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망각 속 또 꿈틀거리는 브라질 군부독재 세력

오동진 영화평론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격렬했던 시대에 대한 기록이고 끔찍한 고통에 대한 기억을 그린 영화지만 월터 살레스의 카메라는 지나칠 만큼 절제되고, 억제하고 억누름으로써, 그리하여 함부로 울지도 못하게 만든다. 브라질 군부 독재 시절을 그린 이 영화 ‘아임 스틸 히어’를 만들면서 월터 살레스는 손쉬운 장면을 채택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이 영화를 정치적, 역사적 프로파간다로 삼으려 했다면, 역설적으로 간결한 장면, 그러니까 고문과 학살의 모습을 많이 담아냈을 것이다. 살레스는 고문 대신 감방의 어둠과 고립, 비명의 에코, 복도를 지날 때 언뜻 보이는(정작 주인공은 두건을 쓰고 있어서 보지도 못한다) 물고문 장면을 숄더 샷(shoulder shot)으로 잠시 드러낼 뿐이다. 어쩌면 고문 장면 등은 이미 이전의 많은 중남미 정치 영화들, 예컨대 ‘로메로’나 ‘살바도르’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등에서 많이 언급했던 터이다. 월터 살레스는 브라질 군부 독재와 학살이라는 직접적인 증언(예컨대 헬기에서 바다로 집어 던져 살해하는 등)에 집중하기보다는 기억과 망각, 그럼으로써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 모습에 대해 우회적으로라도 일침을 가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꼭 브라질의 얘기만이 아니다. 한국, 유럽, 아시아, 북미 모두에 해당한다. 이 영화가 묘한 보편성을 띠는 건 그 때문이다.

 

64년~85년 브라질에서 펼쳐졌던 군사독재의 지옥도

사람들에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다는 건 매우 공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진짜 공포는 ‘끌려간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문도 모르는 채’에 있다. 그건 고문도 마찬가지이다. 고문의 고통, 그 본체는 매질에 앞서 자신이 무엇을 불어야 할지를 모른다는 데에 있다. 마치 그걸 알기라도 하면 고문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듯이. 모든 억압은 무지의 공포를 전제로 하며 철저한 고립감을 주요 수단으로 쓴다. 인간은 신체적 고통으로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압박으로 무너진다. 개인이 무너지고, 한 가정이 붕괴하며, 사회와 나라 전체가 어두움에 휩싸이게 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유니스 파이바(페르난다 토레스)는 남편인 루벤스 파이바(셀튼 멜로)가 이유도 없이 끌려간 후, 자신도 투옥돼 고초를 겪는다. 그녀가 두려웠던 것은 바로 그 ‘이유’이다. 남편은 무엇 때문에 끌려갔으며, 어디에 있는지 왜 몰라야만 하냐는 것이고, 자신 역시 무슨 이유로 끌려와 갇힌 채 반복되는 심문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게 그녀를 사시나무 떨듯, 심문관 앞에서 떨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은 1970년에 벌어진 일이며 두 부부는 리우데자네이루 레블론 해변의 비교적 상류층 저택에서 살아가던 때이다. 두 사람은 바깥의 ‘공기’를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긴 해도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두고 단란하고 행복하게 지내던 참이다. 군사독재가 기승을 부렸고 당연히 극좌 단체가 이에 맞서 테러 행위를 저지르던 때이기도 하다. 브라질에서는 당시 ‘국가해방동맹’이 주축이었다. 일본의 적군파,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 독일의 바더 마인호프 같은 부류였다. 브라질 군부는 이를 기회로 친미 반공 노선을 강화하며(미국이 남미를 친미 국가로 만들려는 군사전략의 하나로 군사 괴뢰정권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지식인 언론인 학생들에 대한 불법 체포, 구금, 고문, 학살을 일삼았다. 독재 기간인 1964년~1985년의 21년 간 군부는 230곳에 비밀 장소를 만들고 민주화 인사들을 구금 살해했다. 범죄 현장은 루벤스 파이바를 비롯해 블라디미르 헤어조크(기자), 스튜어트 안젤(학생운동가) 등을 가두었던 군 병영뿐만 아니라 리우데자네이루의 ‘마람바이아’ 같은 시신 유기를 위한 장소도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군사독재의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 걸린 사회

영화 ‘아임 스틸 히어’는 결국 21년 간의 독재에 대한 기록이며, 그 고통의 기억이 존재하는 한 고난의 역사는 결코 극복되지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힘겹게, 그리고 용감하게 싸워나간 사람들에 관한 얘기라기보다는 남겨진 사람들, 정신적으로 더욱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 관한 얘기라는 점에 더 큰 특이점이 있다. 남겨진 사람들이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 또한 불굴의 의지가 필요했다는 것, 그 역설의 시간을 기록하는 데 더욱 주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의 ‘1987’이나 ‘남영동1985’같은, 비교적 직설화법의 작품과는 다소 궤를 달리한다. ‘아임 스틸 히어’는 어쩌면 월터 살레스 감독 자신의 전작인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스타일을 복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도 살레스는 쿠바 혁명의 당위성을 체 게바라라는 인간과 그 휴머니즘으로 우회해 들어가며 실현하려 한다. ‘아임 스틸 히어’ 역시 브라질 민주화 운동의 절대적 가치를 선언적으로 앞세우는 대신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의 개인사를 통해 이를 에둘러 보여 주려 애쓴다. 그 화법의 전도(轉倒)가 역설적으로 브라질의 고난사 자체를 가슴에 스며들게 만든다.

 

원래 이름이 마리아 루크레시아 유니스 파치올라 파이바인 유니스 파이바는 수플레 요리(치즈 잼 과일 등을 베이킹파우더와 함께 오븐에 구워 부풀리게 하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주부이다. 남편이 한때 노동당 소속 의원이었고 1964년 군부 쿠데타 때 잠시 망명 생활을 한 적은 있지만 이제는 건축설계사로서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만큼 그대로만 가면 ‘토끼 같은’ 자식 다섯 명과 행복한 주부의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영화에서 이 ‘수플레’는 중요한데 아닌 밤중에 쳐들어 와 집을 점거한 보안요원들에게조차 먹이는 요리가 이것일 정도로 아이들이 엄마를 기억할 때 떠올리는 맛이다. 그러나 수플레 레시피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전수되지 못한다. 그건 독재의 기억, 그 교훈의 메시지가 오늘날의 브라질에 올바르게 전해지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니스 파이바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 간다. 브라질의 현실 역시 군부 출신의 대통령 보우소나루를 뽑아 다시 군부 독재로 회귀하려 했다. (지금은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이 간신히 역사적 퇴보를 막아서고 있긴 하다) 모두 다 독재의 기억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문과 학살의 고통, 기억하지 않는 한 또 반복될 것

따라서 ‘아임 스틸 히어’는 독재의 역사에 대한 영화이며 동시에 기억에 관한 영화이다. 독재의 역사, 그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억이 중요하며 기억은 독재의 역사에 대한 환기가 없는 한 쉬이 망각 되고 마는 것인 만큼 이 두 가지는 같은 축으로 돌아가야 한다. 감독인 월터 살레스가 얘기하려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에 깃발이 꽂힌다. 주인공 유니스가 이후(1984년쯤) 원주민 권리 분야의 몇 안 되는 법 전문가였다는 것도 꽤 중요한 키워드이다. 신대륙이 지닌 태생적인 국가 폭력은 대부분 원주민과 관련된 인권 유린의 형태로 나타나고, 이건 곧 전부 기억을 지우려는 쪽과 끈질기게 기억해내려는 쪽의 싸움임을 드러낸다. 주인공 유니스가 군부 독재의 인권탄압을 향한 개인의 싸움을 어떻게 공동체의 것으로 확장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남편인 루벤스 파이바의 사망진단서를 25년이 지난 후에야 받아든 후, 그녀의 알츠하이머 병세가 급격하게 나빠지는 것 역시 월터 살레스가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기억’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나타낸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자 브라질은 보우소나루가 쿠데타를 시도하고 극우 세력으로 하여금 의회 난동을 일으키게 했다. 우리도 윤석열 시대를 통해 현재 똑똑히 목도하고 겪었던 일이다. 당신의 기억은 지금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가. 월터 살레스가 힘겹게, 그러나 힘주어 묻고 있는 질문이다. 이 영화는 실화의 가족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으며 가족 중 아들인 마르셀로 루벤스 파이바가 쓴 동명의 전기를 모토로 했다. 이 영화 ‘아임 스틸 히어’는 8월 20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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