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약으로 의회를 통째 날리려던 가이 포크스

입 가벼운 동료 때문에 발각 수포로 돌아가

400년 지나도록 그의 실패 기념 축제 열려

왕권에 대한 도전과 결과 다룬 작품 줄이어

남자를 뜻하는 일반명사 '가이'도 그의 영향

2019년 10월 31일 홍콩 거리에 모인 사람들이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2019년 10월 31일 홍콩 거리에 모인 사람들이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영국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가이 포크스(Guy Fawkes, 1570~1606)다. 이유는 그의 성공한 업적 때문이 아니라, 실패한 테러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영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셰익스피어도, 처칠도, 비틀즈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수 있지만, 가이 포크스 만큼은 매년 11월 5일마다 영국 전역에서 기념(?)되고 있으니 말이다.

1570년 잉글랜드 북부 요크에서 태어난 가이 포크스는 원래 개신교 신자였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가톨릭 신자와 재혼하면서 그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청년기에는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스페인군에 입대해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군사전문가로서의 경력이 후에 화약 음모 사건에서 그가 폭파 담당을 맡게 된 이유였다.

 

가이 포크스. (위키피디아)
가이 포크스. (위키피디아)

화약음모사건, 역사상 가장 소음 없는 폭발

1605년 11월 5일 가이 포크스와 그의 동료들은 영국 의회 건물 지하에 화약 36통을 몰래 저장해두고, 의회 개원식에서 제임스 1세 국왕과 귀족들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화약 음모 사건'이다.

계획은 치밀했다. 가톨릭 신자들이 개신교 지배층을 제거하고 가톨릭 왕조를 복원하겠다는 웅장한 꿈을 품고 있었으니까. 로버트 케이츠비를 주동자로 한 13명의 음모자들은 수개월에 걸쳐 준비 작업을 벌였다. 의회 건물 근처에 집을 빌리고, 지하터널을 파서 의회 지하실에 접근하려 했다가 실패하자, 아예 지하실을 임대했다. 요즘으로 치면 테러 목표물 바로 옆에 사무실을 차린 격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계획도 입이 가벼운 동료가 있으면 물거품이 된다는 진리를 그들은 몰랐다. 사건 직전, 음모에 가담한 프랜시스 트레셤이 의회에 출석할 예정인 가톨릭 귀족 몬티글 경에게 "그날 의회에 가지 마라"는 경고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가 결국 당국에 넘어가면서 모든 계획이 발각됐다. 현대로 치면 테러 직전에 카카오톡으로 "오늘 그 건물에 가지 마라"고 보낸 격이다.

11월 4일 밤 근위병들이 의회 지하실을 수색하다가 존 존슨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던 가이 포크스를 발견했다. 그는 화약 더미 옆에서 성냥과 시계를 들고 있었다. 타이밍이 절묘했다. 하루만 늦게 발각됐다면 영국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가이 포크스의 동료들. (위키피디아)
가이 포크스의 동료들. (위키피디아)

고문실에서 펼쳐진 진실게임

체포된 가이 포크스는 런던탑에서 고문을 받았다. 처음에는 '존 존슨'이라는 가명을 고집하며 버텼지만, 고문이 계속되자 결국 진짜 이름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동료들의 신원은 끝까지 숨기려 했다. 어찌 보면 의리는 있었던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서명 변화다. 고문 전에는 또박또박 '귀도 포크스(Guido Fawkes)'라고 서명했지만, 고문 후에는 겨우 '귀도(Guido)'라고만 휘갈겨 썼다. 가이 포크스는 에스파냐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영어식인 '가이(Guy)'에서 이탈리아식인 '귀도(Guido)'로 바꿔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톨릭 반란을 위한 지원을 구하러 스페인으로 갔을 때 이 이탈리아식 이름을 채택했다. 하여간 고문의 참혹함이 서명에서도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현대 수사기법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야만적 방법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일반적인 수사 기법이었다.

가이 포크스의 마지막, 죽기 전에 목 부러뜨리기

가이 포크스는 체포된 후 고문을 받으며 동료들의 이름을 불었고, 결국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기지를 발휘했다. 교수대에서 밧줄에 목이 졸리기 전에 스스로 뛰어내려 자신의 목을 부러뜨려 죽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지만 고통스럽게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깔끔하게 가겠다는 의지였을까.

당시 반역죄의 형벌은 단순한 교수형이 아니었다. 교수형 후에 시체를 끌어내려 내장을 빼내고 사지를 절단하는 참혹한 처형이었다. 가이 포크스는 이런 고통을 피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에 자결을 선택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 셈이다.

 

가이 포크스의 공개 교수형 현장. (위키피디아)
가이 포크스의 공개 교수형 현장. (위키피디아)

가이 포크스의 밤, 실패를 기념하는 축제

재미있는 것은 이 사건 이후 영국 사람들의 반응이다. 왕과 의회가 무사했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매년 11월 5일을 '가이 포크스의 밤' 또는 '모닥불의 밤'으로 정해 축제를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축제 내용을 보면 참으로 잔인하다.

사람들은 가이 포크스의 인형을 만들어 태우고, 불꽃놀이를 하며 즐긴다. 아이들은 "가이를 위한 동전 한 푼"이라고 외치며 돈을 모아 폭죽을 사고, 밤하늘에는 화려한 불꽃이 터진다. 실패한 테러범을 기념하는 축제라니, 영국인들의 해학 정신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축제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종교적 색깔을 잃고 순수한 놀이문화로 변했다는 점이다. 현대 영국 아이들은 가이 포크스가 누구인지, 왜 그의 인형을 태우는지도 모른 채 그저 불꽃놀이를 즐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거사 직전 체포되는 가이 포크스(위기피디아)
거사 직전 체포되는 가이 포크스(위기피디아)

정치적 상징이 된 가면

시간이 흘러 가이 포크스는 다른 의미로 부활했다. 특히 21세기 들어 가이 포크스의 가면은 반정부시위의 상징이 되었다. 권력에 맞서는 저항의 아이콘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실패한 테러범이 민주주의 투쟁의 상징이 되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가 꿈꾸었던 가톨릭 전제 왕조 복원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쓰이고 있으니 말이다. 현대의 시위대들이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거리로 나설 때,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오히려 가이 포크스가 파괴하려 했던 의회민주주의다.

이런 현상은 대중문화의 힘을 보여준다. 역사적 사실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더 강하게 작용한다. 가이 포크스는 권력에 맞선 반항아의 이미지로 재탄생했고, 그의 실제 정치적 목표는 대부분 잊혀졌다.

영국사회에 미친 영향, 편집증의 제도화

가이 포크스 사건은 영국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가톨릭에 대한 불신이 더욱 깊어졌고, 의회 개원식 때마다 근위병이 지하실을 수색하는 관례가 생겼다. 400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이 의식은 계속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 사건은 영국의 국가보안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왕실과 의회에 대한 경비가 대폭 강화되었고, 정보수집망이 체계화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현대적 의미의 정보기관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사건은 영국의 반가톨릭 정서를 한층 강화시켰다. 가톨릭 신자들은 오랫동안 공직에서 배제되었고,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다. 1829년 가톨릭해방법이 통과될 때까지 무려 224년간 가톨릭 신자들은 사회적 약자로 살아야 했다. 한 사람의 극단적 행동이 전체 종교집단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낸 셈이다.

이런 종교적 갈등은 영국 사회의 근본적 성격을 규정했다. 개신교 중심의 국가 정체성이 더욱 강화되었고,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스페인에 대한 경계심도 커졌다. 외교정책에서도 반가톨릭 연합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문학과 예술에 미친 영향

가이 포크스 사건은 영국 문학과 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이 사건 직후에 쓰여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왕권에 대한 도전과 그 결과를 다룬 작품들이 줄지어 나왔다.

특히 매년 11월 5일 축제는 영국 민속문화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가이 포크스 인형 제작, 모닥불 축제, 불꽃놀이 등이 하나의 문화적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기념행사를 넘어서 영국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매년 11월 5일 열리는 가이 포크스의 밤에 우리 마을에서 불꽃놀이를 하고 있다. 김성수 시민기자
매년 11월 5일 열리는 가이 포크스의 밤에 우리 마을에서 불꽃놀이를 하고 있다. 김성수 시민기자

기억될 만한 실패

가이 포크스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역설적으로 영국 역사에서 가장 잘 기억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동사로까지 쓰인다. '가이포크스하다'는 '폭파하다'라는 뜻이다. 또한 '가이'라는 단어 자체가 영국 영어에서 '남자'를 뜻하는 일반명사로 쓰이게 된 것도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성공한 정치인들의 이름은 잊혀도 실패한 테러범의 이름은 400년 넘게 기억되고 있다. 물론 좋은 의미로 기억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이러니다. 헨리 8세의 여러 왕비들, 엘리자베스 1세의 신하들, 제임스 1세의 장관들… 이들의 이름은 역사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지만, 가이 포크스는 여전히 살아있는 문화 속에서 숨 쉬고 있다.

현대적 교훈

가이 포크스 사건은 현대에도 여러 교훈을 준다.

첫째, 극단주의가 어떤 파괴적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준다. 종교적 신념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둘째, 정보보안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아무리 치밀한 계획도 비밀이 새면 실패한다는 교훈이다.

셋째, 테러는 결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가이 포크스의 계획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가톨릭 왕조 복원이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더 큰 반발과 탄압을 불러왔을 가능성이 크다.

넷째,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쓰인다는 점이다. 가이 포크스는 실패했기 때문에 테러범으로 기억되지만, 만약 성공했다면 혁명가로 기억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사적 평가의 상대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결국 가이 포크스는 영국사회에 두 가지 교훈을 남겼다. 첫째, 비밀을 지킬 줄 모르는 동료와는 일하지 말 것. 둘째, 극단적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

매년 11월 5일 영국하늘에 터지는 불꽃놀이는 그의 실패를 기념하는 동시에, 평화로운 변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역설적 메시지가 아닐까. 가이 포크스가 꿈꾸었던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실패는 오히려 영국사회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 역설적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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