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리더라도 최소한의 공정성은 있어야 하지 않나

정의감도 갖추지 못한 채 취재 시작하는 많은 기자들

기자가 되기 전에 저널리즘을 공부한 적은 없다. 대학에서의 전공은 경영학이었으니 언론과는 거리가 멀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함께 입사한 기자 중에 학부에서 언론을 공부한 동기는 한 명도 없었다. 내가 생각하던 기자의 이미지는 선비나 지사였는데 기자가 되고 보니 그건 허상이었다. 기자로 사는 동안에 불의를 보면 분노하는 정의감이나 약자에게 연민을 느끼는 측은지심으로 기자를 뽑았다면 기자가 되지 못했을 기자들도 많이 보았다. 오늘날 기자들이 기레기라 불리는 데는 채용시스템과도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기자가 되면 경찰서 출입하는 사건기자부터 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부터 내려온 관행이라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알려준 선배는 없다. 새벽에 일어나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할당받은 경찰서를 돌아다니며 형사들의 비위를 맞추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며 기삿거리를 찾는 게 정말 싫었지만, 기자로서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해준 첫 스승을 만난 것도 경찰서에서였다.

달동네가 있는 경찰서였다. 그날도 형사계의 당직반에서 접수된 사건들을 살펴보는데 간통 사건이 유난히 눈에 뜨였다. 동네 사람끼리 술에 취해서 또는 홧김에 저지른 우발적 사건이 대부분인 당직사건부를 뒤적이던 나는 간통 사건을 보고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버거운 사람들이 쯧쯧’ 하며 혀를 찼다. 그러자 바로 앞에 있던 아버지뻘 되는 형사가 ‘아이고, 우리 송 기자는 세상 공부 좀 더 해야겠네’라는 말을 불쑥 내뱉었다. 우리 둘은 눈이 마주쳤고, 늙은 형사는 젊은 기자 녀석의 심기를 건드려 봉변을 당하는 건 아닌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 형사에게 조용히 다가가 내가 모르는 세상 이야기가 있는 것 같으니 그걸 좀 들려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기자 눈을 뜨게 한 김건희 같은 늙은 형사

“가난한 동네라고 간통이 많은 게 아니요. 부자 동네에도 많거든. 게다가 돈 있는 사람들은 돈으로 여자를 사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가 있고 명예가 있으니 매춘이든 불륜이든 걸리면 잃을 게 많잖아. 그래서 안 걸리려고 돈을 많이 써요. 고급 룸싸롱에 가고, 보안이 잘 되는 호텔에 가고, 간첩들이 접선하듯 만나서 밀회를 즐기고, 심지어 해외로 나가서 만나기도 하고…”

늙은 형사는 가난한 동네를 변명하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지위나 재산이나 가진 게 많은 부자 동네 사람들은 내일도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많지만 가난한 동네의 사람들은 내일 살아 있어야 할 이유도 희망도 없다는 말로 들렸고, 대학을 갓 졸업한 나는 세상을 보는 눈이 뜨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경찰서에서 만난 그 늙은 형사는 햇병아리 기자인 내게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해준 나의 첫 스승이었다.

 

그때 만난 형사의 이름도 얼굴도 잊었지만 그때 그가 들려준 얘기는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서울의 소리> 이명수 기자가 윤석열 후보의 부인 김건희와 통화한 녹음을 폭로했을 때도 그랬다. 남자들의 하수구 문화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듯하던 김건희는 진보 진영에 비해 보수 진영에선 미투 사건이 덜 폭로되는 이유를 돈으로 설명했다. 돈을 챙겨주면 안 터지는데 돈을 챙겨주지 않으니까 미투가 터지는 거라고. <조선일보>가 ‘걸 크러쉬’라며 구름 태워 띄우던 김건희의 그 설명에 피식 웃음이 나오며 초년병 시절에 경찰서에서 만난 늙은 형사 생각이 났다.

진보 정당에선 성 비위 사건 2차 가해가 공식이라는 사설

잊고 있던 그때의 일을 <조선일보> 사설이 다시 떠올리게 해주었다. 조국혁신당이 성 비위 사건 처리를 둘러싸고 내분이 생기자 사설에서 평소 ‘인권’과 ‘젠더 감수성’을 강조하는 이른바 ‘진보’ 정당에서 성 추문이 끊이지 않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며, 대부분 상급자가 하급자를 상대로 하는 권력형이고,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하면 당은 은폐·무마를 시도하고 그래도 피해자가 저항하면 2차 가해를 하는 것은 이제 거의 공식처럼 돼버렸다고 비난했다. 물고 뜯을 호재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조선일보는 신이 나 있었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성 관련 사건은 성능 좋은 AI 로봇이 입력된 매뉴얼대로 처리해도 후유증이 남는다. 인간미가 없는 AI 로봇이 피해자의 마음까지 헤아려가며 토닥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국혁신당은 성 비위 사건을 쉬쉬하며 덮으려 한 게 아니었다. 규정에 따라 처리했다고 하나 피해자의 마음을 헤아리진 못한 것 같다.

<조선일보>는 지난 총선에서 조국혁신당이 돌풍을 일으키자 조국당은 전과자, 피의자, 피고인이 모인 ‘범죄자 정당’이고 국회를 범죄 도피처로 삼으려 한다고 악담을 해댔다. 그토록 조국혁신당과 조국을 미워하는 <조선일보>이지만 언론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으니 조국혁신당을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런데 왜 진보 정당에선 성 비위 사건이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것처럼 과장하고 왜곡하여 진보 정당 전체를 싸잡아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하는가? 진보 정당에 비해 보수 정당은 도덕적이라 성 비위 사건이 없는가?

<조선일보> 눈에 넘쳐 흐르는 보수 쪽 성 비위는 안 보이나

국힘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의 대선후보이던 이명박은 주요 일간지 편집국장들과의 저녁 자리에서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겠다며 ‘특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고를 때는 덜 예쁜 여자를 선택해야 자기를 선택해준 게 고마워 성심성의껏 서비스를 한다는 말을 했다. 그 자리에 당시 한나라당 대변인이던 나경원도 있었다 하니 이명박의 천박함이 드러나 보이는 그 막말이 사실인지 의심스러운 기자들은 나경원 의원에게 확인하면 되겠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수정당의 진면목을 보여준 사례는 많다. 한나라당의 사무총장이던 어떤 국회의원은 술자리에서 옆에 앉아 있던 여기자를 뒤에서 껴안는 만행을 저질렀다가 탈당해야 했고, 국회의장까지 지낸 그 정당의 어느 원로는 골프장에서 캐디의 몸을 여러 차례 만지는 강제 추행을 저질러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과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40시간 이수라는 중형이 선고됐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최근에는 윤핵관으로 불리던 장제원 전 의원이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성폭력 사건으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범위를 보수 진영으로 넓히면 김학의 별장 성 접대 사건도 있고 장자연 성 착취 사건도 여태 기억에 생생하다.

 

<조선일보>가 사실을 과장하고 왜곡하여 ‘진보’ 정당에선 성추행과 2차 가해가 일상화되고 있다는 악담을 사설로 게재하기 하루 전인 9월 4일, <미디어오늘>에는 YTN을 인수한 유진그룹의 유경선 회장이 여성 앵커를 술자리에 부르게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YTN의 오너가 된 유 회장은 지난해 12월 YTN의 주요 보직자들을 집합시킨 송년회에서 술을 마시다 “야! 여자 앵커는 없냐”라고 했고 그러자 김백 당시 사장이 보도국장을 다그치고, 보도국장은 부랴부랴 여성 앵커를 술자리에 불렀다는 거다.

진보 정당을 싸잡아 매도하는 사설이 게재된 날, 나는 몇 번이고 <조선일보> 사이트에 접속하여 YTN 오너가 된 유진그룹 유경수 회장의 천박한 행태와 관련한 기사가 있는지 살펴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이 글을 쓰는 9월 8일에도 또 검색을 해봤지만 역시나 찾을 수 없었다. <조선일보>에겐 조국혁신당에서 있었던 성 비위 사건은 태산처럼 보이지만 YTN을 인수한 유진그룹 오너의 여성 비하 행태는 아예 보이지 않는가 보다.

‘팩트’라고 쓰고 ‘선동’으로 읽는 확증편향의 언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확증편향이다.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 또한 확증편향이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진보 정당에선 진짜 성추행이 일상이라고 믿는 걸까? 아닐 것이다. 머리 좋은 조선일보 기자들이 김건희의 미투 관련 발언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오래 전의 일도 아닌 장제원 의원 사건을 벌써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일보 지면에는 매일 ‘팩트가 있는 곳에 조선일보가 있다’는 사고(社告)가 게재된다. 그 글에서 팩트라는 단어를 선동 또는 확증편향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독자를 속이지 않는 정직한(?) 조선일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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