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판 '신 언론 5대 죄악'을 고발한다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홍종학 전 국회의원 · 중소벤처부 장관
홍종학 전 국회의원 · 중소벤처부 장관

지금으로부터 28년 전 겨울, 국가 부도 위기의 치욕을 겪고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을 당시 한 일간지의 재정경제원 출입기자는 "다섯 가지 큰 죄를 저질렀다"는 통렬한 '고해'를 지면에 실어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환상 유포죄' '단순 중계죄' '진상 외면죄' '대안 부재죄' '관찰 소홀죄'라는 그의 고백은, 위기 앞에서 '감시견'의 역할을 망각했던 언론 전체의 부끄러운 자화상이었다. OECD 가입에 이은 정부의 장밋빛 발표를 앵무새처럼 받아쓰고, 바닥나는 외환보유고라는 '진상'을 외면했으며, 나라 경제가 무너지는 징후를 '관찰'하지 못했던 죄. 그들은 처절한 반성과 함께 다시는 '확성기'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8년 후 다시 겨울을 맞아 우리는 IMF사태보다 10배는 더 심각한 '국가 소멸' 가능성까지 보이는 저성장과 부동산 거품으로 인한 금융위기에 직면해 있다. OECD 부동의 자살률 1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합계출산율 0.7명대 추락,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이것은 숫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사망 선고 예고장이다.

오늘의 언론은 IMF 사태 때보다 더 교활하고 악의적

한국은행, KDI, 한국경제연구원, 예산정책처 등 국가의 모든 두뇌가 "이대로 가면 망한다"고 절규하고 있다. 지난 8월에 보도된 총리실에서 작성한 비공개 보고서는 잠재성장률은 꺼져가고 재정은 시한폭탄이 되었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어떤 언론도 이런 중차대한 문제에 후속 보도는커녕 아예 논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언론이 진실을 가리는 가운데, 이 나라의 마지막 ‘골든타임’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다.

 

국가 위기를 외면하고 투기를 조장하는 언론을 풍자적으로 그린 일러스트. 챗지피티
국가 위기를 외면하고 투기를 조장하는 언론을 풍자적으로 그린 일러스트. 챗지피티

28년 전 그 통렬한 반성문을 쏟아낸 언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반성문을 찢어버린 듯하다. 오늘의 지면과 화면에는 '국가 소멸'의 절박함도, '청년의 절규'도, '금융위기'의 고뇌도 없다. 대신 1997년의 5대 죄악보다 더 교묘하고 악의적인 '2025년판 신(新) 5대 죄악'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제1 투기 조장죄: 이는 1997년 '환상 유포죄'의 진화다. '부동산 망국병'의 본질은 거론하지 않은 채, "오늘이 가장 싸다"며 '영끌'을 선동하고, AI나 바이오 대신 '삽질(SOC)'만이 살길이라며 건설족을 찬양한 죄다. '세금 폭탄론'과 ‘공급부족론’으로 여론을 호도하여 정부의 정책을 무력화하고 투기 심리를 부추긴 죄, 바로 그것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보여주듯이, 부동산 거품이 붕괴될 때 극심한 경제적 위기가 닥칠 텐데도 그를 경고하는 기사는 찾아볼 수가 없다.

제2 부실 은폐죄: 이는 1997년 '진상 외면죄'의 고의적 반복이다. 수백 조 PF 부실 대출의 진상을 "시장 안정"이라는 관료의 논리 뒤에 숨어 은폐한 죄다. 늘어나는 부실채권과 좀비기업들을 분식회계로 덮고 넘어가려는 관료들의 '에버그리닝(evergreening)’에 동조하며 감시의 눈을 가리고, 위기를 대처할 골든타임을 헛되게 보내게 하는 중차대한 죄다.

제3 위기 외면죄: 이는 1997년 '관찰 소홀죄'의 '선택적' 발현이다. 한국 신문과 방송, 심지어 인터넷 방송까지 모두 한결같이 저출산, 고령화, 저성장이라는 '국가 소멸'의 비명과 KDI, 한국은행의 준엄한 경고를 외면하고 매일 같이 정쟁이나 부동산 거품 이야기로만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고 있다. 부동산 업자들의 광고와 함께 온 국민을 투기 광풍으로 몰아넣기에 혈안이 되어 버린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제4 서민 무시죄: 이는 1997년 '대안 부재죄'의 계급적 배신이다. 재벌과 기득권을 위한 감세와 규제 완화가 유일한 '대안'이라 주장하며 애써 서민들의 삶은 조명하지 않는다. 살찐 고양이로 전락한 은행들이 올리는 사상 최대의 이익을 대서특필하면서, 은행에 피와 땀을 흘려 벌은 월급을 바치며 절규하는 서민들의 삶은 외면하는 반인륜적 만행을 저지르는 죄다. 최근 OECD 최고의 자살률에 대해 경고하는 언론을 본 적이 있는가. 서민들이 겪는 고통과 불평등과 양극화라는 시대의 화두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죄다.

제5 정쟁 유발죄: 이는 1997년 '단순 중계죄'의 악의적 변질이다.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론(正論)을 펴는 감시견의 역할 대신, 누가 정권을 잡았느냐에 따라 갑자기 논조를 바꿔 정파의 충견이 되는 죄다. 혐오와 갈등을 팔아 이익을 챙기며, 정론의 장을 파괴하고 정치를 조롱거리로 전락시켜, 국가 위기를 대응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대역죄가 아닐 수 없다.

 

국가 위기를 외면하고 투기를 조장하는 언론을 풍자적으로 그린 일러스트. 챗지피티
국가 위기를 외면하고 투기를 조장하는 언론을 풍자적으로 그린 일러스트. 챗지피티

이젠 ‘속았다’ ‘몰랐다’ 변명이 통하지 않을 것

1997년의 언론은 최소한 '속았다'거나 '몰랐다'고 변명할 여지라도 있었다. 하지만 2025년의 언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OECD 최고 자살률과 최저 출산율이라는 데이터가, KDI와 한국은행의 보고서가, 총리실의 비공개 진단이 모든 '진상'을 눈앞에 들이밀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투기'를 조장하고, '부실'을 은폐하며, '위기'를 외면하고, '서민'을 무시하며, '정쟁'을 유발하고 있다. 1997년의 죄가 '무능'과 '나태'였다면, 2025년의 죄는 '알면서도 저지르는' 고의적 '방조'이거나 '미필적 고의'에 의한 경제 폭망의 공범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절망하고, 신혼부부는 집값이 무서워 아이를 포기하며, 노인들은 빈곤 속에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있다. 이것이 '국가 소멸'의 현주소다. 언론은 답해야 한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당신들은 누구의 편인가. '건설족'인가, '국민'인가. '관료'인가, '미래 세대'인가.

한국 언론이 '신 5대 죄악'을 멈추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존폐의 기로에 섰을 때 언론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그때는 반성문을 쓸 지면도, 그 반성문을 읽어줄 독자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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