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앗간 아들이 화가 돼 영국 미술사 새로 썼다

그림에 대한 전통 관념 깨고 풍경 꼼꼼히 그려

상상 속 이상향 그리기보다 들판 하늘빛 묘사

영국만의 독특한 기후와 풍경 화폭에 담아내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의 젊은 시절 초상화. 1799년에 렘제이 리인에글(Ramsay Richard Reinagle)이 그렸다. (런던 '국립 초상화 갤러리(National Portrait Gallery)' 소장)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의 젊은 시절 초상화. 1799년에 렘제이 리인에글(Ramsay Richard Reinagle)이 그렸다. (런던 '국립 초상화 갤러리(National Portrait Gallery)' 소장)

1776년 6월 11일, 영국 서퍽 주 이스트 베르홀트라는 시골마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방앗간을 운영하는 골딘 컨스터블, 어머니는 앤 휘트. 이 아이의 이름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이었다. 그런데 이 방앗간 아들이 훗날 영국미술사를 뒤흔들어 놓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당시 영국 미술계는 고상한 신화나 성경이야기, 아니면 최소한 이탈리아나 그리스의 고전적 풍경을 그리는 것이 격에 맞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컨스터블은 뭘 그렸나? 자기 집 뒷마당이나 다름없는 서퍽 시골풍경을 그렸다. 그것도 아주 꼼꼼하게, 마치 농사일 하듯이.

 

존 컨스터블, 수문(The Lock), 1824년 (위키피디아)
존 컨스터블, 수문(The Lock), 1824년 (위키피디아)

혁명적 붓질의 탄생

존 컨스터블이 혁명적이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실제로 보이는 것을 그렸다. 지금 들으면 너무 당연한 소리 같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대단한 반란이었다. 다른 화가들이 화실에 틀어박혀 상상 속 이상향을 그리고 있을 때, 컨스터블은 들판으로 나가 실제 하늘빛을 관찰했다.

그의 대표작 〈건초 수레〉(1821)를 보면, 그냥 평범한 시골풍경이다. 건초를 싣고 개울을 건너는 수레, 멀리 보이는 방앗간, 구름 낀 하늘. 그런데 이 평범함 속에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살아 숨쉬는 듯한 생동감이다.

 

존 컨스터블, 건초 수레(The Hay Wain), 1821년 (위키피디아)
존 컨스터블, 건초 수레(The Hay Wain), 1821년 (위키피디아)

런던 미술계의 코웃음

물론 런던의 고상한 미술계는 처음엔 코웃음을 쳤다. "이게 뭔가? 농민 그림인가?" 하면서 말이다. 왕립미술원 회원들은 이 시골뜨기 화가의 그림을 보며 혀를 찼다. 이탈리아 고전 대가들의 웅장한 풍경화에 익숙한 귀족들 눈에, 컨스터블의 그림은 그저 평범한 시골사진 같았다.

하지만 컨스터블은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고향 풍경을 그렸다. 데담 계곡, 햄프스티드 히스, 솔즈베리 대성당... 모두 영국 땅의 진짜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그 고집은 결국 빛을 발했다.

 

존 컨스터블의 후기 작품, 해들리 성(Hadleigh Castle), 1829년 (위키피디아)
존 컨스터블의 후기 작품, 해들리 성(Hadleigh Castle), 1829년 (위키피디아)

느리지만 확실한 인정

컨스터블이 왕립미술원 정회원이 된 것은 1829년, 그의 나이 53세 때였다. 다른 화가들에 비해 한참 늦은 나이다. 그만큼 그의 화풍이 당대에는 혁신적이었다는 뜻이다.

재미있는 것은 컨스터블이 영국보다 프랑스에서 먼저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1824년 파리 살롱에서 〈건초 수레〉가 금메달을 받았을 때, 정작 영국에서는 여전히 '시골그림'이라며 무시당하고 있었다. 들라크루아 같은 프랑스 화가들이 컨스터블의 자연스러운 색채와 붓질에 감탄하며 배우려 할 때, 영 국미술계는 여전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존 컨스터블, 데담의 수문과 방앗간(Dedham Lock and Mill), 1820년대 (위키피디아)
존 컨스터블, 데담의 수문과 방앗간(Dedham Lock and Mill), 1820년대 (위키피디아)

영국다움의 발견

컨스터블의 진짜 업적은 '영국다움'의 발견이다. 그 전까지 영국 화가들은 이탈리아나 네덜란드 화풍을 따라 하기 바빴다. 하지만 컨스터블은 영국만의 독특한 기후와 풍경을 화폭에 담아냈다.

특히 그의 구름 그림은 걸작이었다. 영국 특유의 변덕스러운 날씨,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구름,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살… 이 모든 것을 컨스터블은 섬세하게 포착했다. 덕분에 후세사람들은 19세기 영국시골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생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존 컨스터블, 플랫퍼드 방앗간 근처의 보트 제작(Boatbuilding near Flatford Mil), 1815년 경 (위키피디아)l
존 컨스터블, 플랫퍼드 방앗간 근처의 보트 제작(Boatbuilding near Flatford Mil), 1815년 경 (위키피디아)l

산업혁명 시대의 향수

컨스터블이 활동한 시기는 영국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때다. 증기기관이 등장하고,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가던 시절이다. 이런 급변하는 시대에 컨스터블의 그림은 일종의 위안이었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자연, 평화로운 농촌생활, 변하지 않는 영국의 모습... 이런 것들이 도시사람들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이것이 현실도피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컨스터블은 산업혁명의 어두운 면, 노동자들의 고달픈 삶, 환경파괴 같은 문제들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존 컨스터블, 옥수수밭(The Cornfield), 1826년 (위키피디아)
존 컨스터블, 옥수수밭(The Cornfield), 1826년 (위키피디아)

후대에 미친 영향

컨스터블의 영향력은 단순히 미술계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의 그림들은 영국인들에게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었다. 덕분에  영국문학에서도 자연과 고향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낭만주의 시인들과도 정신적 교감을 나누었다.

특히 자연보호 운동에 미친 영향이 크다. 컨스터블이 그린 풍경들이 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컨스터블의 풍경을 지키자"며 나섰다. 그의 그림 속 풍경들은 이제 영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존 컨스터블이 그린 그림(위키피디아)
존 컨스터블이 그린 그림(위키피디아)

오늘날의 의미

지금 21세기에도 컨스터블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급속한 도시화와 개발 속에서 자연의 소중함을 잊지 말자. 우리주 변의 평범한 풍경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을 포기하지 말자.

컨스터블은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런던에서 성공하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퍽 시골을 지켰다. 그리고 그 고집스러운 향토애가 결국 세계적인 작품을 낳았다.

방앗간 아들이 영국미술의 거장이 된 이야기. 그것은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라,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묵묵히 걸어간 한 예술가의 철학이 담긴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존 컨스터블, 목초지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Salisbury Cathedral from the Meadows), 1831년. (위키피디아)
존 컨스터블, 목초지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Salisbury Cathedral from the Meadows), 1831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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