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례방 사건 240주년, 한국인 신부 탄생 180주년
명동에서 신앙 공동체 집회 열다가 형조에 적발
김대건 15세 때 최양업·최방제와 함께 마카오 유학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 받고 귀국해 활동 중 순교
2025년은 을사년인데, 을사년은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에서 매우 뜻깊은 해다. 지금으로부터 240년 전인 1785년 3월 최초의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비밀 집회를 열다가 형조(刑曹)에 적발돼 수난을 당했다. 장소가 지금의 서울 중구 명동이어서 옛 지명을 따 ‘명례방(明禮坊) 사건’이라고 한다. 사건이 일어난 해의 60간지(干支)와 형조의 별칭을 따서 ‘을사추조(乙巳秋曹) 적발사건’이라고도 부른다.
그로부터 60간지가 한 바퀴 돌고 난 1845년 을사년에는 경사를 맞는다. 김대건이 중국 상해에서 한국인 최초의 신부로 임명된 것이다. 중국 사절단원인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간 이승훈이 스스로 성당에 찾아가 처음 세례를 받은 지 61년 만의 일이었다. 10년 뒤에는 충북 제천 배론마을의 천주교 신도 장주기 집에서 성요셉신학당이 문을 열었다. 올해는 명례방 사건 240주년, 김대건 사제 서품 180주년, 가톨릭대 개교 170주년이다.
정조 “정학 바로 세우면 천주학 사라질 것”
권철신, 이벽, 정약용 등 남인 계열의 학자들은 1777년부터 1779년 사이에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과 여주 주어사에서 천주학 강학회(講學會)를 열어 천주교 교리를 놓고 토론했다. 이때까지는 신앙 모임이라기보다 학술 토론회에 가까웠다.
이승훈이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벽은 그에게 천주학 자료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승훈은 북경 북천주당에서 그라몽 신부와 필담으로 교리 문답을 주고받다가 감복해 세례를 받고 싶다고 요청했다. 베드로란 세례명을 받은 그는 천주교 성물(聖物)과 성경을 갖고 귀국한 뒤 이벽, 권일신, 윤지충 등 양반들에게 교리를 알려주며 세례를 베풀었다. 성경 번역을 위해 최창현, 김범우 등 역관도 끌어들였다. 1784년 12월부터 김범우 집에서 모여 미사를 올리고 교리를 공부하다가 석 달 만에 적발돼 체포됐다.
형조는 도박 모임이 열린다는 고발이 들어오자 금리(禁吏)들을 보내 덮쳤으나 뜻밖에도 신앙 모임이었다. 형조는 이벽, 이승훈, 정약전·약종·약용 형제 등 양반들은 모두 석방하고 중인인 김범우만 장형(杖刑)에 처한 뒤 충북 단양(경남 밀양이라는 설도 있음)으로 유배했다.
일부 유생은 “충효 사상을 훼손하고 국가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라며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는 서학(천주교)을 삿된 학문으로 여기면서도 “한때의 유행일 뿐이니 정학(성리학)을 바로 세우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며 중벌을 내리지 않았다.
김범우는 2년 뒤 장형 후유증으로 유배지에서 숨졌다. 일각에서는 그를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마 교황청이 인정하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는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참수된 윤지충과 권상연이다.
유교식 제사를 폐지하고 조상의 신주를 불태운 행위는 당시로선 강상(綱常)의 윤리를 범한 중죄여서 천주교에 관대했던 정조도 사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명례방 모임이 열렸던 자리에는 1898년 명동대성당이 세워졌다. 전북 전주의 신해박해 순교 터에는 전동성당이 들어서 있다.
사제 후보를 고르는 모방 신부의 4가지 기준
평신도인 이승훈이 미사를 집전한 것은 교회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천주교 북경교구는 1790년 조선교회에 전례 금지령을 내리고 17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파송했다. 그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처형된 뒤 1835년 프랑스 출신의 피에르 모방 신부가 입국해 신도들을 이끌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조선 천주교회는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꾸준히 신도를 늘려갔다.
모방 신부는 조선에서 천주교 교세를 지속적으로 넓히려면 조선인 사제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후보를 물색했다. 선발 기준은 ▲때 묻지 않은 소년일 것 ▲천주교 집안일 것 ▲신앙심 깊고 본인은 물론 가족도 신부가 되기를 바랄 것 ▲건강하고 근면할 것 네 가지였다.
이에 따라 1836년 2월과 3월 최양업과 최방제가 차례로 뽑혔다. 7월에는 김대건이 합류했다. 각각 충남 청양·홍성·당진 출신으로 최방제는 1820년생, 나머지 둘은 1821년생이었다. 최양업은 최방제의 4촌 동생이었다. 최양업 외할아버지가 김대건 할머니와 남매여서 김대건과는 6촌 간이었다.
모방 신부는 서울 뒷골(현 중구 주교동)의 정약종 아들 정하상 집에서 이들에게 천주교 교리와 라틴어를 가르치다가 당시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던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그해 12월 세 소년은 압록강을 건너고 만주를 거쳐 중국 대륙을 도보로 종단한 뒤 이듬해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조선 학생들은 신심과 면학열 등 모든 면에서 완벽”
이들은 파리외방전교회가 마카오에 임시로 세운 조선신학교에서 천주교 신학과 라틴어, 프랑스어, 서양철학 등을 배웠다. 최초의 서양 유학생 유길준이 미국 덤머고등학교에 입학한 해보다 47년 앞서 외국에서 서양 학문을 배운 것이다.
신학교 교장이던 칼레리 신부는 파리신학교에 보낸 편지에서 “조선의 학생들은 훌륭한 사제로서의 덕목을 갖췄다. 신심, 겸손, 면학열, 스승에 대한 존경심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극찬했다.
그러나 최방제는 5개월 만에 열병을 앓다가 선종(善終)했다. 1839년에는 마카오에서 민란이 일어나 김대건과 최양업은 교수 신부들과 4월부터 11월까지 필리핀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그해 조선에서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 모방을 비롯한 세 명의 프랑스 신부가 순교하고 김대건 부친과 최양업의 부모도 처형됐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프랑스 함대의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이 조선 원정을 앞두고 조선인 신학생들을 통역으로 쓰겠다고 제안하자 1842년 각기 다른 배를 타고 마카오를 떠났다. 당시 조선은 또다시 ‘목자(牧者) 없는 교회’가 됐기 때문에 김대건·최양업과 프랑스 신부도 이 기회를 활용해 조선에 입국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해 8월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남경조약이 체결돼 세실 제독의 원정 계획은 무산됐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중국 길림성 장춘에서 다시 만나 학업을 이어가다가 1844년 12월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에 의해 부제(副祭)로 임명됐다.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입국을 준비하기 위해 1845년 1월 조선을 비밀리에 방문했다. 배를 한 척 사들여 라파엘호로 명명하고 석 달 만에 중국 상해로 돌아갔다.
페레올 주교는 조선 입국을 앞두고 그해 8월 17일 상해 김가항(金家港)성당에서 김대건을 사제로 서품했다. 만 24세 생일 나흘 전이었다. 김대건은 1주일 뒤 상해 예수회신학교 횡당(橫塘)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
옥중에서 세계지리편람 저술하고 세계지도 번역
김대건은 8월 31일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떠났다.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에 표착했다. 배 수리를 마치고 제주를 떠나 전북 익산의 금강 하구 나바위에 상륙한 것은 10월 12일이었다.
그는 나바위 인근의 충남 논산 강경에서 사목을 시작한 데 이어 자신이 모방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던 경기도 용인의 은이(隱里)공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조선교구 부교구장도 맡아 페레올 주교를 보좌하며 한양(서울)과 경기도 일대를 누볐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입국 경로를 개척하고자 중국 어선을 통해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지도와 편지를 보내려다가 1846년 6월 5일 황해도 옹진반도 인근 순위도에서 붙잡혔다. 해주의 황해감영의 문초 과정에서 천주교 신부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국법에 따라 사형을 면할 수 없었으나 조선 조정은 그를 살려두려고 했다.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에 능통할 뿐 아니라 서양 사정에 밝아 쓸모가 많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기해박해로 불거진 프랑스와의 외교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김대건은 옥중에서도 조정의 요청에 따라 세계지리편람을 저술하고 영국제 세계지도를 번역해주기도 했다. 김대건 신부가 깃털 달린 펜으로 잉크를 찍어 꼬부랑 글씨(필기체 서양 문자)를 써 보이자 관리들이 마술이라며 감탄했다는 일화도 있다.
조정은 그를 모질게 고문하는 동시에 “천주교만 버리면 죄를 묻지 않는 것은 물론 벼슬까지 내리겠다”고 회유했으나 김대건은 배교(背敎)를 거부하고 9월 16일 서울 용산의 새남터에서 신도 8명과 함께 참수됐다.
김대건을 비롯한 병오박해(丙午迫害) 순교자들은 1925년 복자(福者)품을 거쳐 1984년 성인(聖人)품에 올랐다. 한국 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大主保·수호성인과 비슷한 뜻)로 모시고 있다. 천주교 수원교구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탄생한 김가항성당이 상해인민정부의 도시계획에 따라 2000년 철거 대상에 포함되자 부재 일부를 옮겨와 2016년 은이성지에 복원했다.
김대건은 피의 순교자, 최양업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두 차례 입국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접하자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는 홍콩으로 돌아갔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현석문의 일기를 편집해 ‘기해일기’라는 책을 펴내고 이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중국 만주의 요령성에서 사목활동을 펼치다가 1849년 12월 입국했다. 12년간 조선 전역을 누비며 선교와 사목, 번역과 저술 등에 힘쓰다가 과로로 1861년 순직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김대건 신부를 피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는 땀의 순교자라고 부른다. 피를 흘리지 않고 천주교 선교를 위해 온몸을 바쳤기에 최 신부를 백색 순교자로 칭하기도 한다.
순교자를 제외하고는 한국인 가운데 처음으로 로마 교황청이 시복(諡福) 절차에 들어가 덕행 심사를 마친 뒤 2016년 복자의 전 단계인 가경자(可敬者)로 선포했다. 현재 마지막 기적 심사를 남겨 두고 있다.
유네스코는 평등사상과 박애주의를 실천하고 국제 상호이해에 앞장선 김대건 신부를 탄생 200주년인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한 바 있다. 지난해 1월에는 김대건 석상이 동양인 최초로 로마 바티칸의 성베드로대성당에 설치되기도 했다. 올해도 한국 천주교회는 을사추조 적발사건 240주년과 김대건 사제 서품 180주년을 맞아 기념 심포지엄과 기념 미사 등을 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 천주교 전래사에서 기적
한국 천주교는 서양 학문과 사상에 대한 지식인의 관심에서 출발했으나 힘 없고 가난한 백성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가 희망의 등불이 됐다. 신도들은 혹독한 수난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아 순교의 피를 뿌렸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세계 천주교 전래사에서도 기적으로 꼽힌다.
한국 고유의 전통을 무시한 채 서구 중심의 동양관에 매몰돼 선교하다가 갈등을 낳는가 하면, 한반도를 둘러싼 서양 열강의 각축전과 일제의 침탈 과정에서 반민족적 행위로 논란을 빚기도 했으나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근대 사상과 선진 학문에 눈뜨게 만들었다.
김대건도 신앙인에만 머물지 않았다. 유네스코의 평가대로 종교를 떠나 평등과 박애를 실천한 사회운동가이자 개혁자였으며, 새로운 세상에 도전하며 국제 상호이해에 앞장선 글로벌 리더이기도 했다.
8월 17일 김대건 사제 서품 180주년과 8월 21일 탄생 204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15세의 나이로 마카오 유학을 떠나던 소년 김대건의 심경을 떠올려본다. 그가 품었던 소망은 생전에 이루지 못했지만 그가 뿌린 피는 헛되지 않아 한국 천주교는 영광의 역사를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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