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호 감독의 퀴어 영화 ‘3670’

오동진 영화평론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영화 ‘3670’의 제목 3670의 의미는 오묘하다. 종로3가 지하철역 6번 출구 7시란 뜻이며 맨 뒤의 0은 참가자의 수를 의미한다. 종로3가역 6번 출구는 현재 익선동 한옥거리로 유명해졌고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가 된 곳이다. 오래된 한옥들을 개조해 만든 카페, 레스토랑들이 골목길에 이어져 있고 입구 쪽은 고기구이 노포들로 유명하다. 해가 지면 이 한옥거리 입구 대로변에, 이제는 서울 어디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된 포장마차가 줄 지어 선다. 재미있고 맛있는 곳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바로 이곳이 게이들의 커뮤니티라는 걸 알지 못할 수 있다.

 

탈북자 게이가 겪는 한국 사회 중층 모순에 관한 염세적 이야기

한국의 게이들은 80~90년대엔 낙원동 상가를 중심으로 모여 지냈다. 시인 기형도가 파고다 극장에서 소주 한 병을 손에 쥔 채 사망한 것을 두고 그가 게이였는지 여부로 논란이 일기는 했지만, 그의 시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짧은 생에서 그가 늘 행복해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기형도의 죽음이 계기가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게이들은 낙원동에서 익선동 골목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익선동의 게이바들은 게이뿐만이 아니라 화이트칼라 여성 직장인들이 남자들을 피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인기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영화 ‘3670’이 비추는 공간 상당수가 바로 이 익선동이다. 주인공 철준(조유현)과 영준(김현목)이 처음 만나는 장소도 여기다. 이들은 소위 ‘술번개’로 만나는데, 바깥세상에서 커밍아웃하지 못한 남성 동성애자들이 이 ‘술번개’를 통해 자신들만의 은밀한 만남을 갖는다. 게이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에피소드의 시작 같은 얘기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 철준이 탈북자라는 사실이다. 영화 ‘3670’은 탈북자 게이인 남성이 남한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일을 이야기한다. 예상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중층 모순을 그린다. 우리 사회가 겹겹이 치고 살아가는 차별의 이중 삼중 다중의 모순에 관한 이야기이다. 당연히 갑갑하고 숨이 차오르며 희망적이라기보다는 염세적이다.

 

철준과 영준은 세상의 연애하는 모든 이들이 그렇듯 섹스보다는 얘기, 곧 대화로 관계를 시작한다. 남한 젊은이 영준은 북한 청진에서 온 철준에게 묻는다. “북한에서는 이래도 돼?” “그래서 탈북한 거야?” 일요일에 뭐하냐는 남한 게이 영준의 질문에 북한 게이 철준이 사투리를 없애지 못한 억양으로 답한다. “나, 교회 가야 된다.” 그러자 영준이 다시 말한다. “야, 너 교회 다니면서 이러고 다니는 거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인 거 모르냐?” 그러자 철준이 다시 말한다. “ 너두 교회 다녀?” (철준과 영준은 각각 장학금과 엄마 카드 때문에 교회에 나간다.)

가련하고 여리여리하고 불안하고 허전한 청춘들

영준은 철준을 처음부터 좋아했지만, 철준은, 사랑하는 사람들 간에 시간이 흔히 어긋나듯이, 처음부터 영준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둘의 사랑은 게이 커플이어서 비극이었던 것이 아니고 어긋났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다. 영준은 철준이 자기한테 관심을 주기보다 딴 게이들, 예컨대 인기남인 현택(조대희) 같은 남자에게 눈길을 주는 것이 못마땅하다. 그래서 영준은 상처받는다. 둘은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데, 결국 영준은 철준을 떠나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철준을 만났을 때 영준은 말한다. “나도 퀴어 선진국에 가서 길바닥에서 남자들하고 손잡고 다니려고.” 둘은 웃기지만 슬프고 슬퍼서 서로가 서로에게 안됐다는 심정이 된다.

 

이 영화 ‘3670’을 보면 애들이 참 안됐다, 이 땅의 젊은 아이들이 참 가련하고 여리여리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준은 철준과 헤어져 타고 가는 버스 안에서 눈물을 흘린다. 영준을 버리고 가는 철준의 뒷모습은 참으로 허전하다. 이 장면의 교차 컷은 심심하고 평범하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남한에 온 북한 출신 게이는 허전하고 불안하다. 외롭다. 철준은 행복하기 위해서 탈북했지만 행복하지 않다.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그가 북한 출신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게이이기 때문인가. 따라서 어느 한쪽을 끊어 내야 한다. 철준은 같은 탈북자 선배 학민(전두식)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영화 ‘3670’은 우울한 척, 결국 철준이 살아 낼 것임을, 게이로서 계속 살아낼 것임을 보여준다.

성 소수자 차별은 도덕이나 성 건강 문제 아닌 계급 문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에서 자본이 형성되는 과정, 그것이 국가란 형태로 발전되기까지의 여러 형태,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만드는 상부구조(도덕률과 계급 질서, 운영 시스템 등)의 허구를 갈파해 낸다. 인류는 씨족·부족사회를 거치며 개인이 소유할 무엇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고 그것이 계급사회의 시원인데, 더 많이 가진 자가 그렇게 더 많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속력이 강한 집단화를 필요로 하게 됐으며, 그 결과가 가족의 탄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족 역시 ‘가진 것’ 때문에 잦은 분열을 일으키자 그것을 막기 위해 적장자(嫡長子, 장남) 원칙을 세웠고 봉건 중세사회에 이르러서는 심각한 남녀 차별로 현실화한다. 가부장 제도가 만들어지고 남성 중심주의가 만들어진 것은 이렇게 가진 것을 지키려는 물적 욕망 때문이다.

물질적 재화에 대한 소유가 더 막대하게 쌓이게 되는 자본주의에 이르러서는 가지는 것, 곧 사적 소유재산에 대한 계급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도덕률과 사회규범을 만들어 낸다. 종교가 사회규범의 주요한 요건처럼 얹히게 된 건 이미 봉건 중세 때부터이며, 자본주의로 와서는 아예 국가 시스템과 동등한 수준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도덕률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엄연히 달라야 하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는 어울릴 수 없는 관계가 아니라 어울려서는 안 되는 관계로 규정된다. 결국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문제란, 프리드리히 엥겔스식의 사회철학에 따르면 계급의 문제가 시발이지 도덕이나 성 건강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거꾸로 말하면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사회일수록 지독한 계급사회 의식에서 조금씩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의 국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은 취향과 욕망의 문제이며 이것을 계급사회의 온갖 규범으로 묶는다는 것은 그 사회체제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증적인 사례가 된다. 북한이 공산주의를 표방한다면,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한다면, 개인의 성적 욕망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철준의 탈출은 북한 사회의 근본적 한계를 보여주는 셈이다. 남한 역시 북한만큼 자유로운 사회는 아니다.

주인공이 게이들일 뿐, 그저 가슴 아픈 멜로영화

철준은 영준에게 말한다. “나도 여기서 이렇게 버티는데…(퀴어 선진국이라고 별거 없다)” 영준은 답한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너 진짜 대단하다고. 나도 너 때문에 용기 낸 거야. 나도 너처럼 거기 가서 씩씩하게 잘 적응할 수 있겠지?” 철준이 소리친다. “아니, 니 못한다. 니 못할 거다. 그거 졸라 힘들다.” 맞다. 게이에게는 어느 세상에서든 살아가는 게 ‘졸라’ 힘든 법이다. 세상이 이러면 안 된다. 가장 약한 자들, 세상에서 가장 구석으로 내몰려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 박준호가 얘기하고 싶어 하는 대목이다.

퀴어 영화인 만큼 다소 생경한 장면과 대화들이 나온다. 오프닝 장면은 남자 둘이 섹스를 나누는 모습이다. 이미지보다는 오디오를 더 앞세운다. 게이들에게 ‘탑’과 ‘바텀’이 있는데 이건 섹스할 때 누가 남자 역인지 누가 여자 역인지를 나누는 용어이다. 철준은 열에 여덟아홉 번이 탑인 게이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이런 대화나 용어 모든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불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강고한 보수 기독교도들에게 게이들은 척결의 대상이자 바이러스 보균자로 교육된다. 그들은 게이들의 사랑은 더럽고 추악한 것이라고 훈련된다. 아마도 이 영화 ‘3670’은 극장 개봉 과정에서 반감을 지닌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외면 받고 공격당할 것이다. ‘3670’은 애초부터 많은 대중이 즐겨 다룰 작품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관객 폭이 좁은 것이 상업영화 아닌 독립영화로 만들어진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3670’은 단순한 퀴어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두 남자의 러브스토리이다. 이 퀴어 러브스토리에서 방점은 퀴어가 아니라 러브스토리에 찍혀 있다. 모든 멜로영화의 장르적 규칙을 그대로 따르되(두 사람의 차이를 점점 좁혀가는 이야기 구조) 그 주체를 게이들로 내세운 것이다. 얼핏 소재주의를 추구한 듯이 보이지만 그것을 동성애의 사회철학으로 잘 승화시켰다.

 

당신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사랑하는 인본주의자라면…

그렇다고 정치적 슬로건이 엿보이는 것도 아니다. 철준과 영준의 사랑이 애달프고 그래서 많은 멜로영화가 그렇듯 이 둘이 정말 잘 이루어졌으면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동성애 영화는 동성애자들 얘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러브스토리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그 마음의 순수성이 전달되는 작품이라면 잘 만든 퀴어 영화에 속한다. 바로 이 영화 ‘3670’이 그렇다. 지난 9월 3일 개봉했다. 당신이 만델라와 말콤 엑스를 추앙한다면, 김대중과 노무현을 존경한다면, 프란치스코 교황과 김수환 추기경을 사랑한다면, 이 영화 ‘3670’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옳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