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의 예의바름은 예술 수준
"우린 영국인 아니고 스코틀랜드인"
웨일스엔 양, 북아일랜드 감자 천국
위기 오면 하나 되는 차 한 잔의 마법
신사의 나라? 천만에!
1990년 '신사의 나라'라는 로맨틱한 환상을 안고 영국 땅을 밟았다. 그런데 웬걸? 신사는커녕, 한 집에 사는 네 가족이 각자 다른 언어로 투덜거리며 서로 눈치 보는 기묘한 풍경이 펼쳐졌다. 마치 우리나라 명절 때 친척들이 모인 것 같다고 할까? 겉으로는 "어머, 오랜만이야!" 하면서도 속으로는 "언제 집에 가나…" 하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영국(United Kingdom)의 정식 명칭은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이름부터가 벌써 복잡하다. 마치 "김, 이, 박, 최 씨 집안의 연합 아파트"처럼 들린다. 그래서 그냥 'UK'라고 줄여 부르는 것 같다. 길면 귀찮으니까.
잉글랜드: "실례합니다만, 감정 표현은 하지 않습니다"
잉글랜드 사람들의 예의바름은 거의 예술수준이다. 하루에 '죄송합니다(Sorry)'를 몇 번이나 듣는지 세어봤더니 47번이었다. 심지어 상대방이 자기 발을 밟아도 "Sorry"라고 한다. 이 정도면 강박이 아닐까?
이들의 대화법은 참으로 신기하다. "날씨 좋네요?"라고 물어보면서 실제로는 "제발 개인적인 얘기는 하지 마세요"라는 뜻이다. 일종의 사회적 방어막인 셈이다. 마치 우리나라 엘리베이터에서 "몇 층이세요?"라고 물어보는 것처럼.
음식도 감정을 절제한다. 피시 앤 칩스를 보라. 생선은 바삭한 옷을 입고 있지만 속은 담백하기 그지없다. 감자튀김도 마찬가지. 겉바속촉(겉은 바삭, 속은 촉촉)이 아니라 겉바속담(겉은 바삭, 속은 담백)이다. 마치 잉글랜드인의 성격처럼.
그들의 풍경도 참 절제되어 있다. 초록 잔디는 잘 정돈되어 있고, 꽃밭은 칼로 자른 듯 정확하다. 심지어 구름도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지나간다. 자연까지도 영국식 매너를 익힌 것 같다.
스코틀랜드: "우리는 영국인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인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존심이 하늘을 찌른다. 이들에게 "영국인이시네요?"라고 하면 얼굴이 사색이 된다. "우리는 스코틀랜드인입니다!"라고 정정해 준다. 마치 부산 사람이 "서울 사람이시네요?"라는 말을 듣고 보이는 반응과 비슷하다.
전통 의상 킬트에 대한 자부심은 가히 종교적 수준이다. 남자가 치마를 입고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유일한 나라. 그것도 속옷 없이. 용기가 필요한 패션이다. 특히 겨울에는.
해기스(내장을 양의 위에 넣고 삶은 음식)를 먹으면서도 "이게 바로 진짜 음식이야!"라고 자랑한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뭔지 몰라서 먹었는데, 알고 나니 더 맛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다.
위스키에 대한 철학도 대단하다. '스카치 위스키가 진짜고, 나머지는 가짜다'라는 신념으로 살아간다. 심지어 아이들도 위스키 향을 맡으며 자란다. 교육의 힘인가?
풍경은 그야말로 판타지 영화 세트장이다. 안개 낀 호수(로흐, loch), 첩첩산중, 고성… 네스호 괴물이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다. 실제로 관광객들은 다들 괴물을 찾으러 다닌다. 못 찾으면 실망하고.
웨일스: "우리 언어는 노래입니다"
웨일스어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Llanfairpwllgwyngyllgogerychwyrndrobwllllantysiliogogogoch"라는 지명이 실제로 존재한다. 발음? 포기했다. 그냥 "거기"라고 부르자. 굳이 영어로 번역하면 "St. Mary's Church in the hollow of white hazel near a rapid whirlpool and the Church of St. Tysilio near the red cave."이다. 한국어로 의역하자면 "급류 소용돌이 근처, 흰 개암나무 골짜기 안에 있는 성 마리아 교회와 붉은 동굴 옆 성 티실리오 교회가 있는 마을" 정도 된다. 무려 58자의 이 마을 이름은 현지인도 너무 길어서 그냥 '란페어 PG' 또는 'PG'라고 줄여 부른다.
웨일스 사람들은 남성 합창단으로 유명하다. 거리를 걷다 보면 어디선가 합창 소리가 들린다. 마치 뮤지컬 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심지어 펍(선술집)에서도 갑자기 합창이 시작된다. 술에 취해도 화음이 맞는다는 게 신기하다.
양이 사람보다 많은 나라. 양 인구 통계를 보면 사람 1명당 양 3마리 꼴이다. 그래서 양털 스웨터가 특산품이다. 직접 양을 키워서 만든 스웨터를 입으면 가끔 양 냄새가 난다. 자연친화적이라고 하자.
풍경은 목가적이다. 언덕마다 양들이 점점이 박혀 있고, 돌담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정말 시나 노래가 절로 나올 것 같은 풍경이다. 실제로 시인들이 많이 나온 이유를 알겠다.
북아일랜드: "감자가 우리의 운명입니다"
북아일랜드 사람들은 외교관 같다.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끼어서 눈치를 보며 살아온 탓일까? 말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고른다. 마치 지뢰밭을 걷는 것처럼.
감자요리의 다양성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삶은 감자, 으깬 감자, 구운 감자, 튀긴 감자, 감자전, 감자빵... 감자로 안 만든 음식을 찾기가 더 어렵다. 감자공화국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아이리시 스튜(죽)를 먹어보면 감자가 주인공이고 고기는 조연이다. 감자의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한국의 김치처럼 없으면 안 되는 존재다.
풍경은 드라마틱하다. 절벽 해안선이 끝없이 이어지고, 초록언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날씨가 변덕스럽다. 5분 전에는 맑았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다. 우산은 필수품이다.
공통분모: 차와 펍(선술집), 그리고 날씨 이야기
이 네 나라가 하나로 묶이는 이유가 있다. 바로 '티타임'이다. 오전 11시와 오후 4시는 신성불가침의 시간이다. 전쟁 중에도 차 시간은 지켰다는 전설이 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것 같다.
펍 문화도 공통점이다. 퇴근 후 펍에서 한 잔 하는 것은 종교적 의식이다. 에일이든 위스키든 기네스든, 술에 대한 애정만큼은 전국 공통이다. 심지어 점심시간에도 펍에 간다. 이게 바로 워라밸인가?
그리고 날씨이야기. 영국인들의 대화는 99% 날씨로 시작된다. "오늘 비 올까요?", "어제보다 춥네요", "내일은 맑을까요?" 일기예보관이 되려면 영국에 와야 할 것 같다. 모든 국민이 기상전문가다.
브렉시트 후에도 여전한 티타임
브렉시트로 난리가 났어도 차 마시는 시간은 변하지 않았다. 유럽연합은 떠날 수는 있어도 티타임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영국인의 철학인 것 같다. 실제로 브렉시트 협상 중에도 차를 마셨다고 한다. 협상 테이블 위에 차와 비스킷이 올라와 있었다는 후문이 있다.
여행 팁: 네 나라, 네 가지 매너
만약 영국여행을 계획한다면 기억하자:
- "실례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자. 예의가 생명이다.
- "영국"이라는 말 대신 "스코틀랜드"라고 하자. 킬트 칭찬은 필수.
- 양이 길을 막아도 화내지 말자. 양이 주인이다.
- 감자요리를 거부하지 말자. 거부하면 서운해 한다.
그리고 모든 대화는 날씨로 시작하자. "오늘 비 안 왔네요?"라고 하면 즉시 친구가 된다. 차 한 잔을 권하면 가족이 된다.
그래도 결국은 하나
서로 다른 이 네 나라 사람들이지만, 위기가 오면 하나가 된다. 마치 우리나라 집안싸움과 비슷하다. 평소에는 서로 싸우지만 남이 건드리면 똘똘 뭉친다. 결국 영국은 '다양성 속의 통일'을 보여주는 실험실이다. 서로 다르지만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곳. 차 한 잔으로 모든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나라.
혹시 세상이 복잡하고 피곤하다면, 영국식으로 해보자. 일단 차부터 끓이고, 날씨 이야기를 하며, "Sorry”를 남발하자. 세상이 조금은 평화로워질지도 모른다.
"Keep calm and drink tea" ("침착하게 차나 한 잔 하세요") - 이것이 바로 영국식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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