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적 합리성, 국익 부합 등 '4대 원칙' 천명
김용범 "시한 때문에 원칙 희생하는 일 없어"
교착 국면 타개에 이재명 대통령 진두지휘
베선트 미 재무에 "한국과 일본은 다르다"
"최대한 대출에 가깝도록 문안 작성 협상"
김민석 "한국민, 미 제안 수용 어렵다 인식"
한국과 미국이 관세 협상을 타결한 지 두 달 가까이 흘렀다. 그러나 후속 협상에서 대미 투자방식을 둘러싼 양국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어 언제 돌파구가 열릴지는 안갯속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전방위로 미국을 '설득' 중인 가운데, 핵심 쟁점의 윤곽만은 분명해졌다.
한미는 7월 31일 미국이 '일방적으로' 한국에 부과하기로 한 25%의 상호관세를 15%로 낮추고, 그 대신 한국은 조선 분야 1500억 달러를 포함해 3500억 달러(약 486조 원)의 대미 투자를 진행한다는 데 합의했고, 8월 25일 양국 정상이 백악관 회담에서 이를 확인했다.
이재명 정부, 대미 관세 협상에 '배수진'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아"
다소 이견이 있더라도 큰 난관은 없을 걸로 보였던 후속 협상은 한국민의 피땀이 어린 3500억 달러를 대놓고 빼앗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흑심'이 확인되면서 제동이 걸렸다.
미국은 총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와 관련해 △ 전액 달러 현금성 투자 △ 미국이 투자 대상 선정 △ 미국의 수익을 한국의 투자금 회수 전 50%, 회수 후는 90%의 수익 배분을 요구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설상가상인 건 이와 '유사한' 조건으로 일본이 먼저 미국에 굴복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상호관세와 자동차 관세를 15%로 낮추는 대신, 5500억 달러를 미국에 전액 현금성 자산을 투자하고 미국의 수익을 일본의 투자금 회수 전 50%, 회수 후엔 90% 보장에 합의한 것이다. 트럼프는 지난 4일 행정명령 서명을 통해 이 합의를 공식화했고 동시에 추가 세부 사항을 담은 양해각서(MOU)도 발표됐다.
일본을 굴복시키자마자 미국은 '일본을 따르라'고 우리 정부를 향해 전방위 압박에 나섰다.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전면에 나선 건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이 대통령은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합리성과 공정성을 벗어난 어떤 협상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좀 어렵다"면서 미국의 '부당한 요구'를 부각했다.
이에 하워드 러트닉은 미 상무부 장관은 일본과의 '불평등' 합의를 거론한 뒤 "유연함은 없다. 한국은 그 협정을 수용하거나 (인하 합의 이전 수준의) 관세를 내야 한다"고 위협했다. 대미 투자 3500억 달러 관련해 미국 요구를 거부한다면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내에선 지난 4일 미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솔루션 배터리 공장 한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미 이민 당국의 폭력적이고 반인권적 대규모 체포, 구금 사태와 맞물리면서 한국에서 반미 여론이 빠르게 확산하고 날로 증폭되는 양상이다. 그런 상황에서 미 싱크탱크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딘 베이커 선임 이코노미스트가 11일 홈페이지 글을 통해 "트럼프는 125억 달러의 수출을 보호하려면 3500억 달러를 내라고 한국에 요구하고 있다...트럼프가 요구하는 금액의 20분의 1만 가지고도 수출 감소로 피해 보는 노동자와 기업을 지원하는 데 쓰고도 훨씬 더 유리한 상황이 될 수 있다"고 밝혀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교착 국면 타개에 이재명 대통령 진두지휘
베선트 미 재무에 "한국과 일본은 다르다"
교착 국면을 타개하고 협상을 조속히 매듭짓고자 정부는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80차 유엔총회에 참석차 뉴욕을 방문 중인 이 대통령이 24일 주유엔 한국대표부에서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을 접견했으며,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뒤이어 베선트를 만났다. 이 대통령과 베선트 접견 내용은 곧바로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브리핑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안보뿐 아니라 경제 측면에서도 양국의 긴밀한 협력 관계가 동맹의 유지와 발전에 매우 중요하다. 안보 측면 협력이 잘 진행되고 있는데, 통상 분야에서도 좋은 협의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최대 쟁점인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와 관련해 "상업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양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전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미국과 일본의 합의가 있었지만, 한국은 경제 규모나 외환시장 인프라 등에서 일본과 다르다"며 "이런 측면을 고려해 협상이 잘 이뤄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일본의 외환보유고가 한국의 3배가 넘고, 기축통화국으로 미국 달러와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하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8월 말 현재 일본의 외환보유고는 약 1조3242억 달러로 5500억 달러는 약 42% 수준인 반면,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약 4163억 달러로 3500억 달러는 무려 약 84%에 해당한다. 이 대통령이 22일 자 로이터 인터뷰에서 "통화 스와프 없이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3500억 달러를 인출해 전액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며 한국과 일본은 상황이 다르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앞서 18일 보도된 미 시사잡지 타임 인터뷰에선 미국 협상안에 "내가 동의했다면 탄핵을 당했을 것"이라고 말해 '배수진'을 친 심정으로 대미 협상에 임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미 양해각서 중 '캐시플로' 성격 놓고 대립
"최대한 대출에 가깝도록 문안 작성 협상"
김용범 실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우리가 미국에 통화 스와프 문제를 제기한 자초지종과 관세협상 후속 협의에서 통화 스와프가 차지하는 비중, 그리고 우리의 대미 협상 원칙과 다른 주요 쟁점을 비교적 소상히 설명했다.
먼저 미국에 통화 스와프를 요구하게 된 배경에 대해 김 실장은 "(관세합의) 이후 미국이 양해각서라고 보낸 문서에 판이한 내용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우리는 3500억 달러 대미 투자액 중 대출이나 보증의 비중이 대부분으로 판단했고 이를 '비망록'에도 적어 뒀다. 그러나 미국은 추후 보내온 양해각서에 "캐시플로"(Cash flow)란 용어를 썼다는 것이다. 그는 "들여다보니 상당히 에쿼티(현금성 순자산)에 가깝게 주장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며 "그렇다면 우리나라 외환시장에 미칠 충격이 눈에 들어왔고, 이를 지금 미국에 지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 상황에 대해 김 실장은 "우리는 최대한 캐시플로를 론(대출), 개런티(보증), 투자 등 우리 식으로 구분해 규정하자고 하지만 미국이 응하지 않고 있다"며 "최대한 캐시플로가 대출에 가까운 속성을 가지도록 문안을 두고 협상 중"이라고 소개했다.
정부, 대미 관세 협상 '4대 원칙' 천명
"시한 때문에 원칙을 희생하는 일 없어"
우리 정부의 대미 협상 원칙과 관련해 김 실장은 △ 상업적 합리성에 맞고 △ 우리가 감내 가능하고 △ 국익에 부합하며 △ 상호 호혜적인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 등 4대 원칙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시한 때문에 그런 원칙을 희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달러 통화 스와프도 '무제한' 통화 스와프다. 그렇다고 이 문제만 풀리면 협상이 완전 타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게 우리 정부의 스탠스다. '무제한' 통화 스와프는 "필요조건"일 뿐 다른 부분들을 만족시킬 "충분조건"들도 여러 가지 있다는 것이다. 무제한 통화 스와프와 관련해 김 실장은 "그게 안 되면 (외환시장에) 충격이 너무 크다. 해결되지 않으면 도저히 다음으로 나가지 못하는 필요조건"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해결된다고 해서 당연히 미국이 요구하는 '에쿼티 형태로 3500억 달러 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충분조건도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최소한 그에 대한 미국의 해답이 있어야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통화 스와프를 말한 것이고, 충분조건까지 다 갖춰져야 어떤 사업에 얼마를 투자할 것이냐를 논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김 실장은 "(투자 규모가) 우리나라 현행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여야 하고, 필요하면 수출입은행법을 고치거나, 중요한 부담이라면 국회 보증 동의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상업적 합리성'을 갖추는 것도 충분조건 중 하나이며 투자금 회수 전 미국의 수익은 10%로 하는 우리 국익에 맞는 제안했다고 소개했다.
김용범 "무제한 통화 스와프, 필요조건일 뿐"
김민석 "한국민, 미 제안 수용 어렵다 인식"
이 말을 풀이해보면 △ 미국이 우선 무제한 통화 스와프를 '수용'해야 하고 △ 그 뒤에야 3500억 달러의 투자 대상을 선정할 수 있고 △ 투자 대상 선정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할 수 없고 함께 '논의'해야 하며 △ 투자금 회수 전 미국의 수익은 10%로 한다는 걸로 요약된다.
김 실장은 이와 함께 "쌀과 소고기 등에 대해 논의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며 "비관세 관련 부분은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전제다. 나머지 영역에서 실질적 논의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대통령 접견 때 베선트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 역시 한국이 미국에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며 '조선 분야에서 한국이 매우 중요한 파트너'라고 강조한 바 있다"면서 "통상 협상과 관련, 무역 분야에서 많은 진전이 있는 것으로 안다. 투자 협력 분야에서도 이 대통령의 말을 충분히 경청했고 이후 내부에서도 충분히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김 실장은 "긍정적인 방향의 접견이었다. 결과로 이어지도록 양국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 중요한 계기가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라고 덧붙였다.
김민석 국무총리도 24일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미국이 일본에 요구한 조건과 비슷한 조건을 한국에 요구하는 점을 거론하며 "협상팀뿐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서도 우리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인식이 있다"고 말해 한국 내 대미 여론의 악화 상황을 전했다. 또한 김 총리는 한국의 대미 투자 프로젝트가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의미 있는 진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비자 문제가 지난 7월 무역 협상에서 합의한 3500억달러 규모 대미 투자 펀드에도 불확실성을 드리우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총리는 한국에 중대한 재정 부담을 주는 합의안은 국회 승인이 필요할 수 있다면서 "협상이 내년으로 넘어가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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