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게임 시리즈’의 빛나는 성취들

김성수 문화평론가
김성수 문화평론가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6월 27일, 오징어게임 시즌3 전체 6회가 모두 공개되었다. 예상대로 시즌3의 완성도는 압도적이었고, 시청자들은 곧바로 반응했다. 공개 후 7일 동안 공개된 93개국 모두에서 시리즈 1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시즌1, 시즌2까지도 함께 조회수를 견인하면서 황동혁 감독이 고발한 신자유주의 세상의 파국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그가 시리즈 전체를 관통해 제시하고 있는 치유책을 단지 한 작가의 망상에 불과하다며 휴지조각 취급을 할 것인지, 아니면 깨달은 사람부터 먼저 이 집단지성을 향한 호소를 실천하든지, 그건 개인의 선택일 것이다. 어찌됐든 이 작품으로 황동혁 감독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확실한 조종을 울리면서, 마스터의 반열에 올랐다.

 

이토록 치열하고 완성도 높은 스토리가 ‘호불호’라고?

시즌3의 개막 때에도 한국 언론들의 유치한 작전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포털 뉴스들은 시즌2 때와 똑같이 평이 엇갈리고 있다고 제목을 뽑았다. 인턴 기자들의 어뷰징이야 그렇다 치겠지만 심지어 진보 매체의 전문기자까지 같은 제목을 뽑는 것을 보면, 한국 콘텐츠들이 더 이상 이들에게 진 빚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들을 감히 비겁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비난을 남의 논평을 빌려서 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있게 자기 논리를 갖고 비판하는 글이 아니란 말이다. 이런 글들이 바이라인을 달고 나올 수 있는 경우는, 제대로 꼼꼼히 보고 쓰지 않았을 경우와 누군가가 그에게 그런 기사를 요구했을 경우이다. 심지어 한 달에 400개 이상의 연예기사를 써내면서 두 개의 매체에 글을 싣고 있는 모 기자의 기사 제목들은 가관이다. 내용과는 상관없이 “호불호에도 1위… ‘오겜3’ 전 세계서 3억 7천만 시간 시청”, “황동혁 감독 ‘오겜3’ 극단적 호불호 이해, 비극적 엔딩 이유는…”, “원한 건 이게 아닌데… 역대급 호불호 ‘오징어게임3’” 등이었다. 이것은 ‘호불호’라는 낙인찍기에 불과하지 제대로 된 평가를 담고 있는 기사가 아니다.

실제로 외신들은 시즌2부터 악평을 쏟아낸 <가디언> <뉴욕타임스> <헐리우드 리포트> 정도를 제외하고는 호평으로 돌아섰고, 평론가나 전문 칼럼니스트들은 시즌2와 달리 호평이 압도적으로 많다. 호불호를 이야기하면서 부정적 인상을 주려는 기자들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다. 그토록 많은 시리즈물 중에서 세 시즌 이상을 이토록 일관되게 치열한 주제의식과 완성도 있는 스토리,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유지해 낸 시리즈물이 몇 개나 있었나.

 

지금까지 달성한 기록만으로도 오징어게임 시리즈는 넷플릭스 역사상 최고의 시리즈물이다. 시즌1은 정식 서비스를 제공한 모든 국가(총 94개국)에서 1위를 해 낸 최초의 작품이 되었고, 시즌3는 공개 첫날부터 정식 서비스를 제공한 모든 국가(총 93개국)에서 1위를 차지한 유일한 시리즈가 되었다. 91일간 공개 기록만으로 현재 시즌1이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모든 시리즈 중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시즌2는 전체 3위, 비영어 시리즈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시즌3는 단 9일 만에 비영어 시리즈 9위에 올라있는데 82일 후에 어떤 기록을 세울지 그 누구도 모른다. <롤링스톤즈>지는 역대 모든 시리즈들 중 100개의 작품들을 골라서 순위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오징어게임이 95위를 차지했다. 시즌2, 3의 성취들이 포함되지 않았기에 앞으로 그 순위는 더 올라갈 것이다. 사실상 21세기 가장 압도적 영향력을 만든 시리즈가 오징어게임인 것이다.

 

줄어든 풍자, 잔혹해진 게임, 부담스러운 결말들이 불편한 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징어게임 시즌3에 불편함을 지적하는 내용들은 엄연히 존재한다. 또한 그런 의견들이 평단이 아니라 주로 열정적인 소비를 이어가고 있는 시청자 층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요컨대 시즌3는 열광적으로 소비하는 시청자들이 이 스토리의 결말, 혹은 이 내러티브가 제시하고 있는 대안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시청자들이 시즌3에서 공통적으로 불편하다고 먼저 지적하고 있는 것은 시즌1보다 직설적이어서 풍자가 줄어들었고 게임의 방식도 더 잔혹해졌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부분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시즌1의 경우 정규 게임 자체에서는 참가자들이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게임은 없었다. 우발적으로 만들어진 심야의 번외 게임을 제외하고는. 사실 번외 게임이었던 ‘팀별 살상’은 실제로는 희생자들의 목숨값을 나눠 가지며 정규 게임으로 인정되었음에도 오징어게임의 정규 게임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일종의 해프닝으로 취급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즌3에서는 ‘술래잡기’라는, 룰 자체가 일방적으로 살인을 하도록 설정된 게임이 등장한 것이다.

 

사실 ‘술래잡기’ 게임은 그 이전과 이후를 완벽히 나누는 결정적 변곡점이다. 전체를 볼 눈이 없는 <가디안> 등의 평가는 시즌2와 시즌3가 필연적으로 나뉘어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즌2는 아직 서로를 죽여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룰이 확실히 공개되기 전이기 때문에 반란을 설득해 내기 힘들었다. 게임의 진짜 민낯을 알고 있는 사람이 성기훈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술래잡기’라는 게임을 겪고 난 사람들은 확실히 깨닫게 된다. “오징어게임은 결국 서로를 죽여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게임이다”라는 사실을. 프론트맨이 직접 게임에 참여한 이유는 그 가스라이팅을 방해하는 성기훈을 반란과 제압을 통해서 악마화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중도에서 게임이 끝나는 낭패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보며 즐길 것이냐, 참여해서 죽일 것이냐의 갈림길

이 결정적인 차이는 또한 쇼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기 위한 작가의 복선이다. 별다른 정보 없이 시즌1을 만난 시청자들은 마치 VIP들처럼 이 모든 과정을 게임이라는 가정 하에 즐기게 된다. 그들이 느끼는 게임마다의 잔혹함의 차이는 예컨대 복싱 경기에서 UFC의 이종격투기로 옮아가는 정도에 불과하고, 번외 게임은 반칙을 하다 선수가 사망하는 해프닝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시즌2에서 직접 무기를 들고 심판들, 혹은 심판으로 착각하고 있는 핑크가드를 공격하는 장면을 보며 시청자들은 일종의 불편함을 느꼈던 것이다.

황동혁 감독은 시즌2까지 정규 게임에서 사람을 의도적으로 살해하는 행위를 특정한 캐릭터의 돌발행위 정도로 영리하게 감추는 데 성공했다. 그는 단계를 거쳐 가면서 이 게임의 진실에 다가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반란을 오히려 불편히 여기게 되더라도 시청자들이 극 중의 VIP와 동질감을 느끼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그는 ‘술래잡기’ 게임의 탈락자 처리 과정에 VIP들이 직접 핑크가드로 변복하고 사냥을 하는 설정을 넣었는데, 이 장면들은 명백히 게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룰에 탈락한 사람에 대해 법에 따라 처리를 맡기는 모습으로 볼 수 없었다. 직접 개입해서 ‘사냥’을 즐기는 VIP를 보며 시청자들은 자신이 취했던 안일한 즐거움이 불쾌해지기 시작한다. VIP와 같은 심정으로 게임을 즐기고 있던 시청자들은 여기서 각성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되찾거나, 자신이 VIP가 된 것처럼 정신 승리를 해야만 한다. 시청자들이 시즌3에 불호의 감정을 가졌던 이유는 바로 이런 압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압박을 참여라 생각하며 각성을 선택한 프로슈머들은 이후의 전개를 통해 오징어게임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이와 반대로 반란이 제압된 후 참가자들은 체제에 적극적으로 순응(?)하기 시작한다. 시즌3의 참가자들은 더욱 격렬히 룰을 지키면서 룰을 깨기 시작한다. 룰과 룰 사이의 여백을 얼마나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경쟁자를 탈락시키는가, 즉, 누가 더 참신한 ‘법꾸라지’가 되는지가 필수적인 승리 요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래잡기’에서부터 풍자는 옅어진다. 은근히 감춰주던 미덕도 사라져 간다.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포장은 찢겨 나간다. 오직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 눈앞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전쟁만이 존재할 뿐이다.

왜 시청자들은 아기의 최종 생존을 예측했을까?

이 때 아기가 태어난다. 아니 아기가 그들을 찾아온다. 그래서 비로소 장기판의 말이던 일부 참가자들은 사람이 된다. 아기를 낳은 준희와 아기를 받은 금자, 그리고 아기를 지키던 현주가 먼저 아기를 중심으로 가족이 된다. 개인으로 조각나 있던 사람들이 아기를 지키려는 공동체가 되는 이 장면은 괴이하면서도 지극히 감동적이다. 만일 시청자들이 이전 장면에서 각성 대신 정신 승리를 택했다면 이 장면에서 괴이함만을 간직할 테지만.

새로 형성된 가족을 금자의 혈연과 준희의 연인이 파괴하는 장면은 지극히 상징적이다. 아니 준희가 가슴에 달고 있던 숫자 222번부터 상징의 시작이다. 가족을 갖고 싶던 준희를 숫자로 치환하면 2가 되길 바라는 1이었다. 그의 가슴에 2가 3개나 달린 것은 그 발원이 그를 지배하고 있다는 의미다. 456이 성기훈의 현재 사회적 위치를 말해주는 것처럼. 사람은 둘이 만나 부부를 이루고, 셋이 되면서 비로서 가족이 되고 공동체가 되고 미래를 만들게 된다. 금자가 스스로 낳은 자식을 죽여서 아기를 지키려고 했던 것은, 깨어진 혈연보다 미래를 품은 가족 공동체가 더욱 절실했기 때문이다.

아기는 자발적으로 게임에 참여한 적 없지만, 프론트맨에 의해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게임의 참가자는 반드시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기본 규칙을 어긴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VIP들은 늘 룰을 무시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또다시 룰을 어길 수도 있다. 하지만 게임의 설계자인 프론트맨은? 어쩌면 ‘재미’를 내세워 VIP를 속이고 참가자들의 인간성을 회복시키려 했던 것일까? 많은 시청자들은 이 장면에서 아기의 최종 생존을 예측했다. 자발적인 참여자가 아니라면 게임 참가 자격이 없다. 그래서 아기는 참가자가 아니므로 반드시 생존할 것이라는 논리적 패러독스가 그 근거였다. 이미 본인의 인간성마저 희생하고는 영호란 이름을 버리고 프론트맨이 된 그는 그 패러독스를 믿었던 것일까? 아니면 인간으로 대신 죽어간 참가자들과 그들의 대표격인 성기훈을 믿었던 것일까?

 

무한경쟁 속 무한대의 수탈 벌어지는 ‘오징어게임=신자유주의’

중요한 것은 이런 대안이 서구 사회에 미묘한 파장을 선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아기를 선택하는 모습을 의아해한다고 기레기들은 전하고 있지만, 서구의 문화는 이미 그런 선택을 가장 기본적인 윤리로 실천해 왔었고 또 콘텐츠로 널리 소비했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와 ‘타이타닉’ 등의 콘텐츠에서 보여준 숭고한 죽음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인간다운 선택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지혜는 왜 오늘날 휴지조각 취급을 받고 있을까? 황동혁은 어쩌면 이 질문을, 신자유주의를 탄생시키고 개인주의로 공동체를 파괴한 그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90년대 사회주의 몰락의 틈새를 타고 유령처럼 나타나 30여 년 동안 전 세계를 무한경쟁으로, 전쟁의 위기와 기후위기로 몰아넣은 신자유주의는 곧 오징어게임이었다. 공정의 탈을 쓰고 불공정한 경쟁과 무한대의 수탈을 보장한 그 룰을, 그 오판을, 이제 관 속에 집어넣어야 할 때다. 여전히 오징어게임이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시즌3 마지막 에필로그 장면은 끔찍한 악몽으로만 끝나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전성기에 구상되었지만 10년이 넘게 외면당했던 황동혁의 예언은 이제 6년 간의 시리즈로 완성되어 인류에게 선물로 증정되었다. ‘더 이상의 오징어게임이 없는 세상’이란 황동혁의 바람을 눌러 담은 채로. 이제 선택은 ‘귀 있는 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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