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 신냉전, 판을 바꾸자] ① 샌프란시스코 2.0 체제

글 싣는 순서
1. 샌프란시스코 2.0 체제
2. 북 미사일 소동, 우크라이나 제2전선?
3. 사쿠라 다시 피나-새로운 한ㆍ일 유착
4. 샌프란시스코 1.0 체제
5. 저돌적인 대미 투항
6.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는 미국이 지배하는 제국주의 조직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다. 냉전이 낳은 이 정치적·군사적 괴물을 해체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원적인 필요조건이다. 얼마전까지 약체화하고 있어서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2019년에 (나토)동맹이 ‘빈사상태’에 있다고 선언했다. 유감스럽게도 러시아의 범죄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나토는 되살아났다. 스웨덴과 핀란드 등 중립국들은 이제 나토에 가맹하기로 했다. 유럽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규모도 커졌다. 2년 전에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거친 압력에 저항하며 군사예산 증액을 부결시켰던 독일은 최근 재군비를 위해 1천억 유로를 지출하기로 결정했다. 서서히 쇠퇴해 가다가 어쩌면 소멸해 버릴지도 모를 상태에 있던 나토를 구해 준 것은 푸틴이다.”

잡지의 좌담기사를 읽다가 미셀 레비(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명예연구부장)의 이 말에 꽂혔다. 나토의 동방 확장으로 인한 러시아 안보위기야말로 우크라이나를 칠 수밖에 없게 만든 요인이라고 했던 푸틴 대통령의 주장과 어긋나 보이지만, 어쨌든 나토는 기력을 되찾았고 유럽에 대한 미국의 장악력은 더 커졌다.

그런데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르첼로 무스토(뉴욕대 교수, 사회학)의 다음과 같은 얘기였다.

“걱정해야 할 것은 이미 러시아군의 박해를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나토로부터 무기를 받고 주둔지가 돼 버리는 일일 것이다. 워싱턴(미국)의 면면들은 러시아의 항구적인 약체화와 유럽의 미국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의존의 확대를 바라고 있을 것이고, 주둔지화한 우크라이나는 워싱턴을 위한 장기간의 전쟁에 내몰리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완전하고 정당하게 지키겠다는 목적은 달성할 수 없게 될 것이다.”(<세카이(세계)> 2022년 10월호)

그렇다면 우리가 바로 우크라이나의 미래라는 얘기? 우리야말로 외부의 무기를 받고 그들의 주둔지가 된 지 70년이 더 지나도록 그들에게 의존하며 아직도 북의 동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 붓고도 자국 군대의 전시작전통제권마저 외국에 내맡긴 채 걸핏하면 주변의 도발과 전략에 휘둘리고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전쟁 걱정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지 않은가.

그 외국, 즉 미국은 유럽에선 우크라이나를 앞세워 러시아와 열전을 벌이고 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새로운 냉전을 벌이고 있다. 서방은 자유민주시장 체제와 전체주의 간의 싸움을 대결과 진영 결속의 명분으로 삼고 있지만, 이념보다는 경제와 첨단기술을 둘러싼 패권전쟁에 가깝다. 일찍이 중국과 소련 사이를 떼어놓음으로써 소련과의 냉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헨리 키신저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중국과 러시아가 손잡게 만들면 위험하다고 경고했지만, 지금 미국은 그 길로 가고 있다. 소련을 대신한 중국이 미국과 대치하는 새로운 냉전이다.

2차대전 뒤 미국이 마셜 플랜으로 유럽의 경제를 되살리고 구축한 안보동맹이 나토였고, 그 동아시아(아시아태평양)판이 미일동맹 중심의 샌프란시스코 체제(강화조약+안보조약)였다. 이를 위해 미국은 패전국인 일본의 전쟁범죄를 눈감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지원을 통해 일본을 최대의 동맹국으로 키워 전승국 이상의 지위를 부여했다. 40년의 세월에 걸쳐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당하면서 끝까지 저항하며 싸웠던 한국(한반도)은 오히려 분단당한 채 처참한 전쟁까지 치른 사실상의 패전국 신세가 돼 미일동맹에 예속당했다.

신흥공업국 성장에 일본 갈라파고스화ㆍ미국 지위 흔들

FOIPㆍIPEFㆍ쿼드 등 샌프란시스코 체제 업그레이드 기도

이종원 교수 "냉전 논리로 동아시아에 새로운 분단 초래"

윤 정부, 이번엔 일본이 앞장선 지역분단 추진 적극 동조

일본 관함식에 해군 순양함 보내 욱일기 향해 거수경례하게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이 없었다면 남쪽 절반도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라며 미국을 은혜의 나라로 기리며 안도한다. 하지만 신라 통일 이래 1000년 이상 영토적 통합을 유지해 온 한반도를 아무런 동의절차나 통고도 없이 남북으로 가른 것이 미국이었고, 그것이 분단과 전쟁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어느날 영문도 모른 채 영영 헤어져야 했던 ‘1000만 이산가족’의 한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은 한민족 절반에겐 은혜의 나라가 됐을지 모르지만, 나머지 절반에겐 원수의 나라가 됐다. 그렇게 해서 갈라진 하나의 민족이 서로 70여년이나 싸우고 적대하며 소모당하는 비극적 구도가 우크라이나 중서부와 동남부 도네츠크, 같은 슬라브계인 러시아 사이에서도 재연될 수 있다.

2차대전 종전 뒤 다른 연합국들이 분단대상으로 지목한 것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패전국 독일을 동서로 분단하고 베를린을 여러개로 쪼개 분할 지배한 것은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한 응징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동아시아에서는 유럽에서처럼 다른 연합국들과 함께 한 전면강화가 아니라 연합국들간의 약속을 깨고 단독으로 일본과 강화조약을 맺고, 분할지배는커녕 전쟁책임도 제대로 묻지 않았다. 이는 일본을 미국 홀로 온전히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그 대신 한반도가 분단당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제질서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국제적 협정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이 지역의 냉전적 대립구조의 토대를 만들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샌프란시스코 평화회의 주최국인 미국의 전략적 이해와 정책적 우선순위를 충실히 반영했다. 이 체제는 미국의 지배적 영향력과 지속적인 군림, 즉 ‘팍스 아메리카나’를 보장했으며, 일본에 평화헌법과 더불어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주었지만, 대신 다른 동아시아 사람들과 국가들에는 영속적인 분열을 안겨 주었다.”(‘올바른 해결과 화해를 위한 열쇠들: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하라 기미에 캐나다 워털루대 교수.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2022 수록)

한국이 전쟁으로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1951년 9월에 그 전쟁을 계기로 해서 체결되고 그 다음해 4월에 발효된 지 이제 70년이 지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여전히 굳건하다. 그 버팀목의 하나였던 동서 냉전이 붕괴된 지도 30여년이 지났지만 한반도에서 인도차이나에 이르기까지 전범국 일본을 제외한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을 분열과 전쟁으로 내몬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지금도 탄탄하게 작동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직후에 도쿄의 미 점령군사령부(GHQ)에서 미국 주관 아래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이 시작됐다. 이는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한 뒤인 1965년에야 타결된 한일협정(기본조약과 그 부속조약인 청구권협정)이 바로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산물임을 말해 준다.

2019년 7월 아베 신조의 일본 자민당 우익정부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를 확정한 한국 대법원에 불만을 품고 한국이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며 첨단 소재 부품장비 수출을 제한하고 화이트 리스트에서 빼버린 근거가 바로 1965년 한일협정이고 그 모법이라 할 샌프란시스코 조약이었다. 하지만 일본 우익정부의 주장은 허구다. 그리고 그 강화(평화)조약에 한국과 중국은 애초에 초대받지도 못했다.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의 가장 큰 피해 당사자들을 빼 놓고 그들끼리 체결한 조약이 그들이 주장하는 국제법이라는 것의 근거다. 그것이 7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상하지 않은가.

샌프란시스코 체제 아래서 미국의 동아시아 교두보 일본의 하위계열로 편입돼 저임 노동과 근면을 토대로 기러기 편대처럼 성장한 것이 이른바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NICs)이었다. 나중에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미국의 인플레 없는 장기간 풍요를 보장해 준 중저가 제품 대량생산을 토대로 일어선 중국과 이들 신흥공업국들의 힘이 급속도로 커지면서 우월적 관성에 젖어 있던 일본이 갈라파고스화하고 미국의 절대적 우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 1.0체제에 빨간 불이 켜진 것이다.

미국과의 밀착 속에 8년 넘게 장기 집권한 우익 아베 신조가 이런 흐름을 막기 위해 추구한 것이 바로 무제한 돈을 풀어 좀비화한 기업들의 생명을 연장하는 이른바 ‘아베노믹스’고, 대외적으로는 인도와 호주, 영국까지 끌어들여 이른바 G2의 위치로 급부상한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FOIP(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이니 IPEF(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니 QUAD(쿼드)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샌프란시스코 2.0체제다. 결국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이같은 샌프란시스코 체제 업그레이드는 ‘신냉전’과 불가분의 관계다.

“이와 같은 논리에 근거한 ‘인도·태평양’ 구상은 냉전 논리를 토대로 동아시아 지역에 새로운 분단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샌프란시스코 체제2.0’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전의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미국 주도로 추진되고 일본이 수동적으로 반사적 이익을 향유했다면, 이번에는 일본 자신이 더욱 적극적으로 ‘신냉전’의 지역분단을 추진하고 있어서 지역에 미치는 영향은 한층 더 심각한 측면이 있다.”(‘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어디로?’ 이종원 와세다대 교수. 같은 책 수록)

문제는 이 샌프란시스코 2.0체제, 즉 신냉전 전략에 새로 출범한 한국의 보수우파 정권이 적극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출범 직후부터 한일관계를 ‘복원’하겠다며 부산을 떨면서 한국 대법원 판결과 이를 존중한 문재인 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 해법을 흔들어 놓더니 사실상 폐기된 ‘12·28 위안부 합의’까지 되살릴 기세다. 과거 욱일기를 단 일본 함정이 한국 해군의 관함식을 보이콧했는데도, 윤석열 정부가 일본 해상자위대 창설 70주년 기념 관함식에 해군 순양함을 보내 욱일기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게 만든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달 초 부총리 및 재무상으로 아베 신조 정권 2인자였던 아소 다로 자민당 부총재가 전격 방한한 데서도 엿볼 수 있듯이, 자민당 우익정부는 한국 정권교체를 크게 반기면서 샌프란시스코 2.0체제 강화에 적극 활용할 태세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 때 종결된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이나 동해 북한 어부 송환 등을 다시 끄집어내 전 정권과 그 관리들에게 용공 또는 친북 딱지를 붙이려는 듯 색깔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는 출범 직후부터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되살려 강화하는 등의 대북 강경행보와 맞물려 남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북한이 최근 며칠 사이에 30여발의 미사일을 쏘는 이상행동을 보인 것은 체제 안보 차원의 공세적 경고 외에 자기 존재감 과시도 있겠지만, 지금과 같은 신냉전 흐름 속에서 이른바 한미일 대 북중러 식의 동맹 내지 진영대결과도 얽혀 있을 것이라는 관측을 낳고 있다. 어쩌면 미국의 관심을 끄는 한편으로 우크라이나의 제1 지원세력인 미국의 힘과 집중도를 흐트러뜨리기 위한 ‘제2전선’ 구축 시도는 아닐까.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말의 냉전시대에 그런 사례가 있었다. 그 뒤 반세기가 더 지난 뒤 출현한 신냉전 시대의 제2전선이라면, 우리는 형태만 바꾼 또다른 냉전의 구렁텅이 속으로 굴러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 해상자위대 주최로 6일 가나가와현 사가미만에서 열린 국제관함식에서 한국 해군 장병들이 거수경례하고 있다. 한국 해군은 이번 관함식에 최신예 군수지원함 '소양함'(1만1천t급)을 보냈다. 연합뉴스
일본 해상자위대 주최로 6일 가나가와현 사가미만에서 열린 국제관함식에서 한국 해군 장병들이 거수경례하고 있다. 한국 해군은 이번 관함식에 최신예 군수지원함 '소양함'(1만1천t급)을 보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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