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장 감독 마이크 리의 ‘내 말 좀 들어 줘’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내 말 좀 들어줘’가 마이크 리 감독의 7년 만의 신작이라는 말은 그다지 타격감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극장을 찾는 관객 중 이제 마이크 리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비밀과 거짓말’ ‘해피 고 럭키’를 본 사람도 이제는 거의 없다. 2020년대 관객, 특히 한국 관객에게 마이크 리는 낯선 외국인 감독쯤일 뿐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사전에 알릴 방법이 적었을 것이며, ‘냉혹한 진실’쯤으로 번역될 원제 ‘Hard Truths’를 저렇게 바꾼 데에는 어떻게 든 관객에게 ‘친근하게’ 접근하겠다는, 절박한 마케팅 차원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족들마저 입 닫고 귀 막게 만든 한 흑인 여성의 분노조절장애
영화 ‘내 말 좀 들어줘’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목이 주는 느낌만큼 친절하거나 다정하며 인간적인 분위기의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영화 초장부터 주인공인 팬지(마리안 장 밥티스트)를 보고 있으면, 입을 틀어막거나 머리를 쥐어박고, 심지어는 꽁꽁 묶어서 어디 골방에 가둬 놓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늘 ‘부글부글’대는데 그런 그녀의 공격성에는 별반 근거가 없다. 대체로 극히 이기적인 이유에서다. 그녀의 돌발행동들 대부분은 사회적 공감 능력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그녀를 지켜보는 사람들(영화 속이든 밖이든 모두 다)의 분노는 팬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는 수준이 된다. 물신주의가 팽배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런 여자, 저런 남자, 저런 사람이 부지기수가 됐다는 자각이 확 몰려오게 된다.
팬지는 일종의 경계성 인격장애자이다. 물질적으로는 조금 나아졌지만 정신적으로는 결핍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그녀는 엄마인 펄 아이비 몽고메리가 자신보다 동생인 샨텔(미쉘 오스틴)을 더 예뻐했으며 자신은 찬밥이었다고 빽빽거린다. 팬지의 공격성은 거꾸로 자기방어적인 성벽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의 대인기피증은 도를 넘어선 단계이다. 당연히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늘 문제가 된다. 그녀는 진정으로 트러블 메이커이다.
팬지의 남편 커틀리(데이비드 웨버)는 매일같이 잔소리와 악담을 쏟아 내는 아내 탓에 오히려 아예 입을 닫으며 살아간다. 그는 배관 관련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데, 하나뿐인 직원이 어디서 무슨 지식을 들었는지, 아니면 독학으로 잡학을 얻게 됐는지 늘 뭔가에 대한 지식 자랑질이다. 그가 어느 날 하이든의 교향곡 101번 ‘시계’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어놓자, 커틀리는 침울한 표정(심드렁한 표정이 아니라)으로 그건 자신도 안다고 말한다. 그는 사실 하이든 교향곡의 뒷얘기를 알지 못한다. 커틀리는 아내 팬지 때문에 사회관계를 잃어 가는 중이며, 역시 아내 팬지 영향 탓에 인간관계 속에서의 기본적인 대화를 닫고 살아간다.
하루가 멀다고 엄마 팬지에게 사회적 루저로 취급받는 아들 모지스(트웨인 배럿)도 엄마의 미친 듯한 불만과 증오를 잠재우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외면하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모지스가 택한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헤드셋을 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헤드셋을 낀 채 눈을 내리깔고 동네 산책을 하는 것이다. 모지스는 입을 닫고 눈을 감았으며 귀를 막았다. 한 사람의 분노조절장애가 한 가족을 망가뜨리는 상황이다. 그 과정을 마이크 리의 카메라는 낱낱이 기록하듯 보여준다. 이런 현실을 겪는다는 건 실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과도한 공격성으로 표출되는 자기방어적 노이로제
남편 커틀리는 어느 정도 성공한 흑인이고 따라서 주인공 팬지가 사는 집은 깨끗한 주택가 중산층 동네이다. 이제는 조금 잘 살게 된 아프리카계 카리브해 출신 흑인들은 런던 남부의 신흥 주거단지인 브릭스턴이나 브라이턴, 아니면 런던 북쪽의 버밍엄에 ‘입성’했다. 영화 ‘내 말 좀 들어줘’는 결국 영국 중산층 사회에 진입한 한 흑인 가정의 이야기인 셈이다. 영국은 1800년대에서 190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 일대를 식민지로 운영했고, 흑인들을 자국의 노동 하층계급으로 착취했다. 당연히 영국 본토가 흑인 이주민들로 가득 차게 됐다. 언제부턴가 이들은 인종과 계급의 차별을 뚫고, 일부이긴 하지만 중산층으로까지 올라선 상태다. 흑인들이 넘쳐 나면서 상징적인 측면에서 이제는 영국이 거꾸로 아프리카의 식민지가 된 듯한 모습으로까지 비친다. 영국 백인 계층은 당연히 이를 경계하며 극우화 되어 가고 있으며 극우 정당인 ‘영국개혁당’이 전통적인 양대 정당인 노동당과 보수당을 제치고 여론조사 1위를 달리는 실정이다.
마이크 리의 이번 영화는 흑인 중산층 커뮤니티의 한 가운데를 파고든다. 여주인공 팬지는 이상하리만큼 자기방어적 노이로제를 보이는데, 그건 아마도 자신들이 간신히 얻거나 이룬 가치와 재산, 자존심과 자부심 같은 것을 어떻게든 뺏기지 않으려 하는 신경쇠약처럼 느껴진다. 이건 곧 영국 흑인들이 백화(白化), 백인화가 되고 있다는 얘기이다. 팬지 같은 흑인 중산층 중년 여성이 갖게 되는 모든 강박증은 개인적인 정신병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꽤 사회적인 측면을 지니는 것이며 역사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팬지는 자신이 만나는 모든 백인 계층의 여성들에게 경멸의 악담을 퍼붓는다. 그녀는 마트의 캐시어 여성, 백화점 가구점의 매니저, 치과 의사, 5년차 여자 내과의사 모두에게 신경질과 욕설을 퍼부으며 일상을 보낸다. 그러나 막상 윗선의 책임자를 불러오겠다고 하면 눈치를 보다 꽁무니를 뺀다. 팬지는 마치 최선의 수비는 최고의 공격밖에 없다는 양 행동하나 그것도 자기 보호가 가능한 선에서 그럴 뿐이다.
팬지의 여동생 샨텔은 미용실을 하며 두 딸과 살아간다. 그녀의 헤어숍은 중산층 흑인 여성들의 수다와 뒷담화의 성전이다. 샨텔은 머리를 마는 일 보다 남편이 세 번째 바람을 피워서 스물두 살 여자에게서 또 애를 낳았다는 고객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게 더 주업인 감정노동자이다. 그녀는 모두가 못마땅해하는 자신의 언니 팬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애를 쓴다. 샨텔의 노력은 그러나,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한다. 팬지는 여전히 자기만의 피해의식에 빠져 이기적 행동거지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회적 질병은 계급과 인종 문제 아닌 소통과 공감의 결여 때문
마이크 리 같은 노년의, 그리고 노장의 감독이 어쩌면 사소해 보이는 가정사, 깔끔한 중산층 골목길의 흑인 가정사를 보여주면서 궁극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또 다른 영국의 유명감독 켄 로치는 주로 노동계급의 이슈를 자신의 영화적 담론으로 내세워 왔던 데 반해 마이크 리는 그와는 조금 다른 계급적 계층적 관점을 지녀 왔다. 마이크 리가 보기에 현재의 영국 사회는 큰 내홍의 위기를 겪고 있는데 그것은 계급의 문제도 아니고 인종의 문제도 아닌, 그 모든 것을 다 뛰어넘는 소통과 공감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건 그의 대표작 ‘비밀과 거짓말’에서도 한 차례 언급된 적이 있는, 마이크 리의 작품관과 같은 얘기이다. 이를 거꾸로 얘기하면 인간은 소통과 공감, 연대를 이루게 되면 많은 갈등과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얻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통과 공감의 끈은 끊어진 지 오래고 그걸 극복할 법한 신흥 부르주아, 흑인 중산층마저 이미 때가 늦었음을 영화는 보여주려 애쓴다. 왠지 영국 사회 내부가 꽤 심각한 정신적 질병에 시달리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샨텔의 두 딸 케일라(애니 넬슨)와 알레샤(소피아 브라운)는 화이트칼라 여성들이다. 언니인 케일라는 화장품 회사에서 신제품을 개발하는 연구원이고 동생인 알레샤는 법률회사 직원이다. 이들은 각각의 직장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는다. 자매는 종종 회사 근처에서 한 잔씩 한다. 케일라는 동생 알레샤에게 자신이 회사에서 겪은 수모, 질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 두 젊은 자매는 엄마 자매 세대에 비해 극성스럽지 않다. 소통과 공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대본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팬지 역의 마리안 장 밥티스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사가 너무 많은 것, 그 대부분이 욕설과 불만 분노의 내용이라는 것에 당황했을까. 그보다는 매번 입체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분노조절장애 연기에 집중할 수 있을까를 놓고 고민했을 것이다. 영화 속 팬지는 남편 커틀리와 아들 모지스를 양옆에 놓고 저녁을 먹으면서 이웃을 욕하고, 자선단체를 욕하고, 동물보호단체를 흉보느라 밥 한술을 제대로 뜨지 못한다. 포크와 나이프로 뒤적거리지만, 도저히 입에 무엇을 넣을 수가 없다. 마리안 장 밥티스트는 그 강박증 연기를 기가 막히게 해낸다.
소통과 공감 사라진 병적인 노이로제 사회, 우리는 다를까?
영화 ‘내 말 좀 들어줘’는 주인공 팬지의 마음속 노도가 무엇 때문인지 이해하려 애써도 도저히 그녀의 말을 끝내는 듣고 싶지 않게 만드는 내용의 영화이다. 이런 인성의 인물들로 인해 사회 내부의 소통이 단절되고 공감 능력이 사라진다면 개인도, 한 집안도, 사회도, 나라도, 지구도 다 망한다는 경고를 은근슬쩍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런 주제를 그려내는 방식의 디테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거의 솔로 연기에 가까울 만큼 투혼을 보여 준 마리안 장 밥티스트의, 장 밥티스트에 대한, 장 밥티스트를 위한 영화이다. 영화는 때론 연기자 한 명이 끌고 나간다. 오랜만에 한 배우의 최고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내 말 좀 들어줘’는 소통과 공감 능력이 일찍부터 사라진 작금의 한국 사회의 병적인 노이로제 증상에 대해서도 우회적으로 지적의 칼날을 벼리는 작품일 수 있다. 그걸 알아보고 느끼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높은 평점을 받을 것이다. 지난 8월 20일 전국 극장가에서 개봉됐다. 짐작하겠지만 스크린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마이크 리가 국내에서 그렇게 취급받는 인물이 됐다. 안타깝다.
관련기사
- ‘아임 스틸 히어’ 군사독재의 기억, 그 소중함에 대하여
- 다큐 '추적'은 고발한다, 이명박의 4대강 악행
- 기독교 근본주의는 어떻게 브라질을 파괴하고 있나
- 남자 아이들의 폭력의 세계, 그 폭발성에 대하여
- 글로벌 시청 1위 달리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
- 행복이 부재한 세상, 그것이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 두 남자 간 러브스토리가 우리 사회에 전하는 메시지
- 도무지 믿지 못할 이 모든 현상들이 악귀의 소행일까?
- 늘 세상의 파시즘을 고발하는 예술 너머의 예술
- 결국,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 민중을 고양시키고, 그 민중의 위인이 된 김대중
- 오직 연대만이 혐오와 차별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다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