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언론 민들레가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을 공개한 뒤 찬반 논란이 격렬했다. 처음엔 비판과 비난이 들끓고 심지어 "노이즈 마케팅 아니냐"는 공격까지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공감과 동조의 견해들이 그 못지않게 분출하고 확산되면서 여론의 추가 적어도 한쪽으로 기운 것 같진 않다고 체감한다.
"저는 민들레가 이름을 그렇게 공개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 애들의 이름은 세상에 못 나올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합니다."(故 송채림 씨 아버지) "우리 유가족 모임은 전부 동의해요. 전부 다 찬성입니다."(故 노류영 씨 어머니) "패륜이다, 이름을 공개하는 건 잘못된 거다, 우리한테 물어봤나요? 안 물어봤잖아요. 자기들끼리 상상해서 하는 얘기잖아요."(故 이지한 씨 어머니) 등 유족들 목소리도 본격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애도는 이름 속에 담겨져 있다
시민언론 민들레의 보도 취지를 다시금 밝히자면, 개인의 잘못이나 범죄 피해가 아닌 공적 안전 시스템의 문제로 발생한 대형 '사회 재난'의 희생자들이 그저 수치로 치환된 채 잊혀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의 사회적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적어도 이름을 찾아줌으로써, 공동체가 그들의 삶을 헤아리며 애도하고 재발 방지를 다짐하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랐다. 이는 전 세계 언론의 보편적 관행이고 지향이다.
당시 유족들을 하나하나 직접 접촉하기는 불가능한 조건에서 추모 대상의 개별성을 드러내고 상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이름을 공개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을 단지 차갑고 무미건조한 숫자가 아니라 얼마 전까지 실존했던 우리의 가족, 친구, 이웃으로, 따뜻한 피가 흐르던 하나의 삶으로 연상하고 공명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강남순 교수의 글을 빌면, "애도는 이름 속에 담겨져 있다"(mourning is in the name)는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애도란 오직 고유명사 '속에'(in the name), 고유명사와 '더불어'(with the name) 가능할 뿐이다.
필자에겐 155니 158이니, 숫자의 총합으로만 참사를 다루는 언론 기사들이 비인간적인 보도로 다가왔다. 극소수의 인간 같지 않은 일베 부류가 희생자들을 모독하며 뱉어낸 배설물들을 무분별하게 인용해서 마치 상당수 여론이 그런 것처럼 부풀려 선정적인 기사를 써내는 언론들이야말로 2차 가해자로 비쳤다. 그렇게 유족들을 위축시키고 고립시킴으로써 망자의 무명(無名)화, 실명(失名)화를 집요하게 밀어붙이고 참사의 후폭풍을 최소화하려는 정권의 프레임에 영합했다고 본 것이다.
분향소에라도 이름과 얼굴이 있었다면
한국기자협회 재난보도준칙은 '피해자 명단'에 관해 '당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되' '공식 발표가 늦어지거나 발표 내용이 의심스러울 때는 자체적으로 취재한 내용을 보도'하라고 돼 있다(제11조 공적 정보의 취급). 대규모 참사가 벌어져 그 많은 가족과 국민이 밤새 애를 태우는데도 언론은 왜 사상자 명단을 그때그때 파악되는 대로 병원 이송 현황과 함께 보도하지 않았을까. 필자 역시 20대 조카들이 혹시 현장에 간 게 아닐까 초조한 마음으로 다음날 확인 전화를 걸었는데, 많은 이들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희생자들이 44곳이나 되는 병원의 응급실과 영안실로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가족과 지인들이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참사 직후 정상적인 재난 보도의 일환으로 희생자 명단이 발표됐다면, 그리고 늘 그랬듯이 분향소에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제대로 된 사회적 애도가 이뤄졌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6일 연속 국화꽃만 바라보고 조문하며 정부 차원에서 희생자들을 은폐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유가족이 서로 원활하게 연결돼 협의체를 구성하고 위령비 건립 등 추모사업을 시작할 여건이 조성됐다면, 시민언론 민들레가 희생자들 이름을 밝히고 나설 이유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친민주당' 매체라는 한겨레의 자해극
이름 공개를 놓고 격분하다 못해 증오와 저주를 쏟아낸 분들에 대해 필자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혹시 희생자들이 핼러윈 축제에 간 것 자체를 떳떳지 못한 행위로, 그래서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여기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에 호명(呼名) 자체를 금기시하는 게 아닐까. 국가 또는 정부의 부재로 인한 죽음인데, 실은 참사의 원인과 책임이 희생자에게 있다고 의식‧무의식적으로 인식하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맞서려 하지 않고 반대 의견들을 경청하려고 했다. 시민언론 민들레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각종 경제지를 위시한 수구극우 매체들을 유사언론, 사이비로 간주하지만 진보 진영의 비판에 담긴 진정성을 간과할 순 없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언설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두 매체가 친민주당 성향이 강해 명단 공개가 정파적이라는 의심을 샀다. '희생자 명단'을 도구화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게 누구의 발언일까. 국민의힘 정진석? 권성동? 놀랍게도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이 쓴 칼럼 속 대목이다. 여당에서 명단 공개를 '민주당과 결탁해' '민주당이 사주해' 벌인 일이라고 연일 음모론을 퍼뜨렸는데, 한겨레 권태호 저널리즘책무실장 겸 논설위원이 <이태원 참사 명단공개, 어떻게 보십니까?>라는 글에서 똑같은 짓을 벌인 것이다.
과거부터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보수 진영에 의해 친민주당 매체로 규정되고 정파적이라고 매도당하던 대표적인 언론사가 다름 아닌 한겨레 자신이 아닌가.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등 진보 또는 리버럴 정권이 집권할 때마다 늘상 '친여 매체', 이들이 야당일 땐 '친야 매체'로 수식돼온 한겨레가 누워서 침을 뱉자는 것일까. 시민언론 민들레의 에디터와 필진을 출신 언론사별로 분류하면 한겨레 출신이 가장 많으니 민들레를 차라리 '친한겨레' 매체라고 하면 말이 된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이런 해명을 굳이 해야 하나 참담하기까지 한 심정이지만 보수-진보를 막론한 매체들의 유사한 낙인찍기가 반복돼서 한 번쯤 언급하자면, 시민언론 민들레 구성원들은 철저히 독자적인 내부 논의와 치열한 고민 끝에 해당 보도를 결정했다. 필자는 에디터이자 편집인이고 명단 공개 기사를 대표 작성한 집필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재명 대표 및 그 측근이라는 사람들과 일면식조차 없고 명단 공개 사전 사후에 민주당 측 인사 그 누구와도 이 일로 만남은커녕 전화 한 통, 문자 한 건 주고받은 일이 없다. 대표이사를 비롯해 민들레 구성원 모두가 그러하다.
하다 하다 '친유시민' 매체라는 표현까지 빈번히 등장하던데, 필자는 2005년 국회 출입 기자 시절 이후로 지난 17년 간 유시민 작가를 우연히 마주친 적도 없다. 유 작가는 민들레의 칼럼 기고 요청에 다른 30여 명의 필진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응했을 뿐이고 그게 전부다.
한겨레의 어떤 가치와 주장이 민주당과 비슷하면 한겨레가 친민주당 성향이라 정파적으로 도구 노릇을 하는 건가. 전형적인 '비방적 명명'과 '우물에 독 뿌리기'에 해당하는 비형식적 논리적 오류인데, 어떻게 이런 치졸한 수법을 한겨레가 구사할 수 있는지 황당함을 넘어 기괴하기까지 하다. "애도의 뜻보다 정치적 목적이, 적개심이 스며 있다고 느끼는 게 나만의 일일까?"(홍세화 칼럼) "친민주당 매체가 유족 동의 없이 참사 희생자 명단을 공개하며 헛발질한다"(한겨레21 김소희 칼럼) 등등 발상 수준이 참으로 졸렬하다.
한겨레의 길 vs 민들레의 길
그렇다면 필자는 한겨레가 '친정의당' '친금태섭' '친김해영' '친비명계' 매체임을 논거하는 사례들을 길게 나열하려고 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조국 사태, 추윤 갈등, 검찰 수사권-기소권 분리 등 결정적 국면마다 보였던 '친윤석열검찰' 보도 행태로 인해 '비호감도 1위 정당' 정의당과 마찬가지로 진보개혁 성향 시민들에게 얼마나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는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한겨레 구성원들이 다 권태호 실장이나 홍세화 장발장은행장과 같은 사고 수준이리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필자도 아직까지 집에서 유일하게 구독하는 신문이 한겨레다. 그러나 한겨레의 행보를 인내하며 지켜본 시민들의 좌절과 회의감이 갈수록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음에도 이 신문은 변화할 기미가 별로 안 보인다. 그래서 시민언론 민들레가 태동하게 된 한 이유이기도 하다. 뭐가 됐든 한겨레는 한겨레의 길을 계속 가면 된다. 다만 "친민주당 성향" "정파적" "희생자 명단을 도구화"와 같은 비열한 선동은 삼가는 게 좋겠다.
덧붙여, 권태호 실장은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의 '피플링'(peopling)을 마냥 부러워만 하지 말고 희생자들에 대한 '사람 냄새 나는 기사'를 자사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힘써주기를 바란다. 그 많은 기자 인력을 갖추고 왜 여태 희생자 158분의 유족들을 모두 접촉해 제대로 된 '사연 취재'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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