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 신뢰 회복과 해병대 명예를 위해서라면
혐의 삭제할 게 아니라 사단장 혐의 적시해야
"관운이 좋은 것인지, 누가 도와주는 것인지…"
지난 21일 국방부 직할 국방조사본부가 고 채수근 상병 사망 사건과 관련해 임성근 해병 1사단장의 혐의를 삭제한 채 경찰에 이첩한 것을 두고, 군의 한 관계자가 기자에게 푸념하듯 던진 말이다. 이 관계자는 그러면서 지난 4월 해병대 1사단에서 일어난 경계 실패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난 4월 28일 임 사단장이 지휘하는 해병 1사단에서는 자신을 국군 방첩사령부(옛 기무사령부) 소속이라고 사칭한 민간인이 2시간 30분 넘게 사단을 누비고 다닌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비업체 대표로 알려진 민간인은 경광등을 설치한 차량을 타고와서 위병소 해병대원들도 오인해 신원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민간인은 사단을 누비고 돌아다닌 것도 모자라 임 사단장과도 10여분간 단독으로 만나 우엉차를 마시면서 면담까지 했다. 임 사단장 역시 그가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는 군사 격언을 무색게 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경계 근무에 소홀했던 병사 2명은 감봉 등 징계, 지휘 책임이 있던 간부 2명 등은 경고 처분을 받았지만, 임 사단장은 상급 부대로부터 별다른 징계를 받지 않았다. 해병대 관계자에 따르면 사건 당일 부대 행사로 손님도 많았다고 한다. 임 사단장도 충분히 오인할 만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손님까지 접대한 당사자에게 가벼운 징계조차 없이 넘어갔다는 것은 국민들도 쉽게 납득하긴 어려워 보인다.
경계 실패에 대한 군의 그동안 대응만 봐도 그렇다. 같은 사안은 아니지만, 단적인 예가 2019년 북한 목선 경계 실패 사태다. 당시 합참의장, 지상작전사령관, 해군작전사령관이 경계작전 태세 감독 소홀로 엄중 경고를 받았고, 평시 해안경계태세 책임을 지고 8군단장이 보직해임됐으며, 23사단장과 해군 1함대 사령관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2021년 북한 남성의 '헤엄귀순' 당시에도 경계 실패 책임을 물어 22사단장을 보직해임하고 8군단장에 엄중 경고 조치가 내려졌다.
그만큼 경계 실패에 대해 군은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왔다. 아무리 후방 부대라고 하지만 민간인이 부대를 2시간 30분 가량 누비고 사단장까지 만나서 독대를 했다는 것은 단순한 사고로 넘어갈 사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만약 민간인이 사단장을 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국가 안보에 중차대한 위기가 생겼을 일이다. 합당한 징계를 통해 군기를 잡고 정밀진단을 통해 경계 실패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해야 한다는 게 국민의 기대일 것이다. 하지만 임 사단장에게 그런 일은 없었다.
채 상병 사건도 공교롭게 피해가는 1사단장
아무 관련 없는 별개 사안이고 관련지어 볼 필요도 없지만, 공교롭게 채 상병 사망 사건도 임 사단장에게만큼은 비슷한 모양새로 흘러가고 있다. 해병대 수사단은 2주간의 수사에서 사건 관계인과 참고인 등 90여 명의 진술서를 확보하고, 980여 쪽의 수사기록을 남겼다. 박정훈 전 수사단장(대령)은 이 같은 조사를 통해 현장 지도를 나온 임 사단장의 현장 질타로 예하 지휘관이 부담을 느껴 무리하게 허리 아래 입수를 지시해 사망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임 사단장 등 8명에 대해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이첩하겠다고 보고 했다. 해병대사령관, 해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이 모두 결재를 마쳤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경찰 이첩 보류 지시가 내려왔고, 그 사이 국방부의 혐의자 및 혐의 삭제 종용이 이뤄졌으며, 해병대 수사단 수사기록을 재검토한 국방부 직할 국방조사본부는 끝내 임 사단장의 혐의를 삭제한 채 경찰에 사건을 이첩했다. 당초 조사본부의 재검토 명분은 해병대 조사 결과가 경찰 수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조사본부가 사단장 혐의를 '삭제'함으로써 수사하지 말라는 일종의 '가이드 라인'을 만들어준 셈이 됐다. 익명을 요구한 현직 수사관은 "경찰이 사단장을 수사할 수 있지만, 혐의를 빼서 보냈다면 실무적으로 수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가이드 라인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이 있어서 안 된다는 '무죄추정' 법언을 모르는 수사당국 관계자는 없을 것이다. 임 사단장 혐의를 단정할 필요도 없다. 다만 수사 경험이 풍부한 대령급 수사단장이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않고, 군형법에서도 엄하게 다스리는 항명으로 입건되면서까지 초동수사 결과를 그대로 (임 사단장을 포함해서) 경찰에 넘긴 것은 병사 사망과 지휘 라인의 지시 간에 상당한 인과 관계가 있는 만큼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전제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상급부대에서 오히려 더 철저하게 따져볼 만한 사안이다.
그동안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임 사단장에 대한 수사 자체는 불가피해보인다. 임 사단장은 현장에서 부대원 안전보다는 빨간옷 착용과 경례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부대원들이 일렬로 서서 작업하지 말고 4인 1조로 찔러가며 바둑판식 수색 정찰을 하라고 질책했으며, 이는 '사단장님 지시'로 현장 지휘관들에게 전파됐다. 이 같은 지시가 현장 지휘관들이 허리 높이까지 무리한 수색을 추진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게 해병대 수사단의 당초 판단이었다. 게다가 임 사단장은 해병대원이 입수한 보도 사진을 보고받고 칭찬하기도 했다. 사단장 지시가 없더라도 군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무리한 수색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암묵적으로 조성된 셈이다.
또한 합참 단편명령에 따르면 당시 현장의 작전통제권한은 임 사단장이 아니라 육군 50사단장이었다는 사실도 최근 추가로 밝혀졌다. 단편명령은 특정 사안에 대해 지휘관이 수시로 지휘하는 명령이나 지시 사항이다. 군 관계자는 "단편명령을 어길 경우, 지시 불이행으로 징계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임 사단장의 현장 수색 작전에 대한 지시는 상급 부대에 대한 지시 불이행이자, 작전통제권한이 있는 50사단장에 대한 월권 행위로, 직권남용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
해병대사령부도 이점에 대해 수사 초기부터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 전 수사단장에 따르면 김계환 해병대사령관은 수사 초기였던 지난달 22일 자신 집무실에서 박 전 수사단장에게 '1사단장이 X팔리게 합참 단편명령 운운하면서 책임을 피하려면 직권남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라'는 취지로 말했다. 박 전 수사단장은 지난달 26일 임 사단장에게 사령관의 말을 전했고, 임 사단장은 면책 주장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조사가 진행됐다.
하지만 3주가 지난 현재 임 사단장은 진술을 번복하고 합참 단편명령상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사단장의 혐의까지 삭제됐다. 그러면서 임 사단장이 이명박 정부 청와대 시절 김태효 현 국가안보실 1차장과 근무 인연으로 혐의가 삭제된 것이라는 의혹만 점점 짙어지고 있다. 애초에 제기했어야 할 업무상과실치사와 직권남용 혐의 등에 대해 국방조사본부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으면서, 급기야 박 전 수사단장의 법률 대리인인 김경호 변호사가 22일 임 사단장을 직권남용과 업무상 과실치사로 경북경찰청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고발은 박 전 수사단장의 뜻으로 전해졌다.
실제 경찰 수사가 이뤄질지 지켜봐야겠지만, 이미 '대통령실 개입설'까지 불거진 상황에서 정부 기관의 조사를 믿기는 어려운 상황으로 보인다. 전날 채 상병 사건 현안보고 및 질의를 위해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는 한미 연합훈련을 이유로 핵심 관계자들이 모두 빠진 채 '반쪽짜리'로 진행됐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커졌지만, 의혹의 핵심 당사자인 임 사단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관련된 의혹 제기에 대해 전면 부인했지만, 국방위 이후 의혹은 더 불어난 양상이다.
무엇이 국방부 장관의 결재를 뒤집고, 사단장 혐의까지 삭제하게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국방부 설명을 전부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원칙없이 사건 처리를 할수록 국민들의 대군 신뢰와 수사기관 신뢰만 추락하고, 해병대 명예만 실추시킬 뿐이다. 사단장 혐의를 경찰에 이첩한다고 사단장이 당장 옷 벗고 전역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혐의가 없다면 신속한 경찰 수사를 통해 진상이 명명백백히 밝혀지는 게 하루 빨리 유가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사단장 본인과 해병대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 될 수 있다.
임 사단장은 지난달 28일 해병대사령관에게 "책임을 통감하고 사단장으로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처음 이 발언이 알려지면서 온라인에선 "멋지고 참된 군인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보기 힘든 군인이다"라는 응원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태원 참사부터 오송 지하차도 참사까지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보낸 찬사로 해석된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임 사단장에게 그런 응원을 하지 않는다. 할 이유도 없다.
왜 그런 반응이 나오는지는 임 사단장뿐만 아니라 국방부 고위 관계자들과 그 위에서 보고받는 이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종섭 장관은 전날 국방위에서 해명을 하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하다가, 민주당 이재명 대표로부터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이렇게 자꾸 말씀하는데, 본인이 생각해도 변명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지적당했다. 이 장관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찰나에 스쳤다.
맞는 지적이다. 변명처럼 보이는 일을 그만두면 해결될 문제다. 장관은 자기 결정을 번복하고, 사단장은 자기 말을 번복하고, 조사본부 군사경찰은 동료 수사관의 수사기록을 번복하고, 누가 봐도 의심이 드는 상황이다. 지금 군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것인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가 목숨을 잃은 지 한 달이 넘었다. 그런데 수사기관에 넘겨져야 할 수사기록은 '재검토'라는 이유로 국방부에 20일 가까이 묶여 있었다. 부디 해야할 일을 하고 걸어갈 길을 걷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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