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파괴된 청춘』, 그 가해자들을 법정에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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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자들은 병역을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 말한다. 군은 ‘명예와 사기를 먹고 사는 집단’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신성한 의무를 추악하고 비열한 수단으로 활용한 것은 다름 아닌 군이 정권을 잡았던 군사정권이었다. 군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장병들의 사기를 바닥에 떨어뜨린 것도 바로 정치군인들이었다. 그들의 추악한 만행 중의 하나가 ‘녹화 공작’이었고 40여 년 뒤에 그 만행을 기록한 책이 『파괴된 청춘-강제징집과 프락치 강요 공작이 남긴 상처』 이다.
강제징집을 공식화하고 제도화한 전두환
반정부 투쟁에 앞장섰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대학생들을 끌고 가 군부대에 입영시킨 강제징집은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있었다. 이를 공식화하고 제도적으로 운용한 것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들어서였다.
법률을 준수하고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할 국방부와 교육부, 검찰과 경찰 등은 각종 법률과 절차를 깡그리 무시한 채 무고한 청년을 사실상 납치·감금했다. 가족에게도 입대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 부모가 실종 신고를 하기도 했다. 보안대를 비롯한 군부대는 폭행과 구타, 감시와 따돌림으로 심신을 괴롭히고 인간성을 파괴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녹화 사업’이란 이름으로 사상 전향 공작을 벌이고 프락치(정보망원) 활동을 강요했다. 명백한 인권 침해이자 헌법 위반일뿐더러 동료를 배반하도록 만드는 비인간적 범죄였다. 한국을 포함해 194개국이 비준한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정보를 알아내려고 압박하는 것은 전쟁 포로에게도 금지된다. 녹화 공작은 적군이 아니라 같은 국민을 상대로 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회유해 밀정으로 활용한 일제의 만행보다 치졸하고 악랄한 짓이었다.
강제징집자 2388명 중 대부분에게 강요된 프락치 활동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 등의 조사에 따르면 1970~80년대에 2921명이 강제징집돼 2388명이 프락치 강요를 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9명이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군 당국은 모두 자살이라고 발표했으나 상당수는 타살을 자살로 위장한 의혹이 짙다. 설혹 자살이 맞다 해도 자살로 몰고간 것은 군 당국의 책임이나 다름없다.
피해는 의문사 당사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생때같은 자식을 졸지에 잃어버린 부모는 두말할 것도 없고 형제와 자매, 친구, 동료 부대원 등 가까운 이들에게도 씻기 어려운 고통을 남겼다. 다행히 죽음을 면한 녹화 공작 대상자들도 고문과 폭행의 공포에 시달렸던 트라우마와 친구를 밀고했다는 자책감에 평생 괴로워했다.
‘파괴된 청춘’(원더박스 간)은 부제처럼 강제징집과 프락치 강요 공작이라는 반인륜적 국가 폭력이 우리 시대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희생자와 주변 인물들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짚어본 책이다.
피가 멎고 딱지가 앉은 환부를 다시 헤집어보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유사 범죄를 막아야 한다는 책무가 유족과 친구들의 입을 열게 했다. 저자 민병래는 1년 전부터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녹화 공작 과정에서 숨진 청년들의 삶을 재구성해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다. 더욱이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라는 황당한 일이 발생하자 언제 또 그 같은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부추겨 저자와 출판사로 하여금 서둘러 책으로 펴내도록 만들었다.
윤석열 내란이 오히려 출판 서두르게 한 군내 의문사 기록
1부에서는 희생자 7명의 이야기를 숨진 순서대로 실었다. 9명 중 이진래(1977년 서울대 제약학과 입학, 1982년 1월 2일 사망)와 최온순(1981년 동국대 수학교육과 입학, 1983년 8월 14일 사망)의 사연은 유족과 연락이 제대로 닿지 않아 담지 못했다.
정성희는 1981년 연세대 영·독·불 계열에 입학했다. 그해 11월 학내 시위 도중 연행되는 여학생을 구하려다 경찰에 붙잡혔다. 만 19세여서 징집 연령에 못 미쳤지만 신체검사와 입영명령서도 없이 강제로 입대했다. 성균관대 사학과 2학년이던 이윤성은 1982년 11월 가두시위에 나섰다가 연행돼 징집됐다. 아버지가 60세를 넘은 데다 2대 독자여서 6개월 보충역 대상이었으나 모든 절차와 기준은 무시됐다. 군 당국은 보안부대에서 조사받던 중 테니스코트에서 군화 끈으로 목을 매 숨졌다고 발표했다. 제대를 불과 8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1980년 고려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김두황은 1983년 3월 강제징집된 뒤 3개월 만에 죽음을 맞았다. 자살했다는 정황은 의문투성이였고 유서도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영현은 1981년 한양대 정밀기계과에 입학해 탈춤반과 야학 등에서 활동하다가 강제징집 대상자가 됐다. 보안부대에 끌려가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고 괴로워했다.
한희철은 1979년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해 가톨릭학생회, 성남YMCA 등에서 활동했다. 군에서 의문사하자 당국은 예비역 헌병대 소령인 아버지에게도 유서 원본을 주지 않는 등 진상을 감추는 데 급급했다. 1983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김용권은 카투사로 입대했다. 녹화 공작의 마수는 미군 통제에 놓여 있다고 해서 피해가지 않았다.
최우혁은 1984년 서울대 서양사학과에 입학했다. 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아 10주간 치료를 받자 아들의 장래를 걱정한 어머니는 입대를 권유했다. 군에서 분신자살한 것으로 발표됐으나 조사보고서는 뒤죽박죽이었고 심지어 유품도 엉뚱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아들을 사지에 몰아넣었다”고 자책하며 삶을 비관하다가 1991년 한강에 몸을 던졌다.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런 가해자들 이대로 두어야 하나
2부에서는 강제징집과 프락치 공작의 배경과 역사를 더듬어보며 국가 폭력의 실태를 고발하고 책임자들을 심판대에 올려놓았다. 부록으로 사건 일지와 진실화해위 조사보고서 일부를 덧붙였다.
진실화해위는 국가 책임을 인정했으나 지금까지 관련 부처 가운데 단 한 곳도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았고, 누가 어떻게 죽음에 관여했는지도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강녹진)는 지난달 24일부터 전국 19개 지역에서 동시 1인 시위를 열고 진상 규명과 가해자 처벌, 피해자 권리 보장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저자 민병래는 오마이뉴스에 ‘사수만보’(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란 제목으로 이름도 빛도 없이 의미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2019년 오마이뉴스 2월 22일상과 2020·2024년 ‘올해의 뉴스’ 게릴라상을 받았다. 2024년에는 ‘1923 간토대학살, 침묵을 깨라’로 제18회 임종국상 수상자에 뽑혔다. ‘호암미술관에 있는 아름다운 누리 문화재’와 ‘송환, 끝나지 않은 이야기’ 등의 저서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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