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영국 복지 고발

"나는 사람이다 로봇이 아니다" 단순 항변아냐

마우스도 낯선 그에게 "모든 절차 온라인 진행"

복지, 이제 따뜻한 울림 아닌 냉정한 행정용어

한국도 누군가는 복지서류 앞에서 한숨짓는다

"나는 사람입니다. 로봇이 아닙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주인공 다니엘이 외치는 이 한마디는, 단순한 항변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와 제도, 자격요건과 알고리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로 밀려날 수 있는지를, 그야말로 몸뚱이로 증언하는 절규다

켄 로치 감독은 이 작품으로 201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사실 칸에서 정치적 메시지가 강한 영화가 상을 받는 일은 드물지 않다. 하지만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좀 달랐다. 정치적 선언이라기보다 인간적 선언, 곧 '사람답게 살 권리에 대한 외침'이었다. '복지'라는 말이 더 이상 따뜻한 울림이 아니라 냉정한 행정용어로만 다가오는 이 시대, 다니엘 블레이크는 유령처럼 떠도는 수백만의 '‘이름 없는 민원인'을 대신해 말했다. 나는 로봇이 아니라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는 복지정책이 운영자 위주의 시스템으로 전락한 영국의 현실를 다룬 영화로 주인공 다니엘이 질병수당 대상자에서 탈락한 뒤 관공서의 외벽에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다'로 시작하는 메시지를 작성하는 장면.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는 복지정책이 운영자 위주의 시스템으로 전락한 영국의 현실를 다룬 영화로 주인공 다니엘이 질병수당 대상자에서 탈락한 뒤 관공서의 외벽에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다'로 시작하는 메시지를 작성하는 장면.

복지인가, 보지 못할 지옥인가

영화에 등장하는 다니엘은 59세의 목수다. 심장질환으로 일을 그만두었다. 의사의 진단서도 있다. 하지만 영국 복지국은 그를 '노동가능자'로 분류한다. 왜냐고? 온라인으로 치른 컴퓨터 설문조사에서 '노동불가능'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웃기지도 않는 상황인데, 영화는 슬퍼질 틈도 주지 않는다. 그에게 돌아오는 건 일자리 알선 명령과 제때 구직활동을 하지 않으면 끊겠다는 실업수당 경고뿐이다.

다니엘이 마주하는 복지국의 모습은, 차라리 공포영화 같다. 담당자는 "이해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는다. 제도는 그가 온라인 문서를 작성할 줄 모른다는 걸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외면한다. 그는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를 잡는 것도 낯설어한다. 그런 그에게 "모든 절차는 온라인으로만 진행됩니다"라는 말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생존을 가로막는 벽이다.

한 장면이 있다. 다니엘이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매일 출근도장을 찍듯 복지국에 들렀다가, 결국 벽에 전단을 붙이고 마커로 글을 쓴다. '나는 사람입니다. 로봇이 아닙니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수급 대상자 번호 1-0-2-4-7'이 아니다. 그는 다니엘 블레이크이며, 시민이며, 인간이다.

디지털 사회의 빈틈에서 사람은 빠져나간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자꾸만 현실과 겹쳐진다. 당장 우리나라를 보자. 정부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복지행정을 간소화하고 투명하게 만들겠다고 한다. 나쁘지 않다. 문제는, 그 플랫폼을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60세 이상 노인인구의 디지털 소외율은 여전히 높다. 공공기관 민원은 대부분 '정부24' '복지로' '행복e음' 등의 사이트를 통해 이뤄진다. 그런데 정작 컴퓨터는커녕 스마트폰 터치도 버거운 사람들에게 그 제도는 복지가 아니라 '제외의 장치'가 된다.

우리사회에서도 다니엘 블레이크는 있다. 아니, 수도 없이 많다. '노인 단독가구의 절반 이상이 빈곤상태', '장애인 실업률 70% 이상',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청년들'… 이런 통계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 안에는 익명성 속에 잊힌 수많은 다니엘이 살고 있다.

그리고 영화에는 딸을 키우는 싱글맘 케이티가 등장한다. 집을 구하지 못해 런던에서 뉴캐슬로 쫓기듯 올라온 그녀는 복지주택에 입주하지만, 음식값을 줄이기 위해 하루 두 끼로 버티다 결국 푸드뱅크에서 기절한다. 창피함조차 사치인 상황이다.

이 장면을 보며 한국의 '엄마들의 카카오톡 채팅방'을 떠올렸다. 거기선 오늘 어디 마트 할인하는지, 유통기한 얼마 남지 않은 이유식 어디서 싸게 구할 수 있는지, 그런 이야기로 밤을 새운다.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했다가 '아버지 퇴직금'이 있다는 이유로 탈락하는 청년에게,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복지국가를 다시 묻는다 - ‘조건 없는 존엄’이라는 이름으로

켄 로치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난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다. 구조의 실패다.” 그는 도덕을 논하지 않았다. 대신 '사회가 개인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대할 수 있는가'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렇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게으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복지국과 싸우기 시작했다. 조용히, 꾸준히, 그리고 체면 없이. 그가 한 일은 거창한 투쟁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소박한 청원일 뿐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복지는 '조건부 동정'이 아니라 '조건 없는 존엄'이어야 한다. 누구나 삶이 흔들릴 수 있고, 누구나 아플 수 있고, 누구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런 순간에 사회가 내미는 손이 '인터넷 창구' 하나라면, 그것은 복지가 아니라 방기다.

 

15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충정로사옥 앞에서 열린 사회보장기본법 개정을 요구하는 한국판 '나, 다니엘 블레이크' 선언 행동.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는 복지정책이 운영자 위주의 시스템으로 전락한 영국의 현실를 다룬 영화이다. 2017.2.15. 연합뉴스
15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충정로사옥 앞에서 열린 사회보장기본법 개정을 요구하는 한국판 '나, 다니엘 블레이크' 선언 행동.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는 복지정책이 운영자 위주의 시스템으로 전락한 영국의 현실를 다룬 영화이다. 2017.2.15. 연합뉴스

다니엘 블레이크는 우리 안에 있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동시에 현실의 복사판이다. 그는 나이든 노동자일 수 있고, 장애인일 수 있고, 싱글맘일 수 있고, 은퇴한 할머니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내일의 나일 수도 있다. 누구도 '절대 안전한 사회적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복지서류 앞에서 한숨짓고 있다. 인터넷 창에서 주민등록번호가 몇 번 틀렸다고 '서비스 접속이 차단'되었을 것이다. 상담을 받으려 전화를 걸었지만, 상담시간은 이미 지났다. 겨우 연결됐더니 "그건 타 부서 소관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게 복지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사람을 놓친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말했다.

“나는 사람입니다. 로봇이 아닙니다.”

그 말은 누군가가, 언젠가는, 반드시 사회를 향해 다시 외쳐야 할 말이다. 오늘, 그 말이 다시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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