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고바우) 등과 함께 신문 연재만화 1세대
북에 두고 온 아들 그리움으로 아동만화가 길로
단순한 오락 넘어 분단의 상처 치유하는 힘 제공
중년 이후 만화 창작 중단하고 통일운동가 변신
실향민 예술가의 삶
서울의 한 조용한 골목길, 낡은 작업실에서 들려오던 연필 긁는 소리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 시절, 그 소리로 아버지 김기율 화백(1922~2012)의 존재를 느꼈다. 연필 끝에서 태어난 아이 '도토리'는 아버지의 아픔이자 사랑이었고, 동시에 한국 아동만화사의 한 장을 연 상징적인 캐릭터였다. 같은 시대 김성환(고바우), 김경언(두꺼비) 등과 함께 일간신문 연재만화의 문을 열었다.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해방과 전쟁, 분단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통과했다. 하지만 그 상처를 만화라는 창조적 방식으로 치유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한 명의 만화가가 아닌, 한 시대의 정서를 품은 예술가로 기억되었다.
고향에 두고 온 아이, 도토리의 탄생
아버지에게 북청은 단순히 출생지가 아니었다. 거기엔 생이별한 아내와 북에 두고 온 셋째 아들 희근이를 포함한 세 자녀가 있었다. 아버지는 늘 그 아이들을 그리워했고, 그 감정이 도토리라는 캐릭터로 태어났다.
도토리는 작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캐릭터다. 북청에 두고 온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투영된 이 인물은 단지 상상 속 캐릭터가 아니라, 아버지의 삶과 기억 그 자체였다. 도토리를 통해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웃음을 주는 동시에, 자신의 상처를 조용히 털어놓았다.
황폐한 시대 속 한 줄기 웃음
1955년 서울신문에 <도토리와 봉이 김선달>을 연재하며 아버지는 대중적인 만화가로 자리매김했다. 이어서 <도토리군>, <도토리 금메달>, <무쇠돌>, <깜짝샘>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그의 캐릭터는 전국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다. 이 시기 작품들은 <새소년> <새벗> <소년중앙> <어깨동무> 같은 월간 잡지에 연재되며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특히 <이상한 짚신>(1968)은 전래동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아이들이 우리 문화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는 평을 받았다.
아버지의 만화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시대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되었다. 전쟁과 가난, 분단의 현실 속에서도 아이들이 꿈을 꾸고 웃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만화에 담고자 했던 철학이었다.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살아가는 힘'
도토리는 단지 귀엽고 유쾌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불의에 맞서고 약자를 도우며,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아이였다. 도토리를 통해 아이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자 했다.
1956년 연재된 명랑만화 시리즈는 기존의 교훈적이고 계몽적인 아동물과 달리,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재미와 교육을 절묘하게 결합했다. 아이들이 공감하고 웃으면서도 자연스럽게 공동체와 인간애의 가치를 배울 수 있도록 유도했다.
만화가에서 통일운동가로
1978년 아버지는 만화 창작을 멈추고, 이후 삶을 이산가족 문제와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바쳤다. 창작의 방향이 바뀌었을 뿐, 그 안에 담긴 정신은 동일했다. 아이들을 향했던 따뜻한 시선이 분단된 조국 전체로 확장된 것이다.
아버지의 에세이집 <두고 온 이야기>(1989), <잃어버린 동산>(1994) 등에는 한 실향민 예술가의 증언과 성찰이 담겨 있다. 이는 아버지에게 예술이 단지 미적 표현을 위한 도구가 아닌,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수단임을 보여준다.
전쟁과 이별이 남긴 삶의 흔적
1990년대 영국 유학 시절, 나는 6년 넘게 한국의 부모형제와 친구들을 만날 수 없었다. 학업을 마치고 영국 여성과 결혼했지만, 결국 아내와 두 아이 와도 5년 넘게 떨어져 살아야 했다.
한국전쟁 중 아버지는 북한에 남겨진 가족과 생이별해야 했다. 1951년 1월 4일 '바람 찬 흥남부두'에서 '맨발의 청춘'으로 혈혈단신 피난길에 오른 아버지는 남한에 정착했다. 전쟁 후 어머니를 만나 새 삶을 꾸렸지만, 마음속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았다. 61년 세월을 북한의 가족을 보고싶은 그리움 속에 살다 2012년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그 참혹한 전쟁으로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500만 명이 이산가족이 되었다. 아버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삶의 아이러니와 기적
나는 그런 아버지의 아들로, 전쟁 이후에 태어났다. 생각할수록 삶은 아이러니하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했지만, 그 잿더미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고, 사랑이 피어났다. 전쟁은 죽음을 남겼지만, 삶도 함께 가져왔다.
그래서 인생이란 참으로 신비하고도 기이하다.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가치가 있다. 그 아이러니와 기적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한 실향민의 아들로, 아버지의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오늘 기억해야 할 것들
오늘날 웹툰과 디지털 콘텐츠가 만화 주류가 된 시대에, 아버지 작품은 상업적 성공이나 기술적 세련미와는 다른 가치를 일깨운다. 그것은 진정성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 사회에 대한 책임, 그리고 독자에 대한 사랑이야 말로 오래도록 기억되는 작품의 본질이다.
아버지가 도토리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하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작지만 강한 생명력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라는 그 말.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여행은 북청에서 시작되어 서울에서 끝났지만, 그 정신은 내게 매순간 여전히 살아 있다. 도토리가 그랬듯, 작고 소중한 씨앗은 언젠가 커다란 나무가 된다. 절망 앞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다음 세대를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버지가 내게 남긴 따뜻한 유산이다.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을 맞아 나를 늘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해 주시던 아버지가 너무 그립다.
<만화가 김기율은>
▲ 1922년 함경남도 북청 출생
▲ 소년 시절 <소년구락부>라는 잡지 속의 그림을 따라 그림
▲ 대한청년단에서 반공 전단과 책을 만드는 일을 맡아 그림을 그림
▲ '고바우' 김성환의 도움으로 신문만화 연재와 잡지만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 서울신문 연재
- <도토리군> (1955년 8월 17일~1956년 3월 7일, 160회 연재)
- <신판 봉이 김선달> (1956년 4월13일 ~ 8월 24일)
▲ 아동만화 <도토리> 시리즈와 <무쇠돌> 시리즈를 광문당에서 발행
▲ 1961 한국만화자율회 심의부장
▲ 1972 한국만화가협회 제4대 회장
▲ 1978년 한국일보의 '두더쥐 두루뭉'이란 작품을 끝으로 만화창작에서 손을 뗌
▲ 저서 : <두고 온 이야기> <잃어버린 동산> <중국괴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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