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인 한미 정상 회담을 위한 제언②
전체주의 세력과 싸우며 특별해진 영·미
처지는 달랐어도 변증을 통해 동반 성숙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수용한 처칠
미국의 중립주의 한계 인정한 루스벨트
강단있고 성숙한 한국 외교실력 보여야
반세기 전 유행했던 광고 문안이 있다. "Best of All…It is a Cadillac." 의역하면 "최고의 최고, 캐딜락"이다. 물건, 사람, 자연환경, 또 특정 상황이 경쟁을 허용하지 않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히말라야는 자동차로 치면 캐딜락이다' 같은 비교는 쉽게 귀에 들어오고 오래 기억된다. 히말라야는 웅장하고, 멋지고, 힘차다. 그리고 유혹한다. 몽블랑은 만년필의 캐딜락이라 불렸다. 눈에 띄는 고급스러운 검은 색상, 단단한 디자인, 힘이 느껴지는 펜촉, 그리고, 몽블랑 하나 주머니에 꽂고 다니고 싶은 유혹이 있었다. 80년대 초까지 캐딜락이 그랬다.
정상외교의 캐딜락은 윈스턴 처칠(1874~1965) 영국 총리와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의 관계였다. 역사적으로 미국과 영국 사이를 '특별한 관계(special relations)'라 불렀는데, 처칠과 루스벨트는 '특별한 결합(special bonding)'이었다. 이 둘의 관계는 앞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 이재명 대통령과 한국의 외교팀이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상대는 트럼프 대통령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변증법은 없다. 무슨 말인가? A와 B는 양극이다. 충돌과 마찰은 필연이다. 이 모순 관계가 생산하는 에너지를 통해 A와 B의 관계를 한 단계 상승시켜야 하는데, 그는 A가 B를 압도한 상태를 최적으로 본다. 우두머리 수컷이 등극해야 하는 동물의 세계가 그렇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제나 상대의 요구를 완전 무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이지는 않는다. 때로 일정한 양보를 하는 제스처도 보인다. 하지만 절충과 타협은 변증이 아니다. 조삼모사는 원숭이와 주인의 관계를 바꾸지 못한다. 나중에 실상을 파악하면 정체된 현실에 대한 분노가 더 커진다.
최악은 면했다고 안도하는 한미 관세 협상의 안개가 사라지니, 트럼프 행정부는 한미 군사 관계 영역에서 많은 요구를 하고 있다. 전형적인 조삼모사 전략인데 이런 행태를 외교라 부르지 않는다. 외교의 궁극적 목표는 변증이어야 하는데, 지금 한미 관계의 질적 변화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래서 트럼프와의 외교는 트럼프를 넘어야 한다.
처칠과 루스벨트의 관계가 학습 가치가 있는 이유는 변증법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1930년대 중반부터 영국과 미국의 관계에는 마찰음이 있었다. 미국은 유럽 나라들의 잦은 전쟁의 이유를 기세등등한 민족주의와 여기서 파생된 영토 확장의 욕심 때문으로 보았다. 이 관점에서 영국은 천사의 나라가 아니었다. 1930년쯤에는 세계 영토의 20%, 세계 인구의 25%를 통치하던 나라였다.
민족 우월주의라면 영국을 앞서는 독일 같은 나라가 이 상태를 자연적인 지정학적 현실로 받아들일 리 없었다. 1933년 독일의 최고 지도자가 된 히틀러는 곧 게르만 민족의 1000년을 버틸 '생존 공간'이란 개념을 들고나와 침략전쟁을 예고했다.
대영제국 국기 '유니언 잭'이 휘날리는 공간 확보에 대한 끝이 없는 욕심, 경쟁국들의 시기와 도전을 자극하는 대륙과 대양을 엮는 제국주의 등이 미국인들이 본 영국과 유럽의 문제였다. 누가 더 크고 잘났나를 놓고 벌이는 경쟁이 초래한 분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끼어들어 미국이 피해를 봐서는 안 된다는 정서가 널리 퍼져 있었다.
영국의 의회정치를 연구한 학자 출신인 우드로 윌슨 대통령도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립을 선언하면서 우리는 다르니 신중하자고 외쳤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흔들리지 않는 판단력, 자제력의 품위, 냉정한 행동의 효율성을 보여주는 나라, 다른 나라를 비판하거나 자신의 판단에 흔들리지 않고, 정직하고 사심 없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시키고 자유를 유지하는 나라."
"a Nation fit beyond others to exhibit the fine poise of undisturbed judgment, the dignity of self-control, the efficiency of dispassionate action; a Nation that neither sits in judgment upon others nor is disturbed in her own counsels and which keeps herself fit and free to do what is honest and disinterested and truly serviceable for the peace of the world."
좋게 말하면 중립성, 나쁘게 말하면 고립주의인데, 미국은 유럽과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도 미국은 이런 생각을 했다.
미국 내에 나치 독일을 향한 긍정적인 시각도 있었다. 주영 미국 대사였던 조세프 케네디(존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가 대표적이다. 독일계 미국인의 수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바이마르 독일의 혼돈 상태를 히틀러가 정리하고 안정감을 회복했다는 평가도 있다. 독일의 반유대인 정책이 불편했지만, 미국에도 반유대인 정서는 강했다. 히틀러에게 호감을 갖은 미국인이 없지 않았다.
영국도 미국에 불만이 없지 않았다. 팽창정책을 따지자면 미국도 영국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 영국의 식민 지배가 미국에 손해될 것도 없었다. 가볍게 표현해서 영국이 세상에 영어를 가르쳐 놓은 덕분에 미국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 수 있지 않은가? 영국의 대양 패권, 해군력은 평화로운 국제 교역을 가능케 했고, 세계시장 지배에 나선 미국에 도움이 되는 요소였다. 미국이 영국의 도움을 받으면서 대서양 저편에 서서 유럽의 제국주의에 손가락질할 처지가 아니라는 볼멘소리도 들렸다.
정리하면, 처칠과 루스벨트, 영국과 미국은 히틀러 덕에 소위 '허니문'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긴장 요소를 확인했다. 다음은 루스벨트가 요약한 둘 사이의 마찰음이다.
"처칠은 자신이 대영제국의 해체를 주재하기 위해 총리가 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나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하는 말인데, 미국은 단지 영국이 식민지 주민들을 계속 짓밟게 해주기 위해 이 전쟁에서 영국을 돕지 않을 것이다."
"Churchill told me that he was not his Majesty’s Prime Minister for the purpose of presiding over the dissolution of the British Empire. I think I speak as America’s President when I say that America won’t help England in this war simply so that she will be able to continue to ride roughshod over colonial peoples."
"식민주의 체계는 전쟁을 뜻한다(colonial system means war)." 루스벨트의 결론이다. 결국 대영제국이 문제라는 말이다. 영국이 거의 2년 동안 홀로 히틀러를 상대해 싸우고 있던 1941년 8월의 대화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미국이 영국을 돕고, 영국은 몇 %의 식민지를 언제까지 독립시킨다는 절충안이 두 지도자, 두 나라 사이에 마련됐다고 가정해 본다. 이것은 변증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처칠과 루스벨트가 이룩한 역사의 변증이 있다. 그들은 전체주의 세력과의 전쟁을 통해 제국주의의 본질이 권위주의와 독재임을 피부로 느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싸운다면 서구의 식민 통치를 당연시할 수 없음은 확실해졌다.
이 변증의 결과물이 '대서양 헌장(The Atlantic Charter)'이다. 인류 전체를 위한 최고의 이상이 다음에 담겨있다.
"나치의 폭정이 최종적으로 파괴된 후, (영국과 미국은) 모든 국가가 자신의 국경 내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이 땅의 모든 사람이 두려움과 궁핍에서 자유롭게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줄 수 있는 평화가 확립되기를 바란다."
"after the final destruction of the Nazi tyranny, they hope to see established a peace which will afford to all nations the means of dwelling in safety within their own boundaries, and which will afford assurance that all the men in all the lands may live out their lives in freedom from fear and want."
1942년 1월 이 이상의 상징이며 구현체로서 '국제연합(The United Nations)'이 처음으로 제기됐다.
세계 공동체의 운영 질서를 더 높은 단계로 끌어 올리려는 처칠과 루스벨트의 변증법적 의기투합을 다시 A.B.C.로 풀어 본다. 합의 (Agree), 교환(Barter), 연계(Connect)를 말한다.
처칠과 루스벨트에게는 확실한 합의점이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와 '추축국(Axis Power /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 군국주의 연합)'은 사라져야 한다는 전의(戰意)였다. 이 목적을 위해서 해양강국 영국이 건재해야 했다.
1940년 12월 29일 루스벨트는 '민주주의의 무기고(the arsenal of democracy)'란 연설을 했다. 홀로 나치스 군대와 싸우고 있는 영국에게 격려의 말이 아니라, 확실한 물질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외쳤다. 영국이 독일에 패하면 그것이 인류의 비극이라 했다. 이 연설에서 루스벨트는 미국인들에게 물었다. 자유의 나라 영국이 대서양에서 해군력으로 미국의 이웃 역할을 해주는 한 아메리카 대륙이 추축국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것이라고 진지하게 믿는가? 반대로 추축국이 대서양에서 미국의 이웃이 된다면 안심할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는가? 답은 '아니다'이다.
루스벨트는 "영국이 무너지면 추축국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공해를 장악하게 될 것이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우리가 모두 그들의 총구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전 세계가 무자비한 무력의 위협에 시달리는 새롭고 끔찍한 시대로 접어들 것이다. 전체주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미국도 전시 경제를 기반으로 한 군국주의 국가로 영구히 전환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발언은 6개월 전인 1940년 6월 처칠이 천명한 영국의 결의에 대한 화답으로 볼 수 있다.
처칠이 영국은 어디서든지 싸우겠다고 한 그 유명한 연설이다.
"우리는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나아갈 것이다. 프랑스에서 싸우고, 바다와 대양에서 싸우고, 공중에서 점점 더 자신감과 힘을 키우며 싸우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 섬을 수호할 것이다. 해변에서 싸우고, 상륙 지점에서 싸우고, 들판과 거리에서 싸우고, 언덕에서 싸우고,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영국과 미국이 추축국을 무찔러야 한다는 의견일치가 이루어졌지만, 양국이 실행 방식에서 완전한 일치를 보지는 못했다. 한 예로 처칠의 간절한 호소에도 미국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격 당한 뒤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이어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하자 미국도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두 해 동안 영국이 홀로 싸웠다. 양국은 전후의 세계에 대한 비전도 달랐다. 처칠은 영국의 제국주의가 사라진 세상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루스벨트는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자유로운 세상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이 근본적 이견을 둘은 변증으로 극복했다. 전체주의, 군국주의에 대한 공동 투쟁에 대한 합의는 성립됐고, 이를 위한 교환이 이루어졌다.
루스벨트의 '민주주의의 무기고' 연설 뒤 3개월. 1940년 3월 11일 루스벨트는 '무기대여법 (Lend-Lease)'에 서명했다. 영국을 위시한 추축국과 전쟁 중인 나라에 대한 미국의 대규모 원조가 시작됐다. 미국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수 물자와 연료, 양식과 일상용품을 대여 또는 공여 형식으로 제공했다. 영국은 1945년까지 미국으로부터 310억 달러 상당의 지원을 받았다. 이는 오늘날의 가치로 치면 17배인 5270억 달러이다. 원화로 하면 685조 원이 넘는 액수다.
일방적 원조가 아니었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안보를 위한 투자라며 미국인들을 설득했다. 진화(鎭火) 논리를 폈다. 옆집에 불이 났다. 불을 끄려면 호스가 필요하다. 이웃에게 호스를 빌려주어야 불이 내 집으로 옮기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옆집에 제공한 호스가 내 것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영국을 도와주고 미국이 받을 반대급부를 루스벨트가 한마디로 정리했다. '남의 전쟁'에 끼어들기 싫으면 그 '남의 승리'를 위해 도와야 한다. 처칠도 영국과 미국의 교환 관계를 한마디로 정리했다. '런던 대공습(The Blitz)'이 가해지던 1941년 2월 9일 처칠의 외침이다. "연장만 달라, 일은 우리가 끝내겠다. (Give us the tools, and we will finish the job)."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전쟁에 뛰어들면서 미국 사회는 전쟁을 통해 자신을 돌아 보고, 더욱 뚜렷한 정체성을 확립했다. 아래 포스터에서 보듯 미국의 독립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을 똑같은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규정했다. 가장 소중한 전리품일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국이 영국에 퍼주기만 했나? 물론 아니다. 미국이 제공한 물자를 들고 나가 영국은 싸웠다. 영국의 군사적 희생이 연합국의 승리에 절대적 요소였다. 영국(United Kingdom)은 38만 명의 병사를 잃었고, 독일의 공습으로 민간인 7만 명이 사망했다. 또 영국은 미국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미국의 연합국에 전쟁 물자와 연료, 식량, 일상용품을 지원하면서 미국이 성숙해졌다. 풍요와 소비로 요약되었던 미국의 물질적 생활 양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또 이 과정에서 프로파간다에 가깝지만, 백인과 흑인이 인종의 차이를 넘어 같이 힘을 합쳤다는 이미지도 나왔다. 아래 포스터들이 이 메시지를 전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는 10만 명에 달하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공권력의 남용과 국가 폭력이 발생했다. 영국도 종전 후 즉각적인 제국주의 종식을 위한 조처를 하지 않았다. 뒤늦게 서두르다 인도 분할 같은 비극의 씨앗을 뿌렸다. 전후 이어지는 냉전은 세계 공동체를 두 패로 나누고 패싸움을 시켰다.
그럼에도 제2차 세계 대전 중 처칠과 루스벨트 사이의 특별한 정상 외교를 통해 영국과 미국은 공동의 목표를 설정했고 이를 추구해 가면서 성숙한 지도자적 국가로 승화했다. 영국은 불굴의 의지를, 미국인들은 전장으로 달려가기도 했지만, 생산력을 최고로 가동해 연합군을 지원했다. 성숙한 변증 외교의 사례이다.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외교를 포기한 채 전방위적 압박을 해오는 트럼프 대통령이 처칠-루스벨트의 선례를 학습하길 바란다. 그럴 가능성이 작으니 이재명 대통령이 정확히 이 역사를 인식해 외교의 근본을 지켜야 한다. 후대를 위해 트럼프 대통령을 넘어서 성숙하고 강단 있는 한국 외교의 진면목을 보이기 바란다. 상대는 권불오년(權不五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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