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충돌하기 전에 한국을 먼저 '자극'
8년만 재개 예정 한일 공동군사훈련 무산
상황 판단 안이했거나 한국 너무 얕본 탓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 중국 급파
강성 발언 중국이 행동에는 왜 신중한가
사태 길어지면 일본 경제에 타격 심할 듯
대중국 강경파(China hawk)로 정평이 난, 거침없는 일본 민족주의자(outspoken nationalist)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중국의 화를 돋구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뿐 정해진 수순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취임한 지 “3주도 채 되지 않아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18일 보도했다.
지난 7일 국회 예산위원회 질의 응답 과정에서 중국의 대만 침공시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야당 국회의원 질문에, 대만 무력침공은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는 ‘일본의 존립위기 사태’에 해당한다고 한 다카이치 총리의 공개 답변이 야기한 중일 관계의 급냉 사태를 두고 한 얘기다.
8년만의 재개 예정 한일 공동군사훈련 무산
하지만 이번 ‘다카이치 파문’은 한일관계에서 먼저 시작됐다는 것을 <이코노미스트>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다.
일본 언론들은 일본 해상자위대와 한국 해군이 이번 달에 실시할 예정이던 수색·조난구조 공동훈련에 한국 쪽이 불참 통보를 했다는 사실을 일본 방위성 관계자들을 통해 확인했다고 17일부터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 훈련은 2018년 동해상에서 북한 난파선을 구조하던 한국 해군 구축함을 향해 저공 근접비행을 강행하던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에 대한 레이더 투사를 둘러싼 양국간 공방과 함께 중단된 지 약 8년만에 재개될 예정이었다.
윤석열 정부에 이어 이재명 정부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일 ‘화해 무드’의 연장선에 있는 이 한일 공동 군사훈련은 일본 방위상으로는 10년 만에 지난 9월 한국을 방문한 나카타니 겐 전 방위상의 행보 등과 함께 ‘달라진 한일관계’를 상징하는 주요행사 중 하나였다. 다카이치는 총리 취임 전 자민당 총재 당선 뒤에 야스쿠니 신사 가을 정기 대체 참배를 포기했고, 취임 기자회견에서 한국 김과 화장품,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걸 어필할 정도로 “양호한 한일관계” 유지에 신경을 쓰는 듯했다.
‘블랙이글스’ 독도 주변 비행 문제삼은 일본
하지만 일본은 이달 초순에 예정돼 있던 한국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의 오키나와 나하 일본항공자위대 기지 급유 계획을 취소해 버렸다. 이유는 10월에 블랙이글스가 ‘일본 고유 영토 다케시마(독도)’ 주변을 비행했다는 것이었다.
블랙이글스는 이번 달에 중동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에서 열릴 예정이던 에어쇼에 참가하기 위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나하 자위대 기지에서 중간 급유를 받고 싶다며 일본에 지원을 요청했고, 일본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그야말로 달라진 한일관계를 과시할 수 있는 호재였다. 그런데 블랙이글스 비행단 항공기들이 10월에 독도 주변을 비행한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돌연 계획을 취소했다.
한국은 지난 13~15일로 예정돼 있던 도쿄의 ‘자위대 음악 마쓰리(축제)’ 참가를 보류한 데 이어 일본 해상자위대와의 수색·조난구조 공동훈련에도 불참하겠다는 통보로 맞대응했다.
뜨악해진 일본 방위성 관계자는 한국의 공동훈련 불참은 “연기된 것”이라며 “재조정 여지가 있다”면서 군사교류 재개를 기대했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18일 이와 관련한 기자들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진 않겠다”며 “다양한 레벨의 의사소통과 안전보장협력 틀을 통한 협력, 교류를 계속하면서 일한, 일미한 제휴를 유지, 강화해 나가겠다”고 했다. 알맹이 없는 모호한 답변이다.
하지만 일본의 그런 낙관론은 섣부른 것일 수 있다. ‘영토(독도)문제’가 걸린 한일간의 ‘다카이치 효과’가 중일간의 그것보다 오래 갈 수도 있다.
일본정부는 8월에도 한국 조사선의 독도 주변 해양조사활동을 문제삼아 강력 항의했다. 일본 외무성은 8월 16일 가나이 마사아키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김장현 주일 한국대사관 정무공사에게, 그리고 이세키 요시야스 주한 일본대사관 정무공사는 김상훈 외교부 아시아태평양 국장에게 각각 ‘독도는 역사적·국제법적으로 일본 고유 영토’라며 항의했다고 밝혔다.
상황판단 안이했거나 한국 얕본 탓
다카이치 정권 출범 뒤 일본의 이런 항의는 자신들이 반겼던 한국 블랙이글스 급유를 취소하고 약 8년 만에 재개된 공동 군사훈련을 날려버릴 만큼 과감해지고 더 완고해졌다고 해야 할까. 물론 블랙이글스에 대한 급유 취소가 한일 공동 군사훈련 무산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상황 판단이 안이했거나, 한국이 그렇게까지 나오진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면 한국을 너무 얕본 것이다.
문제는 다카이치 총리나 고이즈미 방위상보다 다카이치 정권을 만들어낸 일본 정치, 사회 우익 내셔널리즘의 발흥이다. 지난 15~16일 실시된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서 다카이치 내각 지지율은 69%를 기록했다. 이는 10월 21일 다카이치 내각 출범 며칠 뒤인 25~26일 실시된 조사 때의 68%보다 높다. 일본사회가 바짝 긴장하고 있는 중국과의 마찰을 부른 다카이치의 국회 답변 이후에 지지율이 더 올라간 것이다.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 베이징 급파
중국정부는 18일 베이징을 찾은 가나이 마사아키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과 중국 외교부 류징송 아시아국장이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모습을 공개했다. 회의는 평행선을 달린 모양이지만, 애국적 이미지의 인민복 차림을 한 류 국장이 양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뻣뻣한 자세를 취하고 가나이 국장은 그 옆에서 고개를 수그리는 듯한 모습을 찍은 동영상은 사태의 주도권을 중국이 쥐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중국 안팎에 전파했다. 일본 외무성은 가나이 국장의 베이징 방문은 다카이치 총리의 국회 답변 이전에 조정을 거친 정기적인 협의를 위한 것으로, 이번 사태와는 무관하다고 해명했으나, 더 이상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서둘러 파견했다는 느낌을 준다.
전날인 17일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21일부터 열리는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할 리창 총리와 다카이치 총리의 회담은 “예정에 없다”고 했다. 예정에 없다는 걸 굳이 강조한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중국은 22~24일 베이징에서 열기로 돼 있던 민간 NPO(비영리단체)법인 ‘언론 NPO’ 주최 ‘도쿄-베이징 포럼’까지 무산시켰다. 포럼의 중국쪽 실행위원회는 “다카이치 총리가 대만문제에 관해 도발적인 발언과 무력위협을 했다”며 “중국이 엄중하게 항의한 뒤에도 잘못된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국간 “정상적인 교류협력 분위기”가 손상됐다며 연기를 결정했다고 16일 통보했다. 같은 이유로 중국에서 공개될 예정이던 애니메이션 영화 ‘크레용 신짱’ 최신작 등 일부 일본영화 상영도 금지시켰다.
강성발언 중국이 행동에는 신중한 이유
그런데 묘하게도 지난 14일에 중국에서 공개된 애니메이션 영화 ‘귀멸의 칼날’ 최신작 수입이 이미 4억 위안(약 820억 원)을 넘어서는 히트를 기록하고 있다며, 정치 풍향에 민감한 중국 SNS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봐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영화는 정치와 무관하다”는 의견들이 엇갈리고 있다고 <마이니치신문>은 전했다.
그러면서 이 신문은 중국정부의 ‘분노’를 외면하듯 중국인들의 일본여행은 계속 늘고 있다며, 올해 방일 중국인 수는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전인 2019년보다 많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것이라고 했다.
관영 <환구시보>는 17일 “중국 공민은 일본방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사설을 싣는 등 방일 자제 분위기를 만들어 중국인들이 당의 의사에 따르는 모습을 연출하려 하고 있으나, 의도대로 되고 있지는 않는 모양이다.
이에 대해 <마이니치>는 중국인들의 일본방문이 생각만큼 줄지 않고 일본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끄는 것은, 경제 장기 불황이 이어지는 지금 중국에서 그것이 관련 업계에 숨통을 틔워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봤다. 한 여행업자는 “이제 큰 손실을 걱정해야 한다”며 당국의 조치를 못마땅해 했다고 전했다.
중국정부가 다카이치 발언에 강경한 자세를 취하며 강성발언을 이어가고 있지만 대일 대화 창구를 완전히 닫진 않고 있고, 자국민에게도 방일 자제를 촉구하는 정도로 실제행동엔 신중한 것도 경제에 끼칠 영향 등 대일관계를 악화시킬 경우 초래될 득실을 면밀히 계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태 장기화되면 일본 경제타격 만만찮을 것
중국언론들은 “일본의 주가가 급락했다” “중국인 여행자가 대폭 줄면 손실이 눈덩이” 등 연일 중국인들의 일본방문 자제로 일본이 경제적 곤란을 당하고 있다는 뉴스를 전하고 있다. 마이닝 대변인은 “다카이치 총리는 (‘독도 문제’로) 한국의 분노도 사고 있다”며 한국까지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다카이치와 그 뒤의 일본 극우세력을 고립시키려는 중국의 이런 움직임을 일본언론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선전선동)로 치부하면서도,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일본경제에 적지않은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 걱정하고 있다.
일본 관광청 발표를 인용한 <일본경제신문>(닛케이) 18일 기사에 따르면, 올해 1~9월 748만 명을 기록한 일본방문 중국인들의 소비액은 1조 6443억 엔(약 15조 원)이고, 일본방문 외국인 전체 소비액은 6조 9156억 엔(약 65조 원)으로, 중국인 소비액이 전체의 약 4분의 1을 차지한다. 중국인 소비액을 연간 소비로 환산할 경우 약 2조 엔(약 19조 원)이 되는데, 이는 2019년에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던 1조 7704억 엔(약 16조 원)을 능가한다. 여기에다 일본방문 홍콩인들의 1~9월 소비액 4021억 엔(약 3조 8천억 원)까지 합하면 2조 원이 넘는다.
일본방문 외국인들의 소비액은 일본 국내총생산(GDP) 통계에서 서비스 수출로 계상되는데, 올해 1~9월 방일 외국인들 전체 소비액 6조 9156억 엔(약 65조 원)을 재무성 무역통계상의 같은 기간 주요 수출품목 액수와 비교하면, 완성품 자동차 12.8조 엔(약 120조 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것으로, 반도체 등 전자제품 수출액 4.7조 엔(약 44조 원)보다 훨씬 더 많다.
일본, 한국과의 관계 악화 피하려 하겠지만…
다이이치생명 경제연구소의 신케 요시키 연구원은 “(중국의 조치가) 얼마나 계속될지에 따라 영향은 달라진다”며 “장기화해 일본방문객 수요가 내려가면 경기에 약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사태를 두고 일부에서 2016년 사드(고고도 탄도요격미사일체제) 배치 이후 중국이 한국에 대해 취한 ‘한한령’에 비견되는 ‘한일령’이라 일컫는 이유다. 일본으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한국과의 관계까지 틀어지면 최악이다.
다카이치 정부로서도 한국과의 관계 악화는 어떻게든 피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대만 유사시에 대한 다카이치 총리의 국회 답변이 그렇게 나온 것은 다카이치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위험성을 알면서도 그렇게 답변할 수밖 없는 일본 상황 또는 구조 탓이 더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극우 정치인 다카이치가 집권당 총재가 되고 총리가 된 것부터 그렇다. 일본이 대만을 자국 이익선 내의 땅으로 보거나 독도를 자국 영토라 주장하고, 일본의 과거 잘못은 제한적이며 그마저 이미 다 청산했다고 주장하는 ‘수정주의 역사관’이 일본 조야를 지배하고 있는 한 ‘다카이치 발언’은 언제고 다시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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