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계 귀국길에 공항 빠져나와 판문점행 월북
정치적 망명 주장하면 체류여부 북 판단에 달려
미 국방부, 북 인민군쪽에 연락했으나 무응답
중재해줄 스웨덴 외교관 평양에 없어 난감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미 해군 오하이오급 핵추진 탄도탄미사일 잠수함 ‘켄터키’가 부산에 기항한 18일, 미국 제1기갑사단 소속 정찰병 트래비스 킹(23) 이등병이 판문점을 통해 자진 월북했다.
“심각한 외교문제” 당혹스런 미국
북미간에 외교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난 이 주한 미군 병사의 월북과 북한의 억류가 심각한 외교문제(serious diplomatic problem)를 야기하고 있다고 <가디언>이 20일 미 하원 군사위원회 소속 민주당 애덤 스미스 의원의 말을 빌어 보도했다. 스미스 의원은 “미군 병사가 북한에 억류될 경우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그를 귀환시키는 것”이라고 <CNN>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러나 미국이 취한 연락에 대해 북한 쪽은 아직까지 아무런 회신도 하지 않고 있다.
매튜 밀러 미 국무부 대변인은 19일 “(미국) 국방부가 어제 북한 인민군 쪽에 연락을 취했으나 아직 아무런 회신도 받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밀러 대변인은 백악관과 국방부, 국무부가 합동으로 킹 이등병의 안전과 소재지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고 말했으나, 아직 킹 이등병의 월북 동기와 그의 소재지 등에 관한 아무런 정보도 입수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1962년 이후 첫 미군 자진 월북
킹 이등병의 월북은 1962년 이후 자진해서 북한으로 넘어간 첫 미군 월북 사건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경색되고 있는 가운데, 대북 핵 확장억제 공약의 일환으로 42년만에 미국 핵무장 잠수함이 부산에 기항하면서 이에 반발한 북한이 탄도탄 미사일 2발을 발사하는 등 한반도 안보정세가 한층 더 긴장될 기미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터져나온 킹 이등병 월북 사건의 파장이 어디로 얼마나 번져 나갈지 국제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 순환근무 중 폭행 등으로 처벌
미국 위스콘신 주 러신 출신의 트래비스 킹은 2021년 1월에 입대해 텍사스 주 포트 블리스에 있는 미 육군 제1기갑사단 제1여단전투단 제1기갑연대 제6대대에 배속돼 한국 순환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해 10월 폭행과 경찰차 파손죄로 기소돼 한국 법원에서 500만원의 벌금형과 함께 2달간 구류처분을 받고 감금돼 있다가 17일 텍사스 포트 블리스로 복귀하게 돼 있었다. 킹 이등병은 17일 인천공항 보안검색대를 통과해 귀국길에 오른 듯했으나 바로 뒤에 공항을 빠져 나와 다음 날인 18일 판문점 민간인 투어 그룹에 들어갔다. 그가 공항을 어떻게 빠져 나와 판문점 투어 그룹에 들어갔는지 그 경위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게 없다.
미군 당국은 그가 타기로 돼 있던 비행기가 텍사스 공항에 도착한 뒤 내리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실종 사실을 파악했다.
<AP 통신>에 따르면 킹 이등병은 서울의 나이트클럽에서 주먹으로 남자를 때려 기소됐으나 피해자가 그의 처벌을 원치 않아 법원에서 기각처분을 받은 적도 있다. 그는 텍사스 포트 블리스로 복귀한 뒤 제대 조치와 함께 다른 징계조치를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그 며칠 전 어머니에게 포트 블리스로 돌아가게 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의 가족은 그가 평소 조용히 혼자 있는 편이며, 술 담배도 하지 않고 성경 읽기를 좋아했다고 말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그는 미국과 한국의 국방훈장을 받기도 했다.
분계선 넘을 때 큰 소리로 “하하하”
18일 판문점에 민간인 투어 그룹의 일원이 돼 나타난, 짙은 회색 셔츠를 입고 모자를 쓴 사복 차림의 킹 이등병은 공동경비구역에서 미군과 한국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투어객들이 일종의 짧은 ‘자유시간’을 갖던 중에 갑자기 비무장지대 분계선을 넘어 북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투어 그룹의 일원이었던 뉴질랜드인 관광객은 그가 그때 큰 소리로 “하하하”하고 웃으며 달려갔다고 말했다고 <CBS> 뉴스는 전했다. 그 순간 현장의 미군(유엔사) 등이 “저 사람을 붙잡아라”하고 외쳤으나 그는 몇 초만에 분계선을 넘어 달려갔다.
“계획적으로 허가 없이” 월북
미 인도태평양사령부의 존 아퀼리노 제독은 “(킹 이등병이) 공동경비구역의 비무장지대의 분계선을 넘어가 북한사람들에게 붙잡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NBC> 뉴스는 전했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18일 킹 이등병이 “계획적으로 허가 없이” 월북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 병사 중에 계획적으로 허가 없이 투어 그룹에 들어간 한 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는 것뿐”이라며 아마도 킹 이등병이 북에 구금돼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북한과 다른 나라 정부들에게 (그 일과 관련해) 연락을 취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이번 사건과 관련해 유엔사와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고만 말했다. 따라서 북한과 미국, 한국이 이 문제로 소통을 하고 있는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
뜻밖의 돌출적 사건, 그 파장은?
군법 전문 변호사들은 북에 간 킹 이등병이 자신을 정치적 억압과 박해를 피해 온 합법적인 망명자라 주장할 경우, 그의 북한 체류 여부는 북한 지도부가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리프 에릭 이즐리 이화여대 교수(국제관계학)는 북한 김정은 체제가 미국 시민을 장기 억류할 경우 뒤따를 수 있는 책임문제들 때문에 킹 이등병을 오래 붙들어 둘 것 같지 않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다른 전문가들 중엔 자진해서 북으로 간 현역 군인인 킹 이등병을 쉽게 돌려 보낼 것 같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북미간 외교관계가 없는 상황에서 미국은 이제까지 유사 사건의 경우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스웨덴의 외교관들에게 관련 영사업무를 대신해 주도록 요청해 왔으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평양을 떠난 스웨덴 외교관들은 아직 북한으로 복귀하지 않았다.
트래비스 킹 이등병의 돌발적인 월북사건은 경색되고 꼬인 북미 및 남북관계를 더욱 꼬이고 위태롭게 만들 가능성도 있지만, 그의 월북 동기와 귀환의사 여부를 확인하고, 나아가 귀환을 위한 교섭을 벌이는 과정에서 없던 외교적 통로가 생겨나면서 양쪽의 대응 여하에 따라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관계전환의 새로운 계기가 마련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뜻밖의 돌출적인 사건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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