긋고 삐침에 붓을 뒤집어 머물고 나아감

글월의 의미에 작가의 정서를 칼로 새긴듯

진위 구별하며 몸으로 익힌 서도의 정화

함세웅 독선생 너머 서예 인생 60년 집대성

이동천 서예전 '천상운집'에 출품된 작품들.
이동천 서예전 '천상운집'에 출품된 작품들.

이정(二井) 이동천 서예전 ‘천상운집’이 17~26일 열흘간 서울 명동 갤러리1898에서 열린다. 이동천이 누군데, 뜬금없이 서예전을 소개하는가. 함세웅 신부의 서예 선생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가 지은 책을 일별하면 어떤가. ①<이동천의 위서체 천자문>(1995), ②<진상: 미술품 진위 감정의 비밀>(2008), ③<미술품 감정비책>(2016), ④<신서예>(2023). ①은 중국 위나라 때 일가를 이룬 서체로써 천자문을 재구성하였다. ②, ③은 미술품의 진위를 감별하는 방법과 실제를 집대성했다. ④는 역대 명필을 연구하여 ‘전번필법’이라는 비법을 발견한 성과를 기록하였다. 함 신부의 독선생이라 함은 겉보기요, 서예로 시작하여 필묵의 진위 감정을 거쳐 서도로 돌아온 실사구시의 역정이다.

 

대도무문. 왼쪽은 이동천, 오른쪽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작품. 
대도무문. 왼쪽은 이동천, 오른쪽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작품. 

이번 전시는 그가 체득한 시서화의 요체를 드러내 펼친 셈이다. 어려서 연필보다 붓을 먼저 손에 익혀, 열 살 무렵 왕희지 필법의 조형 원리를 간파하고 고교 재학 중 각종 서예대회를 석권하여 천재를 인정받았으니, 그의 60년 서예 인생을 모두 보여준다고 해도 망발이 아니다. 특히 중국 서화 감정계의 태두 양런카이(1915~2008) 선생의 수제자로 서화 감정학의 정수를 익혔다. 펑치융에게서는 문헌고증학, 옌샤오샹한테는 고화 임모, 펑펑성한테서는 고서화 보존처리, 슝보치한테서는 전각을 사사한 바, 이들 역시 당대 최고 명사들이다. 그가 유학할 당시 중국에서는 박물관 수장품을 전수조사하여 수백 년에 걸쳐 양산돼 박물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던 가짜를 가려내는 지난한 작업을 거쳤다. 그는 이들 명사들이 고구와 토론을 거쳐 박물관 수장고에서 진위를 감별하는 현장에 직접 참여하여 그 방법을 전수 받았다. 

진위 감별이란 철저한 문헌고증과 보존상태 점검은 물론이거니와 무수한 임모를 거쳐 서화가의 붓놀림과 붓놀림이 내포한 손, 어깨, 몸놀림의 요체를 추체험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결과로 중국서화는 물론 그에 잇댄 한국서화의 요체를 한 퀘에 꿰기에 이르렀다. 전시 야전병원을 거친 의사에 비교할까. 

한국에 돌아와 배운 바를 펼쳤으니, 명지대, 서울대 등에서 미술품 감정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설파했다. 추사, 겸재, 단원 등 대가들의 소작이라고 알려진 작품들 가운데서 가짜를 가려내 논문, 저작 등을 통해 이를 폭로하였다. 그러나 위작을 진품으로 판정한 사계의 명사들, 그 아류로 구성된 메인스트림으로부터 이단아로 치부되었다. 대학 강단에 뿌리를 내려 자리 잡지 못하고 보따리 장사로 전전한 그의 이력은 우리나라 감정학계의 실태를 보여주는 증좌라 하겠다.

 

작품에 따라 같은 글자지만 다른 모양으로 드러난다. 
작품에 따라 같은 글자지만 다른 모양으로 드러난다. 
저서 '신서예' 출간기념회 때 직접 시연한 작품 일념통천. 묽은 먹을 써서 붓의 놀림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저서 '신서예' 출간기념회 때 직접 시연한 작품 일념통천. 묽은 먹을 써서 붓의 놀림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이에 실망한 그는 한때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각종 옥션에 매물로 나온 물건 가운데 평가절하되었거나 출처, 전거가 미확인된 것을 골라 제자리 매김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고려시대 유일한 수묵화 <독화로사도>의 발굴. 상하가 길쭉한 조선시대의 족자와 달리 족자의 위아래 공간이 좁은 고려시대의 화풍이라는 점, 근-중-원경 등 세 공간이 중첩된 3단구조가 700~1050년 중국에서 유행한 풍경화의 전형이며, 나무와 바위의 표현이 각각 북송 때 화가 미불(1051~1107)과 문인 소식(1037~1101)의 화풍이라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물론 그의 주장은 메인스트림으로부터 외면받았다. 함 신부의 독선생이 된 것은 자신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해당한다.

그는 요즘 유튜브를 통해 ‘신서예’를 몸소 선보이고 있다. 뭔고 하니, 자신의 서예 작품과 그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 시현하는 방식이다. 먹을 머금은 붓이 종이를 쓸고 지나가며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처럼 크게 들린다. 무엇보다도 붓을 어떻게 쥐고, 어떻게 놀리는지가 적나라하다. 획을 긋고 삐침에 그의 붓은 중간에 한두 차례 뒤집혀 머물고 나아가며 글자가 가진 의미를 드러내고, 더불어 그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새겨넣는다. 이른 바 ‘전번필법’이다. 따라서 그의 글씨는 갑골문체, 예서, 행서, 전서 등이 일반인이 보기에 대중없이 섞여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이 한사람이 쓴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거나 글씨 선생의 교본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그런 탓이다.

전시에는 52점의 한자, 한글 작품에 선보인다. 동양고전, 성경에서 뽑은 경구 또는 자신의 인생관을 보여주는 성어가 대부분이다. 한자 한자에 붓놀림, 몸놀림이 담긴 바, 보는 이는 그 놀림을 따라 몸을 비비 꼬게 만든다. 전시장을 제대로 둘러보면 후줄근 땀에 젖는다. 주요 작품에는 QR코드를 붙여 동영상을 함께 볼 수 있도록 했다.

 

천상운집에 출품한 이동천의 작품. 붓아닌 칼맛이 나는 '이동천체'.
천상운집에 출품한 이동천의 작품. 붓아닌 칼맛이 나는 '이동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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