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한 개로 온 세상을 '떨어뜨린' 남자
제임스 와트도, 다윈도 다 뉴턴의 후예
그의 과학적 위폐 수사로 금융강국 도약
묘비에는 "뉴턴으로 모든 게 빛이 됐다"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것을 '떨어뜨린' 남자가 있다. 바로 아이작 뉴턴(1643-1727)이다. 그는 사과를 떨어뜨렸고, 기존 물리학을 떨어뜨렸으며, 경쟁자들의 자존심도 떨어뜨렸다. 심지어 자신의 사회생활까지 떨어뜨렸으니, 이보다 완벽한 '떨어뜨리기 마스터'가 또 있을까?
사과 하나로 시작된 '중력' 있는 인생
'모든 것은 떨어진다'는 당연한 사실을 발견하고도 노벨상을 받지 못한 사람이 뉴턴이다. 물론 그 시절엔 노벨상이 없었지만 말이다.
1687년 뉴턴은 〈프린키피아〉라는 책을 출간했다. 제목부터 라틴어로 써서 "나 똑똑해요" 어필했지만, 정작 내용은 "떨어지는 사과와 돌아가는 달이 같은 원리"라는 충격적 반전을 담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뭐? 하늘의 달과 땅의 사과가 같다고?"라며 기절초풍했다.
더 웃긴 건 뉴턴이 이 발견을 한 과정이다. 전염병이 돌아 케임브리지대학이 휴교하자, 뉴턴은 고향집에 내려가 '집콕'을 했다. 요즘으로 치면 코로나19 시기의 재택근무인 셈이다. 그런데 이 '집콕' 기간에 만유인력의 법칙, 미적분학, 광학을 모두 발견했다. 역시 집순이/집돌이의 잠재력은 무한하다.
과학혁명의 선봉장이 된 영국
뉴턴은 영국사회에 과학적 사고방식을 정착시켰다. 그 전까지 영국인들은 "왜 사과가 떨어지지?"라고 묻지 않았다. 그냥 "아, 또 떨어졌네"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뉴턴 덕분에 영국인들은 모든 것에 "왜?"라고 묻기 시작했다.
이는 영국이 훗날 산업혁명을 이끌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증기기관을 만든 제임스 와트도, 진화론의 다윈도 모두 "왜?"라고 묻는 뉴턴의 후예들이었다. 덕분에 영국은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고, 덕분에 영국 음식은... 음, 이건 뉴턴 탓이 아니다.
라이벌들과의 '학술전쟁'
뉴턴은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천만에! 이 남자는 학술계의 '디스 마스터'였다. 특히 독일의 라이프니츠와 벌인 미적분학 발명권 논쟁은 17세기 최대의 학술 스캔들이었다. 이 둘의 싸움은 영국 대 독일의 국가적 자존심 싸움으로 번졌다.
결국 뉴턴이 승리했지만, 과정에서 "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에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는 겸손한(?) 말을 남겼다. 하지만 이게 사실은 라이벌 로버트 훅을 디스하는 말이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훅이 키가 작았거든. 뉴턴식 블랙 유머의 절정이었던 셈이다.
왕실조폐국장 뉴턴, 과학수사의 원조
말년의 뉴턴은 왕실조폐국장이 되어 위조지폐범들과 전쟁을 벌였다. 그의 논리는 간단했다.
"진짜 돈은 무겁고, 가짜 돈은 가볍다. 이는 중력법칙을 위반하는 행위다!"
농담이 아니다. 뉴턴은 정말로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위조지폐범들을 잡아냈다. 화학적 분석부터 수학적 계산까지 동원해서 말이다. CSI 과학수사대의 원조격인 셈이다. 덕분에 18세기 영국의 화폐제도가 안정되었고, 영국이 금융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했다.
케임브리지를 '천재들의 놀이터'로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루카스 석좌교수가 되었다. 나중에 스티븐 호킹이 역임했던 그 유명한 자리다. 뉴턴 덕분에 케임브리지는 '천재들의 놀이터'라는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뉴턴의 강의는 악명 높았다. 너무 어려워서 학생들이 하나둘씩 사라졌고, 나중엔 뉴턴 혼자 벽을 보고 강의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도 뉴턴은 꿋꿋이 강의를 계속했다. "학생들이 이해 못 하는 건 중력 때문이야. 뇌가 너무 무거워서 생각이 안 떨어지는 거지."
영국을 과학 강국으로 만든 진짜 '영웅'
뉴턴의 진짜 업적은 영국을 미신의 나라에서 과학의 나라로 바꾼 것이다. 그 전까지 영국인들은 점성술사의 말을 믿었지만, 뉴턴 이후엔 수학공식을 믿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영국인들은 비를 예측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일기예보는 과학으로 한다.
왕립학회 회장을 24년간 역임하며, 뉴턴은 영국 과학계의 '대부'가 되었다. 그의 권위는 절대적이어서, 누군가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면 "뉴턴이 뭐라고 했는데?"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뉴턴의 영향은 과학계를 넘어 정치·경제계에도 미쳤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도 뉴턴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스미스는 뉴턴이 자연계의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경제계에도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법칙이 있다고 주장했다.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의 토대가 뉴턴의 물리학에서 나온 셈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잠든 '중력의 아버지'
뉴턴은 1727년 세상을 떠났다. 영국은 그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하며 국가적 영웅으로 대우했다. 그의 무덤 앞에는 "자연과 자연의 법칙이 밤의 어둠 속에 숨어있었다. 신이 말했다: '뉴턴이 있으라!' 그러자 모든 것이 빛이 되었다"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좀 오버 같지만, 실제로 뉴턴 덕분에 영국은 계몽주의 시대를 선도할 수 있었다. 그의 과학적 방법론은 영국의 철학, 경제학, 정치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사과 하나가 만든 나비효과
아이작 뉴턴은 사과 하나로 영국 전체를 바꿨다. 과학혁명을 일으키고, 대학을 발전시키고, 경제제도를 안정화시키고, 영국의 지적 수준을 높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라이프니츠와 미적분학 발명권을 두고 평생 싸우고, 로버트 훅과 빛의 이론으로 원수가 되는 등 인간적인 면도 보여줬지만, 그래도 천재는 천재다.
지금도 영국인들이 비 오는 날 우산을 안 쓰고 다니는 것도 어쩌면 뉴턴의 영향일지 모른다. "어차피 중력 때문에 비는 떨어질 거야. 우산으로 막을 수 있을까?"라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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