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투쟁 중요하지만 선거‧제도정치에 성패 달려

프랑스 연금 개악, 거대한 시민 투쟁도 막지 못해

칠레, 커지는 극우파 반동 흐름…한국 상황과 흡사

태국에선 민중 지지에 진보적 행동전진당 대약진

튀르키예, 야권 연합에도 에르도안과 차별화 실패

윤 정부 폭주 맞설 대중 투쟁-제도정치 결합 절실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프랑스 남부 니스에서 열린 연금 개혁 반대 제9차 시위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가면이 보이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헌법 제49조3항을 사용해 하원 표결을 건너뛴 채 연금 개혁을 추진하자 이에 항의하는 전국적 시위와 파업이 잇따르고 있다. 2023.03.23 로이터 연합뉴스
프랑스 남부 니스에서 열린 연금 개혁 반대 제9차 시위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가면이 보이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헌법 제49조3항을 사용해 하원 표결을 건너뛴 채 연금 개혁을 추진하자 이에 항의하는 전국적 시위와 파업이 잇따르고 있다. 2023.03.23 로이터 연합뉴스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선거와 제도정치, 그리고 대중 투쟁과의 관계의 문제는 항상 고민거리다. 기본적으로 대중의 직접 행동과 참여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선거와 제도정치가 가지는 중요성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지난 반년 넘게 진행돼 온 프랑스 연금 개악 반대 투쟁을 봐도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다.

프랑스 시민의 압도적 다수가 연금 개악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주요 노동조합 연맹들이 다 같이 힘을 모아서 강력한 파업과 시위를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무려 300만 명이 참가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크롱 정부의 연금 개악은 현재 입법과 의회 절차를 거쳐서 통과되고 시행될 상황이다.

마크롱 정부는 야당이 복잡하게 분열돼 있고 좌파의 힘이 부족한 의회 내의 세력 균형을 이용해서 표결 없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예외 조항이나 정부 불신임안과 법안을 연결시키는 방법 등을 이용해 개악을 성공시켰다. 또 거대한 집회와 시위에 경찰력 강화와 폭력적 진압으로 맞불을 놓고 있다.

거대한 투쟁이 낳은 초라한 결과에 대한 좌절감 속에서 인종주의적 극우인 르펜의 국민전선에 대한 지지율이 오르는 현상도 나타났다. 국민전선은 ‘비프랑스인에 대한 복지 지출을 줄여서 연금 재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선동을 하고 있다. 제도정치에서의 난점이 대중 투쟁의 성과와 전진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소야대 속에서도 윤석열 정부의 폭주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는 야당들을 보면서, 다가오는 총선에서 어떤 대응과 전략이 필요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도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에 칠레, 태국, 튀르키예 등에서 있었던 선거 결과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고민점과 교훈들을 던져주고 있다.

먼저 지난 5월 초 칠레 제헌의회 선거에서는 매우 안타깝게도 극우파가 급성장하고 집권 좌파 정부가 참패하고 말았다. 소수자 혐오를 선동하는 극우 공화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며 우파연합이 전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됐다. 진보좌파는 개헌 저지선조차 지키지 못했다.

이는 2019년부터 시작된 거대한 대중 투쟁의 물결 속에서 진보좌파가 다수인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이 당선해 급진좌파 정부가 집권하면서 이제 진보적 헌법으로의 개헌이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던 사람들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쳤다.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가운데)이 6일(현지시간) 수도 산티아고 대통령궁에서 내각·참모 인사안을 발표하고 있다. 현지 언론은 기존 좌파 일색이었던 각료들의 정치적 성향이 조금 더 중도적으로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2022.09.07. EPA 연합뉴스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가운데)이 6일(현지시간) 수도 산티아고 대통령궁에서 내각·참모 인사안을 발표하고 있다. 현지 언론은 기존 좌파 일색이었던 각료들의 정치적 성향이 조금 더 중도적으로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2022.09.07. EPA 연합뉴스

그런 희망은 소멸하면서 투쟁과 승리의 물결은 그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지난 3년간의 세계적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칠레도 전염병 위기가 경제 위기, 고물가, 실업 증가로 연결된 게 문제였다. 집권 좌파정부는 경험과 능력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의회에서 우파연합의 방해와 비협조에 시달렸다.

한편으로, 우파는 경제 위기와 사회 혼란, 실업 증가의 책임을 좌파 정부의 이민정책 탓으로 돌렸다. 미등록 이민자들이 칠레인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논리였다. 더불어 좌파 정부가 추진한 최저임금 인상, 40시간 노동제, 소수민족 권리 보장이 ‘나라를 무너트리고 있다’며 공포 마케팅을 했다. 또 좌파 인사들의 개인적 흠결과 비리를 잡아내서 정부를 흔들었다.

반면 진보좌파 세력은 전통적인 노동, 임금, 일자리에 대한 요구를 더 중시하는 세력과 젠더, 인종, 이민의 문제를 더 중시하는 세력들의 갈등이 커졌다. 보리치 정부가 너무 급진적이어서 문제라는 세력과 너무 온건하고 타협적인 게 문제라는 세력들도 갈라졌다. 촛불 이후 5년간 한국에서 벌어진 일과 흡사하다.

이 모든 것은 거대한 투쟁을 통해 기회가 열리고 개혁적 정부가 들어서도 여전히 수많은 과제가 남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득권 세력은 얼마든지 진보적 개혁을 가로막고 실패하게 만들 수 있고, 그것이 낳는 실망을 이용해 권력을 되찾아갈 수 있다. 투쟁과 제도화의 균형을 찾으며 이를 피해갈 수 있는 단순하고 쉬운 정답과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5월 14일 있었던 태국 선거 결과는 칠레와 달리 그나마 희망적이다. 여기서는 군주제를 기반으로 독재를 펼쳐온 군부 집권당이 패배했다. 이들은 하원 500석 중에서 고작 76석밖에 얻지 못했다. 152석을 얻어서 제1당이 된 것은 청년세대에 기반한 진보 정당인 행동전진당이다. 징병제 폐지, 동성결혼 합법화 등 이들의 진보적 공약은 큰 호응을 얻었다.

전진당은 더 나아가 왕실모독죄 폐지(또는 개정)를 주장하며 군주제의 신성불가침에도 도전했다. 이런 입장 때문에 행동전진당의 전신인 미래전진당은 군부에 의해서 이미 한 차례 강제 해산된 바가 있다. 마치 한국의 통합진보당이 종북으로 몰려서 강제 해산됐다가 진보당으로 부활하고 있는 것을 떠오르게 한다.

한편 141석을 얻은 제2당은 태국 전 총리였던 탁신의 딸 패통탄이 이끄는 프아타이당이다. 프아타이당은 한국의 민주당과 비슷하게 친서민적 정책들을 강조하지만 진보적이기보다는 타협적이고 특히 군주제에는 도전하지 않으려고 해 왔다.

그럼에도 태국의 군부와 기득권 세력은 이 정도의 개혁조차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탁신 전 총리를 쿠데타로 몰아냈고, 나중에 그의 여동생이 선거에서 승리하자, 또다시 쿠데타로 제거했다. 그러자 이제 그의 딸이 다시 나선 셈이다.

이와 같은 가문세습 정치를 좋게 봐주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태국의 민중들이 군부에 맞서 탁신과 프아타이당에 기대를 걸고 지지해 왔다는 점이고, 이런 흐름이 오랫동안 태국 정치에 주요 변수였던 거대한 ‘빨간셔츠’ 운동의 배경이었다. 하지만 태국 민중은 이제 탁신의 그림자를 넘어서 더 왼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동력이 된 것은 2020년 태국을 뒤흔들었던 거대한 반군부 대중투쟁(‘세손가락 혁명’)이다. 이를 바탕으로 1당이 된 전진당은 프아타이당 등 7개 야당에게 연정을 제안한 상태이지만, 아직 집권 가능한 의석수인 375석을 넘지 못하고 있다. 상원 250석을 선거도 없이 군부가 가져가도록 만들어 놓은 황당한 제도 때문이다.

전진당은 중도 정당들과 연정을 위해서 진보적 공약들을 철회하고 군주제에 타협해야 할 상황이다. 설사, 이런 타협으로 연정을 구성해도 문제는 남는다. 이미 두 번이나 쿠데타로 선거 결과를 짓밟았던 군부가 이번에도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군부는 언제나 그렇듯이 또 프아타이당과 전진당 정치인들의 각종 개인 비리들을 끄집어내 자신들을 정당화할 것이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대선 승리를 확정 지은 28일(현지시간) 지지자들이 정의개발당(AKP) 연합 사무실 밖에서 환호하고 있다. 이날 튀르키예 최고선거위원회(YSK)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대선 결선투표 승리를 공식 발표했다. 2023.05.29. AP 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대선 승리를 확정 지은 28일(현지시간) 지지자들이 정의개발당(AKP) 연합 사무실 밖에서 환호하고 있다. 이날 튀르키예 최고선거위원회(YSK)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대선 결선투표 승리를 공식 발표했다. 2023.05.29. AP 연합뉴스

대중 투쟁의 성과를 제도정치로 연결하는 것은 이처럼 항상 수많은 타협이 뒤따르면서도 위태로운 과정일 수밖에 없다. 태국과 같은 날 대선 1차 투표가 있었던 튀르키예는 또 다른 결과와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이들이 친러시아냐 친서방이냐를 주시했지만, 여기서는 21년 동안 이어진 에르도안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끝내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군부를 청산하고 개혁한다며 집권했던 에르도안과 정의개발당은 이제 권위주의적 철권통치로 변질돼 있다. 그는 ‘5개의 갱단’이라 불리는 대기업들과 결탁하고 군대, 사법부, 언론을 모두 자신의 직할기구로 만들어버렸다. 소수민족인 쿠르드족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고 틈만 나면 쿠르드 지역을 폭격하며 공포 정치에 이용했다.

하지만 얼마 전 대지진으로 5만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지면서 이번에는 에르도안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다. 에르도안에 맞선 것은 공화인민당의 클르츠다로을루 후보였는데, 공화인민당은 온건한 개혁정당으로 역시 한국 민주당과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반에르도안 전선으로 뭉친 6개 야당 연합의 대표 후보였다는 데 있다.

이 야당 연합에는 억압받는 쿠드르족과 연대하는 좌파 정치세력인 인민민주당도 포함돼 있었다. 제3당까지 올라갔던 인민민주당은 에르도안에 의해 테러 조직으로 낙인찍히고 강제 해산 과정에 있었기에 이번에 ‘녹색좌파당’의 틀을 이용해 선거 운동에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야당 연합은 1차 투표에서 승리하지 못했고, 결국 5월 말의 결선 투표에서도 에르도안이 승리하면서 장기집권을 이어가게 됐다. 기대를 허물며 에르도안이 철권통치를 지속하게 되면서 튀르키예에서 정권 교체와 진보적 개혁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인민민주당 간부 4000여 명이 투옥돼 있을 정도로 극심한 에르도안의 폭압 통치와 친정부 대형 언론들의 적극적 지원 속에서 공정한 선거 경쟁이 이뤄질 수 없었다는 점을 봐야 하지만, 클르츠다로을루 후보와 공화인민당은 에르도안과 차별화되는 개혁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 사실이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부부가 재선에 성공한 지난 28일 수도 앙카라의 대통령궁 앞에서 지지군중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2023.5.28. UPI 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부부가 재선에 성공한 지난 28일 수도 앙카라의 대통령궁 앞에서 지지군중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2023.5.28. UPI 연합뉴스 

공화인민당은 친서방 이미지로 튀르키예 민중들의 거부감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1차 투표 패배 이후에는 우파 지지자들과 타협하기 위해 반이민 선동을 하고 쿠르드족 탄압에도 동조하는 주장을 내놓으면서 ‘도대체 에르도안과 다를 게 뭔가’라는 반응까지 불러왔다. 쿠르드족에 대한 지독한 혐오와 편견 속에서 인민민주당도 ‘테러 조직’의 낙인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2013년 ‘탁심 광장 점거 투쟁’ 이후에 이렇다 할 대중 투쟁이 없었던 튀르키예에서 선거연합만으로 에르도안을 몰아낼 수는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대중 투쟁과 제도정치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반동적 우파에 맞서서 어떤 정치적 대안이 필요한가? 무엇을 위한 선거연합과 타협이 필요한가? 칠레, 태국, 튀르키예의 경험은 윤석열 정부에 맞서며 대안을 찾는 사람들에게 많은 고민점과 교훈들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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