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한국 사회 민주화와 평화통일 위해 헌신"

노혜경 "내 20대 지배한 스승, 한 분씩 떠나간다"

제자들 "고려대 사학과, 강만길 계신 곳이라 선택"

"값싼 '은하수' 피던 애연가…학점은 후하게 안줘"

 

역사학자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23일 별세했다. 향년 90. 사진은 2016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제1차 포럼에서 축사하는 강 교수 모습. 2023.6.23 [연합뉴스 자료사진]
역사학자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23일 별세했다. 향년 90. 사진은 2016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제1차 포럼에서 축사하는 강 교수 모습. 2023.6.23 [연합뉴스 자료사진]

한국 역사학계의 ‘큰 산’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23일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생전의 선생을 존경하고 따랐다. 선생은 평생을 민족사학과 분단사학 연구에 바치고, 무엇보다도 실천하는 지식인의 표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선생이 부름을 받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이 추모 행렬에 나섰다. 어떤 사람은 선생을 추억했다. 어떤 사람은 벌써 그리워했다. 또한 어떤 사람은 다짐했다. 23~24일 페이스북 등 SNS에는 그런 글들이 차고 넘쳤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4일 오후 페이스북에 “한국 역사학계의 거목 강만길 교수님이 별세했습니다. 고인이 남긴 큰 족적을 기리며 영면을 기원합니다. 유족에게도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교수님은 시대를 꿰뚫는 역사인식과 실천적 지성인의 표상이었습니다. 역사의 진보에 대한 굳은 신념과 실천으로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하셨고, 참여정부 때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장과 광복6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장을 맡아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앞장서셨습니다.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추념의 글을 올렸다.

김민웅 촛불행동 상임대표는 “선생님은 식민지 사관과 격투를 벌이고 우리 안의 허위의식과 마주해 역사적 진실을 탐색하는 길을 열어나가셨다”며 “그래서 많은 이들이 깨어났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는 선생의 평생 화두는 결국 ‘통일’이었음을 상기하며 “분단체제의 극복이 곧 민주주의이자 자주이며 생명”이라고 강조했다.

김준혁 한신대 교수는 “역사를 공부하고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는 연구자인 나에게 강만길 교수님은 큰 스승이었다”며 “잘못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역사학이 분단현실을 넘게하는 통일을 위한 역사학으로 실천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오롯이 교수님이셨다”고 회고했다. 그는 “교수님의 못다 이룬 일을 조금이라도 나아가게 하기 위해 계속 세상속에서 노력하고자 한다”고 다짐했다.

노혜경 시인은 “나의 20대를 지배했던 스승들이 한 분씩 한 분씩 떠나가신다”는 글로 선생과의 석별을 아파하며 “분단시대를 마무리하는 것을 못 보고 가시는 마음은 언제나 공부 시작하시던 그때가 아니었을까”라고 자문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자신의 책 “<현대 한국 지성의 모험>에 “선생을 역사 안에 갇혀 있던 지식인이 아니라 역사 밖으로 걸어 나와 그 역사와 대결했던 용기 있는 지식인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며 “역사는 결국 바뀌고야 만다는 선생의 가르침은 제게 위로와 용기를 안겨줬다”고 밝혔다.

주진오 상명대 명예교수는 “역사학자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교수님은 몸소 보여주셨다.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으로 눈을 크게 뜰 수 있었다”며 “마음 속 스승님들이 떠나신 그 자리를, 어떻게 메울 수 있을지 아득하다”는 소회를 적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 페이스북
문재인 전 대통령 페이스북

주강현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 분단시대의 진실을 밝혀내면서 역사학의 실천성을 한평생 몸소 보여주신 역사학자 강만길 선생의 서거를 애도한다”며 “이제 편하게 영면하시고, 서방정토로 잘 가시길”이라고 빌었다.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은 “(선생이) 1978년 펴낸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은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지 사학을 극복, 새로운 역사관을 우리에게 심어주었다”며 이집트 여행중 우연히 만난 선생을 떠올렸다. 그때 선생은 대학 입학을 앞둔 최 이사장의 딸에게 “내가 너처럼 일찍 이집트를 와 보았다면 나의 역사관이 달라졌을 것"이라면서 "정말 잘 왔다"는 격려의 말을 했다고 한다.

제자와 후학들도 생전의 선생을 떠올렸다. 기억의 한 조각을 더듬어보기도 했다. 학교에서 교수와 학생이라는 인연으로 만난 제자만 있지 않았다. 선생의 저서를 읽고 스스로 제자가 된 사람도 많았다.

한창민 노무현재단 대전세종충남 공동대표는 “20대,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를 통해 균형적인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다”며 “선생님께서 민중사학의 길을 열어줘 청년들이 역사에 눈을 떴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유동환 건국대 교수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선생님의 명쾌한 논리와 굳건한 의지의 강의를 듣고 많이 느꼈다”며 선생의 영면을 빌었다.

선생에 대한 존경의 마음은 세대를 뛰어넘었다. 고려대에서 한국 고대사를 전공한 신수진 씨는 “한창 면접을 보러다닐 때 존경하는 분으로 긴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던 분. 시대도 다르고 스승의 스승뻘이지만 저의 역사관은 대부분 학사 논문부터 선생님의 족적을 따라간 시간 속에서 나왔습니다. 감사했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80년 서울의 봄’ …고려대생들이 학교 밖으로 진출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80년 서울의 봄’ …고려대생들이 학교 밖으로 진출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선생을 추모하며…“나는 참 괘씸한 제자였다”

“졸업을 앞두고 당시 도서관장을 맡고 계신 상황에서 관장실로 찾아뵌 적이 있다. '선생님 어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노동조합쪽 일을 할려고 합니다. 한국노총 쪽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실 수 있을지요?' 이렇게 부탁드렸었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좀 지나 한국노총 섬유노련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되었다. 내 일로 찾아뵌 후로 다시 직접 찾아뵙지는 않았으니 나는 참 괘씸한 제자다. 하지만 항상 좋아하고 존경했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가장 점잖으시고 생활에는 소박하시고, 뜻과 일에 군더더기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오신 삶을 존경하며 별세 소식에 슬픔을 어쩌지 못하고 이렇게 맘을 토로해 봅니다.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박영삼 씨, 고려대 사학과 졸업)

“저는 선생님의 수업을 듣지 못했습니다. 제가 입학한 81년도에는 선생님께서 해직된 상태였고, 졸업할 때까지 복직하지 못하셨습니다. 그저 먼발치의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재일사학자 강덕상 선생님을 통해서였습니다. 강덕상 선생님이 1985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수유리 여운형 선생 묘소 앞에서 두 분이 반갑게 해후하셨고, 서로 간의 안부를 확인하셨습니다. 막걸리를 나누시며 해직 덕분에 한국근대사와 현대사를 집필할 수 있었다며 서로를 격려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규수 일본 히토쓰바시대 교수)

 “대학 시절 제자로서 한평생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애쓰셨던 강만길 선생님 빈소에 들려 조문 하려 한다.” (김남수 고려대 민주동우회 회장)

“1984년 2학기에 해직에서 풀려 복직하셨고 불성실한 학생이었기에 수강신청을 하고도 몇번 수업을 들었을 뿐이다. 한가지 기억나는 것은 수업을 하시다, 아마 3.1운동이었던 것 같다, Movement와 Sports를 똑같이 ‘운동’으로 번역해 놓았다고 쓴 웃음을 지으셨던 장면이다. 하지만 강 선생님은 당신의 자서전인 <역사가의 시간>을 통해 ‘공부’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다. 당시 박사과정에 들어가 학위를 따서 호구지책에 이용하려던 내게 부끄러움을 알게 해주셨고 적어도 강 선생님이 이루어 놓으신 학과에서 학위를 따려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하셨다.” (반철진 씨, 고려대 졸업)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강만길 교수님은 김재규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지식인 선언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성북서에 연행되어 오셔서 한달 이상 제자들과 같이 고초를 겪으시고 대학에서 해직되셨다. 경찰서 즉결 대기실이라는 최악의 환경에서도 선비의 기개를 잃지 않으셨던 굳건한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명식 씨, 고려대 행정학과 졸업)

“고딩 시절 강만길 선생의 <한국근대사>를 보고 고대 사학과로 직진했으니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졸업을 하고도 한참 지난 2007년 5월 금강산에서 선생을 뵐 기회가 있었다. (…) 1980년대 형편 좋은 학생들은 ‘솔’을 사서 피울 때 애연가였던 선생이 그보다 값싼 ‘은하수’를 즐겼던 점도 특이했다. 학점을 후하게 주는 편이 아니어서 강의가 인기 있지는 않았지만 그 때 고대 사학과 학생들과 졸업생들은 모두 선생을 존경했다. 우리의 자랑이었다. 한 시대를 짊어지고 거인이 퇴장한 느낌이다.” (조근호 씨,  고려대 졸업)

“1983년 3월에 복학을 했다. 두어 달 다니고 제적되었기 때문이다.(…) 어두웠던 시절 미숙한 청춘을 북돋아주고 뜻을 세우게 도와주셨던 선비같은 선생님들이 그립다.” (엄주웅 씨, 고려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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