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의 고향 밀양이 보수 고을로 바뀐 까닭(상)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와 "한나라당 도시"의 간극

김종직의 선비 사상과 사명당의 호국 정신 이어져

김원봉·윤세주·최수봉 등 의열단 주축 모두 밀양 출신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2015년 개봉한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에서 의열단장 김원봉 역을 맡은 조승우가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 역으로 등장한 김홍파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건넨 말이다. 이 대사 한마디로 밀양은 의열단의 고향이자 독립운동의 성지로 부각됐다.

 

영화 ‘암살’의 한 장면. 김원봉 역을 맡은 조승우가 김구 역의 김홍파를 만나 자신을 소개하는 대목이다.
영화 ‘암살’의 한 장면. 김원봉 역을 맡은 조승우가 김구 역의 김홍파를 만나 자신을 소개하는 대목이다.

이보다 앞서 밀양을 널리 알린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2007년 작 ‘밀양’이다. 주인공 신애 역의 전도연이 “밀양이 어떤 곳이에요?”라고 묻자 카센터 사장 종찬 역의 송강호는 “경기는 엉망이고, 한나라당 도시고, 부산이 가깝고…”라고 소개한다.

의열단은 독립운동 진영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무력 투쟁에 나선 조직이다. 창립 단원 13명 가운데 5명이 밀양 동화중학교 동창생이자 이웃사촌이었고, 이후로도 밀양 출신이 속속 가세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밀양은 송강호의 영화 속 대사처럼 줄곧 보수 정치인을 국회의원으로 뽑는 보수 정당의 텃밭으로 바뀌었다. 도대체 밀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이 같은 변화가 생겨났을까?

밀양의 지명 유래는 ‘Secret Sunshine’과 무관해

밀양에 관한 역사상 최초의 기록은 중국 진수가 3세기 말 편찬한 ‘삼국지(三國志)’의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에 나오는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이란 대목이 변진(변한)의 24개 부족국가 가운데 하나로 지금의 밀양 땅을 가리킨다는 것이 학자들의 설명이다.

‘미리(彌離)’는 용(龍)의 우리말(미르)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고, ‘미동(彌凍)’은 ‘물둑’의 음차로 삼한시대 축조된 수리 시설 수산제(守山堤)를 가리킨다. 밀양은 가야국에 속했다가 505년 지증왕 때 신라에 병합돼 추화군(推火郡)으로 명명된다. ‘밀 추’에 ‘불 화’ 자를 훈으로만 읽으면 ‘밀불’이다, 밀양의 순우리말 지명 ‘미리벌’을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벌’은 ‘서라벌’, ‘달구벌’처럼 ‘넓고 평평하게 생긴 땅’을 뜻한다. 달구벌도 한자로는 ‘달구화(達句火)’라고 쓴다. 757년 경덕왕 때 밀성군(密城郡), 995년 고려 성종 때 밀주군(密州郡)을 거쳐 조선시대 들어 밀양(密陽)으로 굳어졌다. 밀양 시내에는 용두산도 있고 추화산도 있다.

이창동 감독은 이청준의 원작소설 ‘벌레 이야기’를 영화로 꾸미면서 밀양의 한자가 ‘빽빽할 밀’에 ‘볕 양’ 자인 것에 착안해 제목을 ‘밀양’으로 정했다. 영어로는 ‘Secret Sunshine’이라고 붙였다. 그러나 밀양 지명은 ‘용의 땅’이란 뜻의 ‘미리벌’에서 유래한 것이어서 ‘은밀한 햇빛’과는 무관하다.

“밀양은 학문과 투쟁을 좋아하는 고장“

세종 때 편찬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는 밀양에 관해 “토지가 비옥하고 물이 풍부하며 기온이 따뜻하다”고 기록하면서 “사람들은 농사에 힘쓰고 학문을 숭상하며 투쟁을 좋아한다”는 평가를 덧붙여놓았다. 밀양이 변계량과 김종직 등을 낳은 고장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학문을 숭상한다(好學)’는 대목에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투쟁을 좋아한다(好鬪爭)’는 것은 무슨 뜻일까?

고려시대 밀양에서는 무신정권 때 효심이 민란을 일으킨 데 이어 삼별초가 몽골군에 끝까지 대항하자 방보와 주년 등이 호응해 반역의 고장으로 낙인찍혔다. 임진왜란 때도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고, 일제강점기 의열단 등을 중심으로 치열한 항일투쟁을 벌였다. 송전탑 건설에 가장 끈질기게 반대 투쟁을 벌인 곳도 밀양이다. 고은은 시집 ‘만인보’의 ‘밀양 백중놀이’에서 밀양을 ‘거역의 땅’으로 묘사했다.

밀양문화원은 밀양의 관문인 밀양역 플랫폼에 ‘내 고장 역사 인물’이란 제목의 입간판을 세워 조선 전기의 문신 점필재 김종직과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사명대사 유정을 소개해놓았다. 각각 유교와 불교를 대표하는 충절(忠節)의 상징이다.

나라에 환란이 닥치면 땀 흘리는 사명대사 표충비

김종직은 고려말 학자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이은 유학자로 사림파의 영수이자 영남학파의 종조(宗祖)로 꼽힌다. 단종과 세조를 초나라 의제와 항우에 빗댄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연산군 때 성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필화 사건으로 비화해 무오사화(戊午史禍)의 발단이 됐다.

 

밀양시 부북면 김종직의 생가 추원재. 바로 앞에 김종직 흉상을 세워놓았다. (밀양시 제공)
밀양시 부북면 김종직의 생가 추원재. 바로 앞에 김종직 흉상을 세워놓았다. (밀양시 제공)

이 일로 김종직은 사후 6년 만에 부관참시(剖棺斬屍)되고 정여창·김굉필 등 제자들도 유배형을 받았다가 중종 때 모두 복위됐다. 김종직 직계 후손은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개실마을로 옮겨 살았으나 밀양시 부북면에 그의 생가인 추원재(追遠齋)와 그를 배향한 예림서원(禮林書院)이 있다.

사명당은 불살생(不殺生) 계율을 깨뜨려가면서까지 왜군을 물리쳐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렸다. 왜군이 물러간 뒤에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협상을 벌여 외교 관계를 맺고 포로 3500여 명을 송환해왔다.

밀양시 단장면 표충사(表忠寺)는 해마다 사명대사 향사(享祀)를 지내는 한편 호국박물관을 지어 유품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무안면에는 국가에 환란이 닥칠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사명대사 비석 표충비(表忠碑)가 세워져 있다.

 

밀양시 무안면 홍제사에 모셔진 사명대사 영정과 땀 흘리는 표충비.
밀양시 무안면 홍제사에 모셔진 사명대사 영정과 땀 흘리는 표충비.

“광복군 아리랑 불러나 보세” 광복군가가 된 ’밀양 아리랑‘

오래전부터 밀양이란 지명을 익숙하게 만든 것은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로 시작되는 민요 ‘밀양 아리랑’이다. ‘진도 아리랑’, ‘정선 아리랑’과 함께 3대 아리랑의 하나로 꼽힌다. 다른 대부분 지역의 아리랑이 구슬픈 곡조에 한 서린 정서가 깃든 것과 달리 ‘밀양 아리랑’은 경쾌하고 흥겨운 세마치장단에 밝고 아름다운 노랫말이 특징이다. 물산이 풍족하고 인심이 넉넉한 고장의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밀양 아리랑’은 1930년대 ‘독립군 아리랑’으로 즐겨 불렸다. 광복군도 1940년대 ‘광복군 아리랑’이란 제목으로 애창했다. 1946년 간행된 ‘광복군가집’과 김구의 ‘도왜실기(屠倭實記)’에 실렸다. 4절로 이뤄져 있고 후렴은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광복군 아리랑 불러나 보세”로 바꿨다.

6・25 전쟁 때는 중공군도 개사해 불렀다. 1953년 펴낸 중공군 군가집 ‘조선지가(朝鮮之歌)’에 ‘파르티잔 아리랑(巴爾奇展阿藜朗)’이란 제목으로 수록됐다. 수많은 ‘아리랑’ 가운데 ‘밀양 아리랑’이 유독 흥겹고 따라 부르기 쉬운 데다 중국에서 활동한 항일투사 가운데 밀양 출신이 많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 포상 현황을 보면 올해 3월 말 현재 1만 8258명의 독립유공자 가운데 본적이 밀양인 인물은 93명이다. 창원(147명), 통영(111명), 함안(101명), 울산(97명)에 이어 경남에서 5번째다. 그 뒤를 합천(89명), 부산(83명), 동래(73명), 하동(70명), 김해(69명), 진주(64명) 등이 잇고 있다. 인구 비례로 따지면 밀양은 전국적으로도 최상위권이다.

암살 파괴 중심 무장투쟁 조직에서 조선의용대로 발전한 의열단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의 정신적 지주는 황상규다. 김주익이 세운 밀흥야학교에서 김주익의 아들 김원봉과 윤세주, 김상윤 등을 가르치다가 김주익의 누이동생과 결혼해 김원봉의 고모부가 됐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해 무오독립선언 서명에 참여하고 상해임시정부 재무위원과 북로군정서 길림지부 회계과장을 역임했다. 의열단 결성 과정에서도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1923년 1월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과 2월의 폭탄 반입 사건을 다룬 동아일보 호외. 왼쪽 사진은 의열단장 김원봉의 21살 때 모습이다.
1923년 1월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과 2월의 폭탄 반입 사건을 다룬 동아일보 호외. 왼쪽 사진은 의열단장 김원봉의 21살 때 모습이다.

의열단은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에서 천명했듯이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겠다”고 의기투합한 조직이다.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와 서장 암살을 시작으로 최수봉, 김익상, 김상옥, 김지섭, 나석주가 차례로 밀양경찰서, 조선총독부, 종로경찰서, 도쿄 황궁,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나석주 의거를 끝으로 의열단은 개별적인 암살·파괴에서 통일적인 군대 조직을 통한 투쟁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1926년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잡고 세운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해 국민혁명군 장교로 임관했다.

이들은 국공합작이 깨진 뒤 국민당의 북벌에 합세하고 공산당의 난창(南昌)봉기에도 참여하다가 국민당 장제스 후원을 얻어 1938년 조선의용대를 결성했다. 그러나 4년 만에 쪼개졌다. 본대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편입돼 김원봉이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을 맡았고, 화북으로 이동한 나머지 부대는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됐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당 계열의 팔로군과 함께 산시성(山西省) 태항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김원봉의 두 살 아래 죽마고우이자 동지인 윤세주는 이곳에서 전사해 묻혔다.

악질 친일경찰에게 따귀 맞고 북한으로 넘어간 김원봉

 

조선의용대 창설 당시의 김원봉 (KBS TV 화면 갈무리)
조선의용대 창설 당시의 김원봉 (KBS TV 화면 갈무리)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된 김원봉은 1945년 12월 환국했다. 여운형 등과 함께 좌우합작 운동을 펼쳤으나 여운형이 암살되는 등 정국은 혼미했다.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돼 따귀를 맞고 사흘간 통곡하기도 했다. 일제가 내건 현상금이 김구보다 훨씬 많을 정도로 독립운동의 핵심적 인물이었던 김원봉이 해방된 조국에서 이런 수모를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김원봉은 1948년 4월 김구·김규식·박헌영 등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그곳에 남았다. “왜놈 (앞잡이)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라고 심경을 털어놓았다는 일화가 월북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북한 정권의 초대 검열상(감사원장)을 지냈으나 1958년 반체제 인사로 몰려 숙청됐다.

김원봉과 함께 항일투쟁을 하던 의열단 동지들은 대부분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길을 걸은 독립운동가들도 2005년 이후 서훈됐다. 김원봉의 부인이자 북한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의 조카인 박차정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일제강점기 공산주의자와 거리를 두던 김원봉은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훈장을 받지 못했다. 문재인은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 영화 ‘암살’을 관람한 뒤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잔 바치고 싶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으나 대통령에 취임한 뒤로도 거센 반대에 부닥쳐 끝내 서훈하지 못했다.

밀양에서 3·1운동 만세 시위 8차례나 벌어져

의열단 결성에 앞서 일어난 3·1운동도 영남 지역 중에서는 밀양에서 가장 앞서 활발하게 펼쳐졌다. 전형표·윤치형·윤세주 등의 주도 아래 3월 13일 밀양 장터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14일 밀양공립보통학교, 15일 유림, 20일 안희원 장례, 4월 2일 밀양소년단, 4일 용회동 장터, 6일 부북면, 10일 청도면 등 8차례 열렸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된 디오라마. 1919년 3월 20일 밀양면에서 안희원 장례식을 이용해 일어난 만세운동 장면을 재현해놓았다. (밀양시 제공)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된 디오라마. 1919년 3월 20일 밀양면에서 안희원 장례식을 이용해 일어난 만세운동 장면을 재현해놓았다. (밀양시 제공)

이밖에도 1908년 밀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백운하,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된 김대지, 대종교 3대 교주 윤세복, 만주에 동창학교를 세운 윤세용, 일본군에 징집됐다가 광복군에 투신한 이언권 등도 밀양이 낳은 독립운동가들이다. 이처럼 밀양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것은 투쟁을 꺼리지 않는 오랜 전통에다가 김종직의 선비 사상과 사명대사의 호국 정신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밀양이 농촌 지역이긴 하지만 서울에서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에 자리 잡은 데다 경부선 철도와 낙동강 수운으로도 연결되고, 대구와 부산까지의 거리가 각각 100리(40㎞)밖에 되지 않아 신문물과 신사조도 비교적 일찍 들어왔다. 구한말부터 밀양의 선각자들은 학교를 지어 2세 교육에 힘썼다. 손정현이 1897년 세운 개창학교(밀양공립보통학교로 개칭)는 밀양 교육의 중심이었다. 3·1운동을 주도한 이들의 대부분이 이곳 출신이었을 뿐 아니라 3월 14일 만세운동에는 전교생이 참여했다. 이익구·이병희 부자가 설립한 화산의숙과 이병희의 정진의숙, 의열단원들을 배출한 전홍표의 동화학교 등은 민족 교육과 항일 정신의 요람이었다.

 

의열체험관 바로 옆 윤세주 생가 터에 세워진 의열기념탑과 3·13 만세운동 군상. 윤세주 집에서 등사기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장면을 형상화했다. (이희용 촬영)
의열체험관 바로 옆 윤세주 생가 터에 세워진 의열기념탑과 3·13 만세운동 군상. 윤세주 집에서 등사기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장면을 형상화했다. (이희용 촬영)

종교 기관들의 역할도 컸다. 개신교에서는 춘화교회와 밀양장로교회가 중심이었다. 표충사 부설 교육기관인 표충학원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운동을 지원했다. 과거에 급제한 유림들의 공부방이자 친목 공간인 연계소(蓮桂所)도 시민들의 회합·토론 장소로 쓰였다.

1927년과 1928년에는 신간회 밀양지회와 근우회 밀양지회가 각각 연계소에서 창립돼 애국계몽운동과 여성 지위 향상 등을 주도했다. 하남면 수산리 국농소(國農沼) 소작쟁의(1927년), 구두 제조 직공들의 동맹파업(1927년), 밀양자동차 동맹파업(1928년) 등도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한 주요 사건으로 꼽힌다.

김원봉 생가 주변을 항일운동 테마거리로 꾸며

밀양시 내일동과 내이동 사이에는 밀양읍성 서쪽의 해자로 파놓은 해천(垓川)이 흐른다. 이 일대는 김원봉과 윤세주 등이 자란 곳이다. 이들과 함께 이장수·전홍표·강인수 등의 생가 터가 밀집해 있다. 최수봉이 폭탄을 던진 밀양경찰서 터, 3·13 만세 시위가 벌어진 밀양 장터, 3·1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핵심 역할을 한 밀양공립보통학교·밀양교회·밀양청년회관·연계소 자리 등도 이웃해 있다.

 

밀양시 해천 항일운동 테마거리. 왼쪽 벽에는 조선의용대 사진이 붙어 있고 오른쪽 벽은 영화 ‘암살’의 한 장면과 시민들이 직접 그리고 쓴 타일로 장식했다. (이희용 촬영)
밀양시 해천 항일운동 테마거리. 왼쪽 벽에는 조선의용대 사진이 붙어 있고 오른쪽 벽은 영화 ‘암살’의 한 장면과 시민들이 직접 그리고 쓴 타일로 장식했다. (이희용 촬영)

밀양시는 2016년 이곳을 항일운동 테마거리로 조성해 각종 조형물을 설치했다. 2018년 김원봉 생가 터에 의열기념관을 준공한 데 이어 바로 옆에 의열체험관도 2022년 문을 열었다. 의열체험관에서는 100여 년 전 의열단원과 조선의용대원이 되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밀양시 해천변 김원봉 생가 터에 들어선 의열기념관(오른쪽)과 의열체험관. (밀양시 제공)
밀양시 해천변 김원봉 생가 터에 들어선 의열기념관(오른쪽)과 의열체험관. (밀양시 제공)

이에 앞서 2008년에는 교동 밀양시립박물관 옆에 전국에서 3번째로 밀양독립운동기념관도 세웠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은 독립운동가들의 유품, 사진, 디오라마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야외에는 ‘선열의 불꽃’이란 조형물과 함께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36인의 흉상을 세웠다. 이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인물은 김원봉이 유일하다.

<※ 1주 후에 하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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