은 논쟁을 되풀이하며 다시 한 번 코를 베겠다고 한껏 바람을 잡는다. 정치판을 주름잡는 거대 양당의 고정 레퍼토리, ‘우리한테 정당투표하면 사표가 된다’는 왕년의 노래가 다시 어디서나 들리는 게 그 증거다. 거대 양당의 18번 애창곡은 연동형 조로 시작하다 중간에 슬쩍 병립형 조로 조바꿈을 하면서 완전히 다른 노래가 되지만 청중들은 눈치 채지 못한다. 도우미들이 그럴싸하게 화음을 맞춰주기 때문이다.

중앙선관위는 4년 전 총선을 앞두고 거대양당이 만들어낸 위성정당이 후다닥 선거판에 뛰어들어 자신의 코를 베어갈 때에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대 양당이 아바타로 내세운 위성정당에 정당등록증을 내주며 합법성의 날개를 달아줬다. 군소정당에 위성정당까지 뒤엉켜 치러진 지난 총선에서 중앙선관위는 거대 양당이 거둔 지역구 선거 결과는 물론이고 사상최초로 위성정당이 거둔 정당투표 선거 결과도 그대로 인정해줬다. 중앙선관위는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진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을 하루아침에 농락하고 무력화한 사상초유의 위성정당사태가 외국사람들에게는 얼마나 경악할 만한 코미디로 비쳐지고 우리 국민들에게는 얼마나 참담한 비극으로 비쳐지는지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도무지 무감한 존재였다.

다시 4년이 흘렀지만 중앙선관위는 2020년 당시의 인식과 실천을 되돌아보며 성찰하지 않았다. 선거법이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백주대낮에 처절하게 우롱당하는 참담한 비상상황을 직면해서도 찍소리를 내지 못했다. 거대 양당이 칼만 안 든 날강도처럼 달려들어 자신의 코를 베어 가는데도 중앙선관위는 고통스런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묵언수행으로 일관하다 결국 거대 양당의 탈법 의지와 행태에 합법성을 부여했다. 연동형 선거개혁을 애타게 지지해온 수많은 국민들의 끓어오르는 공분과 눈뜬 채로 비례의석을 강탈당하게 생긴 군소정당들의 고통에는 눈과 귀를 닫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도무지 부끄러움을 몰랐다.

4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다. 2020년의 위성정당 논란과 사태에 대한 아무런 성찰과 각성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하다. 중앙선관위는 2020년에도 거대 양당의 이기적 충동과 탈법적 행태에 휩쓸려서는 안 됐다. 거대 양당, 특히 국힘당의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공공연한 위장창당행위를 합법적인 창당행위로 인정해서 등록증을 내줘서는 안 됐다. 그 결과로 선거법이 무력화되고 선거결과가 왜곡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방치해서는 안 됐다. 설령 그때는 전례가 없고 경황이 없어 거대 양당의 탈법적인 분탕질에 당했다고 치자. 그랬다면 그 후로 절치부심해서 다시는 안 당하겠다는 각오 아래 철저하게 반성하고 대안을 찾아냈어야 했다. 최소한 국회와 정치권에 위성정당방지법을 제정하라는 입법 권고를 내놨어야 했다. 마땅히 실효적인 위성정당방지법안도 제출했어야 했다.

 

21대 총선일인 15일 오전 대전시 서구 월평1동 투표소에서 한 유권자가 소중한 한표를 투표함에 넣고 있다. 2020.4.15 연합뉴스
21대 총선일인 15일 오전 대전시 서구 월평1동 투표소에서 한 유권자가 소중한 한표를 투표함에 넣고 있다. 2020.4.15 연합뉴스

중앙선관위가 ‘입꾹닫’을 해온 세 가지 이유 혹은 핑계

중앙선관위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정치권이 그토록 선거법논란과 위성정당논란으로 다시 시끌벅적한 이 마당에 주무헌법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입을 꾹 닫고 있는가? 세 가지 이유를 댈지 모르겠다. 첫째, 위성정당에 대해서는 지난 2020년에 창당의 자유와 형식심사주의에 입각해서 정당등록증을 내준 전례가 있어서 재론할 필요를 못 느낀다; 둘째, 선거법개정 여부는 정치권이 알아서 할 바이지 중앙선관위가 콩 놔라 팥 놔라 개입하지 않는 게 선관위의 정치적 중립성 차원에서 바람직하다; 셋째, 위성정당방지법 제정 여부도 자칫하면 야권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어서 공식입장을 자제하는 편이 정치적 중립성에 바람직하다는 이유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중앙선관위가 내세울 만한 세 이유는 모두 안이하고 편리한 통념이자 책임을 회피하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 창당은 ‘정당투표 사표론’이라는 편리한 착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이번 연재의 첫 번째 글에서 밝혔듯이 위성정당 창당 이유로 제시되는 ‘정당투표 사표론’은 연동형 정당투표에 따른 선거결과가 어째서 병립형 정당투표에 따른 선거결과와 다르냐며 말도 안 되는 불평과 항의를 늘어놓는다. 이런 불평과 항의를 최대한 선의로 해석하면 연동형 선거법을 병립형 선거법으로 다시 바꾸는 선거법 개정운동이 필요하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런 불평과 항의가 연동형 비례의석을 가로채기 위해 위성정당을 만들자는 쪽으로 나아가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위성정당은 불법목적(부당이득)의 공공연한 위장창당의 산물

위성정당의 핵심은 선거법이 원칙적으로 제3당들의 몫으로 정해놓은 연동형 비례의석을 가로챌 불법목적으로 거대 정당이 창당자유라는 정당한 법원칙과 창당절차라는 정당한 법형식을 악용하여 떴다방 정당을 만드는 데 있다. 거대정당의 위성정당 창당은 그 본질이 부당이득 취득 목적을 창당자유 원칙과 창당절차 행태로 숨기고 있는 위장창당행위라는 데 있다.

위장창당행위는 위장이혼, 위장폐업, 위장전입 등 탈법행위와 마찬가지로 불법행위와 범죄행위를 구성해서 법질서의 제재를 피할 길이 없다. 다만 몰래 행해지기 때문에 적발이 어려울 뿐이다. 중앙선관위가 거대정당의 위장창당을 창당의 자유로 옹호하는 것은 위장이혼, 위장폐업, 위장전입을 각각 이혼의 자유, 폐업의 자유, 전입의 자유로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도단이다. 이 대목에서 중앙선관위에게 묻는다. 이혼사안을 다루는 가정법원이 세금포탈을 노리고 위장이혼을 진행 중이라는 당사자의 자백을 듣고 나서도 못 들은 척 재판상 이혼을 판결한다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정신 나간 짓이라고 하지 않겠나. 그렇다면 거대양당이 선거정의를 교란하기 위해 위장창당을 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위성정당에 합법성을 부여한 중앙선관위는 무엇이 다른가. 답변하라.

실은 부당이득을 노린 거대정당의 위장창당은 예를 들어 부당이득(낮은 사업자세율 적용, 법인카드 사용, 상속세 포탈 등)을 노린 개인의 위장창업보다 백만 배 더 질이 나쁘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위장창업은 당국 몰래 혼자나 둘, 혹은 많지 않은 여럿이 공모해서 진행해야만 부당이득 획득에 성공할 수 있는 반면, 위장창당은 온 나라에 사방팔방 광고해서 수백만 일반지지자들의 동참과 협력을 이끌어내야만 부당이득 획득에 성공할 수 있다. 나쁜 일에 수백 만, 수천 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악질적인 불법행위란 뜻이다. 둘째, 같은 동전의 뒷면에 해당하는 얘기이지만 위장창당은 수많은 사람들의 동참이 요구되기 때문에 남몰래 진행해선 성공할 수 없다. 가장 노골적으로 진행되는 법위반행위라는 뜻이다.

위장창당의 죄질을 특별하게 나쁘게 만드는 세 번째 이유는 위장창업은 특정한 부당이득을 원하는 누구나에게 아무 때나 열려 있는 탈법수단인 데 비해 위장창당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연동형 비례의석을 노리고 진행하는 위장창당은 특별한 조건이 충족될 때에 한해 거대양당만이 실행 가능한 탈법수단이다. 여기서 특별한 조건이라 함은 총선결과로 구성될 의회의 전체의석 대비 지역구의석비중이 최소한 66.6%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역구의석 대 비례의석의 구성비가 2.5대1, 3대1, 4대1 등으로 2대1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국회는 지역구의석 비중이 무려 84.3%에 달하는 5.4대1 의석구조라서 이 특별한 조건을 아주 잘 충족한다.

전체의석수와 지역구의석수가 큰 차이가 안 나는 특별한 조건에서는 거대 양당, 특히 제1당은 지역구선거에서 전체의석대비 정당득표율 초과의석을 획득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거대 양당, 특히 제1당은 이미 지역구선거에서 초과의석을 확보했기 때문에 정당득표율이 아무리 높아도 연동형선거법의 보충용도 비례의석을 단 한 석도 추가할 수 없다. 이것이 연동형 게임의 룰이지만 거대양당과 지지자들은 정당투표가 몽땅 사표가 된다는 식의 집단착각에 빠져 위장창당 행위로 맞대응하며 연동형 게임의 룰을 무력화한다. 중요한 것은 특수한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에도 떴다방 위장창당은 거대 양당만 불법행위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위성정당 창당행위, 죄질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쁘다

정리해보자. 거대양당의 위성정당 창당행위는 첫째, 법으로 금지된 부당이득(연동형비례의석)을 노린다는 의미에서 고의가 인정되는 명백한 불법행위이지 단순한 꼼수가 아니다. 둘째, 위장창당 불법행위는 총선 정당투표에서 1000만 명도 넘는 지지자들의 협력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죄질이 아주 나쁘다. 셋째, 법집행당국의 눈을 피해 몰래하는 불법행위가 아니라 공공연하고 노골적으로 진행한다는 점에서 죄질이 극도로 나쁘다. 넷째, 위장창당 불법행위는 그 주체가 지난 35년 넘게 정권을 번갈아 운영해온 거대 양당이라는 점에서 죄질이 가중된다. 다섯째, 불법행위의 파급효과가 이기적인 개인의 세금도둑질 등 좀스럽고 잡스러운 부당이득으로 그치지 않고 어렵사리 만들어낸 개정선거법을 농락하고 선거민심과 민주주의를 왜곡하며 정치 불신을 심화한다는 점에서 안 그래도 무거운 죄질이 2중 3중으로 가중된다.

거대정당은 민주국가와 헌정질서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과 역할을 부여받는 공적 기구다. 정치자금법이 국민세금으로 분기별 정당경상활동 국고보조금을 지원하고 전국선거 때마다 추가적으로 선거운동 국고보조금을 지원하는 이유다. 요컨대 거대 양당이 지난 총선에서 재미를 보고 이번 총선에서도 만지작거리는 위성정당 사태의 본질은 첫째, 공당 중의 공당으로서 막대한 국민세금을 지원받는 거대 양당이, 둘째, 금단의 연동형 비례의석을 얻을 불법목적으로, 셋째, 혼동과 착시에 뿌리박은 가짜논리(정당투표=사표)를 동원하여, 넷째, 공당으로서 공적책임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공공연하게 위장창당 쇼를 벌이며, 다섯째, 1000만 명도 넘는 유권자들까지 불법목적에 끌어들이는 파렴치한 행태를 벌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거대양당의 위장창당 죄질이 통상의 위장탈법행위에 비해 백만 배 더 무겁다는 나의 진단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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