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해이’라는 유령의 정체 똑바로 직시해야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홍종학 전 국회의원 · 중소벤처부 장관
홍종학 전 국회의원 · 중소벤처부 장관

정부가 또다시 수십조 원 규모의 부채 탕감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 커뮤니티는 ‘성실하게 빚 갚는 사람만 바보 된다’는 원성으로 들끓는다. ‘도덕적 해이’라는 익숙한 단어가 어김없이 소환되고, 빚을 진 개인의 책임과 윤리가 도마 위에 오른다.

이 분노는 정당한가? 물론이다. 하지만 그 분노의 화살이 향하는 방향이 과연 올바른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논란은, 우리 사회가 ‘가계부채’라는 문제를 얼마나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씁쓸한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외줄타기 하는 곡예사를 위한 안전 그물망

정부의 부채 탕감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비슷한 정책이 반복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정책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우리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을 드러내는 ‘증상’에 가깝다는 것이다.

상상해보자.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쇼가 매일 열리는 서커스가 있다. 그런데 이 서커스에는 안전 그물망이 없다. 곡예사들은 ‘떨어지면 네 책임’이라는 각서를 쓰고 줄에 오른다. 당연히 사고가 잦고, 그때마다 단장은 비싼 돈을 들여 구급차를 부른다. 관객들은 곡예사의 부주의를 탓하지만, 누구도 ‘왜 안전 그물망을 설치하지 않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여기서 곡예사는 ‘채무자’, 구급차는 ‘정부의 부채 탕감’, 그리고 부실한 안전 그물망은 ‘유명무실한 파산 제도’다. 안전 그물망이 부실하니, 정부가 ‘세금’이라는 값비싼 에어매트를 들고 뛰어다니며 임시방편으로 문제를 막는 형국이다.

 

공중 곡예사 닉 왈렌다(오른쪽)와 리자나 왈렌다가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상공에서 외줄 위를 걷고 있다.  2019. 06. 24  AP 연합뉴스
공중 곡예사 닉 왈렌다(오른쪽)와 리자나 왈렌다가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상공에서 외줄 위를 걷고 있다.  2019. 06. 24  AP 연합뉴스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 뒤에 숨은 ‘대출자 도덕적 해이’

우리가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외치는 동안, 정작 이 문제의 핵심에 있는 ‘대출자의 도덕적 해이’는 교묘히 모습을 감춘다. 상환 능력을 따져보지 않고, 일단 빌려주고 보자는 식의 영업으로 수익을 올린 금융기관들의 책임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알고 있었다. 파산은 인생 실패라는 사회적 낙인과 가혹한 추심 절차가 채무자를 압박해 어떻게든 돈을 갚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이용하고 있다. 주택담보대출의 원리금을 못 갚으면 채무자는 평생 모은 재산을 날리지만 금융기관은 높은 수익을 얻게 된다. 즉, 금융기관의 리스크 관리는 채무자의 ‘성실함’과 ‘공포심’에 기생해 온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도덕적 해이다. 리스크 심사라는 본연의 의무는 소홀히 한 채 이익을 극대화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부실 채권의 위험은 결국 정부의 탕감 정책, 즉 국민의 세금으로 전가시킨다. 이 구조 속에서 분노의 대상이 왜 연체이자에 허덕이는 개인이 되어야 하는가.

파산 제도는 시혜 아닌 경제의 ‘사회 안전망’이다

세계에서 금융이 가장 발전한 나라라고 알려진 미국은 역설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채무자에게 관대한 파산 제도를 가졌다. 파산 제도는 ‘사회적 보험’으로 금융시장의 활성화를 위한 중요한 조치라는 점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실패한 사람에게 ‘새출발(Fresh Start)’의 기회를 주는 것이 경제 전체의 활력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냈다.

이는 단순히 자비로운 조치가 아니다. 강력한 파산 제도는 금융기관에게 ‘책임 있는 대출’을 강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금융 건전성 관리기구의 역할을 한다. 채무자가 파산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 있음을 알기에, 돈을 빌려줄 때부터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시장 원리에 기반한 건강한 리스크 관리다.

결국 정부의 반복적인 부채 탕감 정책은, 금융감독 당국의 대출 건전성 관리도 이루어지지 않고 법원을 통한 정상적인 파산 및 면책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빚의 무게에 짓눌린 개인들이 법원의 문을 두드리는 대신, 몇 년이고 고통 속에 버티다 정부의 ‘특별 사면’을 기다리는 기형적인 구조가 고착화된 것이다.

 

19일 정부서울청사 창성별관 앞에서 열린 '불법추심근절 금융소비자 보호 과제 발표 기자회견'에서 금융정의연대 등 참석자들이 관련 내용의 손피켓을 들고 있다. 2025.6.19 연합뉴스
19일 정부서울청사 창성별관 앞에서 열린 '불법추심근절 금융소비자 보호 과제 발표 기자회견'에서 금융정의연대 등 참석자들이 관련 내용의 손피켓을 들고 있다. 2025.6.19 연합뉴스

분노의 방향을 바꾸자

정부의 부채 탕감 정책을 향한 비판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 비판은 ‘왜 저들을 구제해주나’에 멈춰서는 안 된다. ‘왜 우리 사회는 이런 막대한 비용을 치르는 임시방편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가’로 나아가야 한다.

진정한 해법은 ‘성실한 상환자’와 ‘불운한 채무자’를 갈라치기 하는 것이 아니다. 부채탕감 이전에 금융당국을 개혁하고, 법원의 파산 면책을 강화하는 법 제도 개편부터 착수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의 금융시장이 정상적으로 발전한다는 점을 잊지 말자. 제대로 된 안전 그물망을 설치하여, 정부가 세금이라는 비싼 구급차를 부를 필요 자체를 줄이는 것. 그것이 이 지긋지긋한 논쟁을 끝낼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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