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제 유지 보장받기 위해 항복 미룬 일본
본질보다 비본질에 쉽게 감동·동조하는 일본
분단과 제주4.3, 일제 침략과 식민지배 연장선
제주4.3, 한반도 분단에 저항하다 일어난 비극
가해 행위 전시물들 전국적으로 철거, 축소 중
“난징 대학살 입증 자료 없다. 날조다”
“왜 그렇게 쉽게 감동에 동조하나. 극한의 땅에서 쇠사슬에 묶여 발버둥쳤을 개들의 실태에 왜 생각이 미치지 못하나.”
지난 2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생각하는 것’이란 연제의 강연회에서 동포시인 김시종(96)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꺼낸 얘기다. 아침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일본 남극기지에 버려졌던 15마리 개들 중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2마리에 대한 얘기였다. 그 개들은 1958년 2월 11명으로 짜인 일본 제1차 남극관측대가 악천후로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됐을 때 ‘쇼와’기지에 버려 두고 떠난 개들이었다. 월동대 파견이 무산되고 1년 뒤에야 그곳에 간 제2차 관측대는 그때까지 살아 있던 2마리를 발견했다. 일본사회가 그 소식에 감동의 물결에 휩싸였던 모양이다.
“네놈들이 인간이냐!”
김시종은 “쉽게 동의하고 감동하는 것이 일본인들 모습이다. 이제부터 일본에서 일어날 일의 예조(予兆, 전조)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날 그는 예전에 오사카 이자카야(선술집)에 있다가 우연히 들었던, 옛 일본군가를 부르던 3명의 일본인들이 주고받던 얘기도 떠올렸다. 그들은 일제가 저지른 중국본토 침략(중일전쟁) 당시 중국에 파병됐다 돌아온 ‘귀환병’ 출신으로 보였다. 그들은 전쟁 중에 중국 농가에 침입해 그 집 안주인과 딸을 겁탈했던 체험담을 자랑하듯 떠들어대고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김시종은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내동댕이치고는 고함쳤다. “네놈들이 인간이냐!”
본질을 보지 않고 비본질에 쉽게 감동·동조하는 일본
일본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 헨미 요라는 사람이 쓴 <1937 이쿠미나>라는 소설에는 당시의 일본군이 중국 민간인들에게 저지른 그런 끔찍한 만행들이 당시 만행에 직접 가담했던 ‘귀환병’들이 남긴 글들을 토대로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그들은 겁탈한 뒤 피해자들을 죽이기도 했다. 심지어 모자 간에 못할 짓을 강요하며 지켜보다 죽이기도 했다. 일본 우익들이 사실 자체를 부인하거나 과대 날조됐다고 주장하는 1937년 말의 ‘난징 대학살’ , 최대 30만 명이 학살당했다는 그 현장의 무참한 얘기들도 그때 그 곳에 있었던 귀환병들의 체험담을 토대로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헨미 요의 아버지가 중국에 파병됐다 돌아온 '귀환병'이었다.
김시종이 남극기지에서 살아남은 개 두 마리에 감동하는 일본인들을 나무란 것은, 그들의 시선이 쇠사슬에 묶인 채 내버려져 살기 위해 발버둥치다 죽어갔던 개들의 참상과 개들을 그렇게 내버려두고 떠난 일본 관측대가 아니라 가까스로 그 역경을 뚫고 운좋게 살아남은 개들이 촉발시킨 ‘기적’이란 환상에 고정돼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건의 본질을 보지 않고 비본질의 ‘사소한’ 감동에 쉽게 동조하는 일본인들의 습성이 위험하다는 것을 김시종은 오랜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육사와 윤동주, 그리고 히로히토
일본인들은 1937년 7월 루거우차오(노구교) 사건을 날조해 침략한 중국에서 자국 병사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가 아니라, 자국이 그 전쟁과 뒤이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얼마나 끔찍한 피해를 당했는지를 끝임없이 상기하고 기념하는데 점점 더 집중하고 있다.
김시종은 그날 두 사람의 조선 시인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며 17차례나 투옥됐다가 결국 옥사한 이육사. 일본이 쓰지 못하게 한 조선어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사상범’이 돼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혀 있다 숨진 당시 도시샤(동지사)대 학생 윤동주.
김시종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분노가 불같이 타오른다”며 “참으로 일본이 밉다”고 했다. “알아야 할 것들로부터 멀어져 온 일본인들이 또다시 전쟁 전으로 회귀하는데 쉽게 동조하고 있다.”(<아사히신문> 2월 17일) 일본 남극관측대가 15마리의 개를 쇠사슬에 묶어두고 떠난 기지 이름 ‘쇼와’는 일본의 전쟁 주범인 히로히토 천황의 연호다. 남극기지에 그 이름을 붙인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시대를 이끈 히로히토의 통치기를 ‘번영과 영광의 시대’로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 연장선상에 있던 제주 4.3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은 ‘해방’을 맞았지만 동시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당했다.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점령한 가운데 1948년에 제주도에서 4.3민중항쟁이 벌어졌다. 항쟁을 진압하면서 제주도민들을 학살한 군인과 경찰관 중에는 일제가 세운 괴뢰국 만주국의 육군군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있었다. 아마도 당시 신경(지금의 창춘)에 있던 만주국 육군사관학교였던 육군군관학교에 다녔던 친일 조선인들 얘기일 것이다. 도쿄의 일본 육사까지 졸업했던 그들 중 일부는 항일독립군 ‘토벌’을 주임무로 삼았던 ‘간도 특설대’ 출신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1948년 8월에 건국한 대한민국 국군, 특히 육군의 시초와 토대를 닦은 이들이 그들이다.
1929년에 부산에서 나서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자란 김시종은 4.3 때 그 무참한 학살들을 목격하고 스무 살 되던 해에 일본으로 밀항해 오사카 이카이노 지역에 정착했다. 줄곧 국적없는 조선인으로 살던 그는 2003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다.
김시종은 1945년 7월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포츠담 회의에서 미국(해리 트루먼) 영국(윈스턴 처칠) 중국(장제스) 정상이 서명한 ‘포츠담 선언’을 일본이 바로 받아들였다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고, 6.25전쟁도 나지 않았을 것이며, 지금과 같은 남북대결과 국내외로 흩어진 ‘1천만 이산가족’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4.3은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했다.
“일본이 엿새 먼저 항복했다면 분단도 전쟁도 없었다”
일본 항복 한 달 전인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열린 포츠담 회의에서 연합3국 정상들이 합의한 ‘포츠담 선언’의 핵심 내용은 일본의 즉각 항복을 촉구하면서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이를 것임을 경고한 것이다.
회의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7월 16일 미국은 뉴멕시코 주 로스앨러모스 근처의 앨라모고도 사막에서 플루토늄 원자폭탄 폭발실험에 성공했다. 세계 최초의 핵폭발이었다. 그 소식은 비밀리에 포츠담에 가 있던 트루먼에게 전달됐고, 그때부터 트루먼은 일본 본토 진격을 위해 전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소련에 부탁했던 지원군 파병 요청을 없었던 일로 하려 했다. 소련군 지원 없이도 원자탄으로 일본을 조기에 무너뜨릴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를 간파한 스탈린은 원래 8월 말로 예정했던 소련군의 만주 진군 일정을 중순으로 앞당겼다가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소련군 투입(참전)을 8월 9일로 더 앞당겼다. 원자탄을 맞은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서둘러 참전해야 전리품을 요구할 권리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8월 15일 히로히토 일본천황이 항복조서를 방송하기 엿새 전이었다. 미국 대학에서 강의했던 하세가와 쓰요시의 <종전의 설계자들>(Racing the Enemy)이 그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엿새 전에 일본이 항복했다면 소련군은 참전 기회를 놓쳤을 것이고, 그랬다면 미국은 일본 대신 한반도를 반으로 쪼개 절반을 소련에게 넘겨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한반도 분단도 6.25전쟁도 1천만 이산가족도, 남북 영구분단과 대결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분단의 제1차적 책임은 패전한 전범국 일본이 아니라 그 피해자인 한반도와 그 주민들을 자신들 마음대로 분단해 절반을 소련에 넘긴 미국에게 있다.
김시종을 비롯한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대한민국이 수립되기 전에 일본정부로부터 임시로 부여 받은 ‘조선적’이라는 국적 아닌 임시 신분증명을 포기하지 않고 수십년을 버틴 것은, 남북으로 분단돼 각기 독립국을 세운 조국의 현실을 차마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한민국 국적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자도 아닌 임시 ‘조선적’을 부여잡고 조국이 통일될 때까지 기다렸다. 수십년이 지나도 가망이 없자 그들 중 상당수는 김시종처럼 주로 생활상의 이유 때문에(‘조선적’으로는 일본에서 차별받고 출입국도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 국적을 얻거나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그들이 보기에 그때 일본이 엿새만 더 일찍 항복했더라도 소련군의 참전도 한반도 분단도 6.25전쟁도 없었을 것이며, 제주 4.3의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다.
천황제 유지 보장받기 위해 항복 미룬 일본
일제 대본영과 히로히토는 당시 그 한참 전부터 패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다만 어떻게 패전하느냐가 문제였다. 강경파는 본토 결전까지 가서 전원 ‘옥쇄’하자고 주장했고, 온건파 내지 국제파 또는 현실주의자들은 어떤 조건으로 항복할 것이냐를 두고 서로 다퉜다.
항복이 늦어진 것은 연합국으로부터 ‘국체 호지(國體護持)’를 보장받기 위한 술수와 내부 동의를 얻어내는데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국체 호지란 국체(=천황제)를 지킨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패전하더라도 히로히토를 우두머리로 한 천황제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천황제를 지키기 위해 일제 수뇌부가 차일피일 항복을 미루는 사이 미국은 원폭실험에 성공했고, 이 소식을 들은 트루먼은 소련 참전을 배제하려 했으며, 이를 간파한 스탈린은 서둘러 참전을 단행했다. 그 결과 한반도는 분단되고, 제주에서 4.3항쟁이 일어났으며, 6.25전쟁까지 터지고, 한반도는 지금까지 분단된 채 민족 에너지를 낭비하며 동족대결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주변국들 눈치를 살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제주 4.3은 한반도 분단에 저항하다 일어난 비극
김시종은 제주 4.3항쟁을 분단에 반대하고 저항하다가 벌어진 비극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대하소설 <화산도>로 알려진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 등 대다수 재일동포들도 같은 생각이다. 4.3봉기가 일어난 1947년의 한반도인들 모두는 아무런 필연적 이유도 없었던 남북 분단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1947년 3월에 시작된 제주 4.3항쟁의 최대 원인이자 핵심 이유는 조국의 분단과 독립적인 남북 분단국가 수립에 대한 반대요 저항이었다. 남한 단독정권 수립론자와 그들을 밀었던 미국은 그들을 무자비하게 ‘토벌’하고 ‘빨갱이’로 몰아 학살을 정당화했다. 6.25전쟁이 나기 전 이른바 ‘좌익’은 전쟁 뒤 고착화한 이념대결에서 파생된 ‘빨갱이’들로 낙인찍기 어려운 존재들이었다. 박정희조차 남로당 조직 간부였다. 제주 4.3 희생자들 대부분은 남로당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들을 적대시한 것은 일본 패전 뒤 나라가 분단되면서 살아남은 친일 부역세력이었다. 그들에게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면서 친일파를 비판했던 도민들은 눈엣가시였고 다시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그들의 존재 정당성을 위협하는 ‘위험분자’들이었다.
제주 4.3, 일제 식민지배와 밀접한 관련
2025년 4월 18~19일 도쿄 도 아라카와 구 닛포리에서 열린 ‘제주도 4.3사건’추도집회에서 참가자들은 4.3이 일본의 침략 및 식민지배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음에도 일본인들이 이를 잊고 있거나 무관심하다고 지적했다. ‘제주도 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 도쿄’의 조동현(74) 회장은 4.3이 일어난 지 50년이 지난 어느날 아버지가 문득 지나가듯 “고문을 당하고,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고 한 말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이 1945년 7월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했다면 8월의 소련군 참전도 한반도의 분단도, 분단에 저항하다가 일어난 4.3도 없었을 것이라며 “(4.3이) 일본의 전쟁과 이어진 사건이라는 것을 (일본인들은) 알기 바란다”고 했다.(<아사히신문> 2025년 4월 14일)
“난징 대학살 입증자료 없다. 날조다”
“전시 중의 가해행위를 부정하는 언설들이 끊이지 않는다. 당사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는 지금 기억을 공유하는 시설의 전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14일의 “‘난징 대학살은 날조’ 가해 전시 탓하는 언설, 각지에서 철거 잇따라”라는 제목의 <아사히> 기사는 일본인들의 과거 일본의 전쟁 가해 사실에 대한 기억이나 태도가 김시종 조동현 등 재일동포들이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 준다.
예컨대 원폭 자료와 패널 등을 전시하는 나가사키 시의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의 개보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지난 3월에 열린 운영심의회에서 위원 가운데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난징 대학살의 역사적 사실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학살을 입증할)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날조다.”
그 자료관에는 난징 학살사건을 비롯한 제국 일본군의 침략과 가해행위부터 원폭 투하에 이르는 역사를 다각적으로 살피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영상자료에는 “난징 점령 당시 일본군은 중국군 포로와 일반시민들을 살해 폭행하는 등 대학살 사건을 일으켰다”는 자막이 나온다.
앞서 얘기한 운영심의회 위원은 난징 대학살 자체가 날조된 것이니 자료관의 관련 자료들도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민단체 ‘나가사키 원폭 전시를 바로잡는 시민모임’의 회장직도 맡고 있는 와타나베 마사미쓰(88). 심의회는 지방 공무원 출신인 그를 비롯해 피폭자 단체 대표와 역사 연구자, 공익단체 대표 등 20명으로 구성돼 있다. 와타나베 회장이 이끄는 시민모임의 한 관계자는 “핵무기 사용이 허용돼서는 안된다는 것을 전하는 시설에 일본군의 (과거 만행의) 역사 전시는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기해자로서 자행한 범죄행위는 잊고 일본이 원폭 등으로 당한 피해만 기억하고 전시해야 한다는 얘기로 들린다. 나가사키 시는 그들의 주장대로 자료관을 새로 개보수하면서 일단 기존 전시물들을 모두 철거할 방침이다. 스즈키 시로 나가사키 시장은 8월 1일 “운영심의회 의견을 살피면서 구체적인 전시내용에 대해 검토해 가겠다”고 말했다. 가해 사실 자료들이 살아남기 어렵게 됐다.
가해 행위 전시물들이 전국적으로 철거, 축소 중
이미 전시 중인 가해행위 전시물들이 각지에서 철거, 축소되고 있다. 일본 패전 70주년이던 2015년, 오사카 대공습 피해 사실을 알리는 오사카 국제평화센터(피스 오사카)를 개보수할 때 기존의 가해 전시물들이 철거됐다.
지난해 군마 현에서는 일제 때 전시동원당했다가 숨진 조선인들 추도비가 철거됐다. 추도식에서 ‘강제연행’ 등에 대해 언급한 것이 추도비 설치조건에 위반된다고 군마 현은 주장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군함도(하시마 섬) 자료 전시관에도 한국과 합의한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을 적시하지 않았고, 유네스코 쪽의 수정 요구도 거부했다.
일본 전국의 역사자료관과 평화박물관을 조사해 온 도쿄대 공습·전쟁재난 자료센터의 전 학예원 야마베 마사히코(79)는 “전국적으로 가해 전시가 사라지고 있다. 전쟁의 전체상을 전하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 될 것들이기 때문에, 자치체가 외부세력의 항의가 무서워 자율규제를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다.
지역활동가 고마쓰 리켄은 “가해의 역사 ‘전시’는커녕 ‘사실 인정’조차 거부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 거기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는 그런 움직임이 예전부터 있었지만 최근에 점점 더 지지를 받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며 “단순히 시간이 지났기 때문인가, 아니면 당사국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기 때문인가”라고 물었다.
당사국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다는 얘기는 기사의 문맥으로 보건대 거대한 힘을 갖게 된 중국에 대한 위협감이나 과거사 및 최근 제정된 ‘간첩법’과 관련된 반감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중국에 대한 적대감이나 혐오감이 커지면서 자국의 과거 가해사실을 정당화하거나 축소하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올해 8.15 한국(한반도)에는 침묵
이번 8.15에는 일본 전후 80년에 대한 특집들이 일본 언론에 여럿 등장했지만 한국(한반도)과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사히>가 특집에다 이런 기사들, 그리고 사설(‘전후 80년과 총리, 역사의 교훈 주눅들지 말고 제시하라’ 8월 7일)까지 실어 아 문제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촉구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그것을 한국(한반도)과의 관계 또는 그런 맥락에서 깊이있게 짚은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윤석열 정권 때의 퇴행적인 한일 역사인식 반전(反轉)과 친일적 ‘과거사 청산’으로 양국관계가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듯’한 분위기 속에 잠잠해졌기 때문일까. 이 또한 지역활동가 고마쓰 리켄이 말한 '당사국에 대한 인상'을 바뀌게 만들었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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