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혁명’이 제자리 찾아준 ‘광복절다운' 경축사

오태규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실장
오태규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실장

뚜껑이 열리기 전부터 이재명 대통령의 제80주년 광복절 경축사는 국내외의 큰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광복절 경축사’는 당대 정부의 중요한 대외정책을 발표하는 중요한 창구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윤석열의 내란을 진압하고 인수위도 정식 취임식도 없이 등판한 이재명 정권은 그동안 묵직한 대외정책을 발표할 겨를도 기회도 없었습니다. 이번 광복절 경축사가 대외정책다운 정책을 발표하는 첫 무대이고, 그래서 관심도 더 뜨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 정부의 중요한 대북정책과 대일정책 발표는 광복절 경축사가 거의 전담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제의 압박과 고통에서 벗어나 광복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남북분단의 아픔을 맞이한 쓰라린 경험이, 광복절 경축사에 그런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겨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윤석열이 3번 연속 짓밟은 광복절 경축사 되찾은 이 대통령

하지만 윤석열 정권 3년 동안(2022년, 23년, 24년) 광복절 경축사는 이런 역할을 철저하게 무시·외면했습니다. 가장 황당한 일은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피한 것입니다. 보수·진보 가리지 않고 역대 어느 정권의 경축사에서도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2022년 경축사에서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양국의 미래와 시대적 사명을 향해 나아갈 때 과거사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며 과거사를 거론하는 시늉만 하더니, 23년에는 느닷없이 일본을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로 격상시켰습니다. 24년 경축사에서는 아예 일본 관련 내용을 완전히 뺀 채 북한 흡수통일 정책과 국내 반대 세력 공격에만 장광설을 늘어놨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의 제80주년 광복절 경축사는, 우선 윤석열 정권 때 일탈했던 3번의 경축사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놨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내란 수괴 윤석열을 몰아낸 빛의 혁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대통령도 그 때문인지 경축사에서 세 번이나 ‘빛의 혁명’이라는 표현을 쓰며 경의를 표했습니다.

제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일본을 향한 메시지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대통령이 어느 정도 강도로 일본의 과거 문제를 언급할 것이냐가 매우 궁금했습니다. 한일 양국이 처한 국제 상황과 시점이 미묘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지금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거센 안보·경제 압박 공세에 아픔을 공유하는 ‘동병상련’의 한일 두 나라는 갈등보다는 협력을 택해야 할 상황입니다. 여기에 이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일주일여 뒤인 23일 정상회담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80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2025.8.15.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80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2025.8.15. 연합뉴스

"과거 아픈 역사 직시하고 미래 위해 협력하자" 

이 대통령은 “올해는 광복 80주년이자 한일 수교 60주년”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로 나아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입니다”, “일본 정부가 과거의 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양국 간 신뢰가 훼손되지 않게 노력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와 함께 “일본은 마당을 같이 쓰는 우리의 이웃이자 경제 발전에 있어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중요한 동반자” “양국이 신뢰를 기반으로 미래를 위해 협력할 때 초격차 인공지능 시대의 도전도 능히 헤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점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미래를 향한 협력에 무게중심을 두면서도 과거를 잘 극복하면 더욱 그 속도와 폭이 빨라지고 넓어질 것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보아 ‘과거에 대한 통절한 반성의 기초 위에 미래 협력’을 밝힌 ‘1998년 한일 공동 파트너십 선언’을 유연하게 이어받은 발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평소 역사와 영토 문제에 관해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해 일본에서 대일 강경파로 알려진 이 대통령이지만, 엄중한 국제정세를 고려해 절제와 고심이 어린 유화적인 메시지를 발신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유화적인 자세를 취했다고 해서 암초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외교는 상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호응이 중요합니다. 일단 이시바 총리가 15일 열린 전몰자추도식 연설에서, 2013년 아베 정권의 등장 이후 사라졌던 2차대전에 대한 “반성‘이란 단어를 부활시킨 건 긍정적인 신호입니다.

엄중한 정세에 가려져 있는 강제 노동, ‘일본군 위안부‘, 독도 등 역사·영토 문제가 어떤 계기로 수면 위로 올라올 때, 한일 관계의 전반이 흔들릴 수 있는 위험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위험을 잘 관리하고 넘어갈 수 있느냐에 이 대통령의 멀티 트랙 대일 외교, 양국 정상이 내세우고 있는 ’왕복 외교(셔틀 외교)‘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일 서울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독립전쟁 영웅 5인 흉상 제막식에서 사관생도와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육사는 독립전쟁에 일생을 바친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탄피 300kg을 녹여 제작했다. 2018.3.1. 연합뉴스
1일 서울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독립전쟁 영웅 5인 흉상 제막식에서 사관생도와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육사는 독립전쟁에 일생을 바친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탄피 300kg을 녹여 제작했다. 2018.3.1. 연합뉴스

국내에서는 항일 독립운동가 모욕 행위 처벌 암시

이 대통령이 독립투쟁의 역사와 독립 유공자의 헌신을 찬양하면서 “독립투쟁의 역사를 부정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하는 행위는 이제 더 이상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꼭 집어 말한 것도 의미가 깊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물든 뉴라이트 계열의 폭주를 겨냥한 말이라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윤석열 정권 때 위안부 기림비에 몰려가 “위안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거나 위안부 피해자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는 사람들이 기승을 부리자, 정의연 등 시민단체들은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허위 사실 유포나 모욕 등을 처벌할 수 있도록 ‘위안부피해자법’ 개정을 주장해 온 터였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탄핵 재판 최후변론에서 탄핵소추단의 장순욱 변호사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 가사라면서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라는 말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 대통령의 이번 광복절 경축사를 들으면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을 느낀 것은 저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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