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폴란드의 대독일 배상청구 막은 것과 유사

독-폴 관계의 ‘목에 걸린 생선가시’ 배상문제

유럽 대러 안보동맹의 약한 고리 독-폴관계

미일 주도 대중국 안보동맹의 약한 고리 한일관계

필리핀에 대한 ‘배상’보다 적은 일본의 한국 ‘보상’

이번 대선은 뉴라이트에 대한 역사적 심판돼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총리(맨왼쪽)가 취임식 다음날인 지난 5월 7일 처음으로 폴란드를 공식방문하면서 수도 바르샤바에서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오른쪽 고개숙인 사람)와 함께 의전행사에 임하고있다.  마이니치신문 5월 28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총리(맨왼쪽)가 취임식 다음날인 지난 5월 7일 처음으로 폴란드를 공식방문하면서 수도 바르샤바에서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오른쪽 고개숙인 사람)와 함께 의전행사에 임하고있다.  마이니치신문 5월 28일

“유럽의 한일관계”. 독일과 폴란드에 대해 잘 아는 어느 일본 외교관이 두 나라 관계를 그렇게 얘기했다고, 일본 <마이니치신문>의 객원 편집위원 니시카와 메구미(78)가 28일 칼럼에서 썼다. 외신(국제)부장과 국제분야 전문 편집위원을 지낸 니시카와 위원은, 전후(2차 대전 뒤) 한일 관계가 “역사(과거사)문제로 꼬이고, 보상(補償)과 사죄를 둘러싸고 관계가 오르락 내리락을 거듭해 온 것”처럼, “독일과 폴란드도 오랜 세월 전후 배상(賠償)을 둘러싸고 비슷한 관계를 이어왔다”며 그렇게 말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불법, 일제의 한국침략은 합법?

니시카와 위원에 따르면, 일본은 1910년 한국 강제합병 이후 35년간 한반도를 일본 국토의 일부로 강점했고, 독일은 1939년 당시 소련과 결탁해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뒤 폴란드를 침공해 1945년 패전 때까지 약 5년간 점령했다.

니시카와 위원은 일제의 한반도 35년 강점에 대해 얘기할 때는 ‘보상’이란 말을 썼고, 독일-폴란드 관계에 대해서는 ‘배상’이란 단어를 썼다. 보상이나 배상이나 잘못한 일로 피해자에게 끼친 손해를 갚아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나, 보상은 불법적이지 않은 과오로 인한 결과적 피해에 대한 변상하는 것이고, 배상은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에 대한 변상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가 다르다. 말하자면 니시카와 위원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강점은 국제법적으로 합법이었다는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데 비해, 독일의 폴란드 침략과 점령은 불법이었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보상론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은 미개하고 낙후한 한반도를 개화, 발전시켜 한반도인들을 행복의 길로 이끌기 위한 선의의 행위였으며, 그것은 국제법적으로도 정당했지만 뜻하지 않게 일부 한반도인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해 변상하겠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적인 교활한 식민사관의 전형일 수 있다.

윤석열 정권이 국가조직과 국책연구기관 등의 요직에 대거 기용한 ‘뉴라이트’ 인사들이 대체로 그런 자기모멸적 역사관과 세계관의 소지자들이다. 윤 전 대통령이 100년 전의 일로 일본을 무릎꿇게 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단순한 감정의 발로가 아니다.

이에 비해 니시카와 위원이 ‘배상’이란 말을 쓴 독일-폴란드 관계는 한마디로 불법침략이었다는 얘기다. 독일은 폴란드에게 배상해야 하지만, 일본은 한국에게 배상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로 읽어도 무방할 듯하다.

그래서 그는 그 짧은 문장 속에서도 그 두 단어를 분명히 구분해서 썼을 것이다.

폴란드를 점령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곳곳에 아우슈비츠 등의 인종말살 강제수용소를 지어 유대인들을 학살했고, 전쟁 말기에 바르샤바에서 일어난 시민봉기를 진압하면서 약 20만 명의 시민들을 학살하는 등 약 5년간의 점령기간에 폴란드 국민의 17%인 6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894-95년 청일전쟁과 동학 농민전쟁, 1904-05년 러일전쟁, 항일 의병전쟁, 을사늑약과 통감부 설치, 이후 3.1운동, 임시정부, 항일무장투쟁을 거쳐 일제 패망 때까지 반세기에 걸친 일제 강점 기간에 동원되고 착취당한 인적, 물적 피해를 수치로 계량하면 얼마나 될까.

독일의 폴란드 침략이 불법이었다면, 일본의 조선 침략도 당연히 불법이었다. 독일의 체코 주데텐 합병이나 폴란드 침공은 피해 당사국의 동의절차 없이 일방적으로 감행된 침략이었으므로 불법이고, 일본의 조선 침략과 병탄은 대한제국 왕실과 관리들이 자발적인 요청에 따른 것이었으니 합법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비열한 가해자들의 자기 기만이다.

 

총리 취임 다음날인 지난 5월 7일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총리(왼쪽)가 에마니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영접을 받고 있다.   마이니치신문  5월 28일
총리 취임 다음날인 지난 5월 7일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총리(왼쪽)가 에마니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영접을 받고 있다.   마이니치신문  5월 28일

폴란드와 독일 정권교체로 바뀐 유럽 외교지형

지난 5월 6일 새 독일총리에 취임한 중도 우파 기민련 당수 프리드리히 메르츠가 다음날 프랑스에 이어 폴란드를 방문했다. 독일과 프랑스는 새 총리 취임 직후 상대국을 방문하는 것이 관례로 돼 있었으나, 독일 새 총리가 취임 직후 폴란드를 방문한 것은 전례없는 일로, 장기간 알력을 빚어 온 독일-폴란드 양국관계의 재설정이 그 목적이라고 니시카와 위원은 짚었다.

독일-폴란드 관계의 장애물은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독일에 대한 폴란드의 과거사 배상요구였고, 또 하나는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독일 사민당의 올라프 숄츠 총리 정부가, 절박한 안보위기에 처한 폴란드의 공동대응 강화 요구에도 우크라이나 지원이나 대러시아 대응정책에서 지나치게 신중한 자세를 취하면서 양국 사이에 조성된 불협화음이었다.

2023년 총선 결과 숄츠 정권과 갈등을 빚던 폴란드 우파 민족주의 성향의 ‘법과정의당’(PiS) 정권이 물러나고 친유럽 중도파 정당 시민연합의 도날트 투스크가 12월에 새 총리로 취임한 뒤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올해 2월 치러진 독일 총선에서 우크라이나 지원과 대러시아 대응정책에 적극적 자세를 보인 중도 우파 기민련이 1당이 되고 메르츠가 5월 6일 새 총리에 취임한 뒤 독일과 프랑스, 영국, 그리고 폴란드가 손을 잡는 유럽 외교의 새로운 진영이 구축되고 있다. 여기에는 특히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개선이 관건적 요소다. 메르츠가 취임 직후 폴란드를 방문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는 소련 등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1990년대 초에 결성된 독일, 프랑스, 폴란드의 ‘바이마르 3각연합(동맹)’의 재활성화와도 연결된다. 유럽 안보문제 등을 협의하는 바이마르 삼각연합은 그러나 독일과 폴란드간의 역사문제, 특히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배상문제를 둘러싼 양국간 알력으로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 폴란드-독일 연결고리 부실로 삼각동맹 전체가 기능부전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독일에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해 온 폴란드 우파 민족주의 집단 PiS 정권 붕괴 및 친유럽 중도파 시민연합의 쿠스크 총리로의 정권 교체, 우크라이나 지원과 대러시아 공동대응에 적극적인 독일 메르츠 정권 등장으로 상황이 바뀌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EU에서 탈퇴한 영국까지 가세하면서 유럽 외교에서 공세적인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에 공동대응하는 새로운 전선이 구축되고 있는 것이다.

 

폴란드 그단스크에 있는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  로이터 연합뉴스
폴란드 그단스크에 있는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  로이터 연합뉴스

독일-폴란드 관계의 ‘목에 걸린 생선가시’ 배상문제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독일과 폴란드의 과거사문제, 특히 독일에 대한 폴란드의 배상금 요구다. 니시카와는 “2015년부터 2023년까지 집권한 법과정의당(PiS)은 약 13억 달러의 배상을 요구해 양국 관계가 냉각화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본 주재 독일 외교관이 “일본의 기분을 잘 알겠다. 우리도 폴란드로부터 거듭 같은 요구를 받고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한국 쪽의 배상요구를 받고 있는 일본이 독일과 동병상련의 처지라는 얘기까지 굳이 집어넣었다.

그런데 니시카와가 폴란드 PiS가 독일에 요구한 배상금 규모가 ‘약 13억 달러’(약 1조 8천억 원)라고 한 것은 착오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2023년 10월 총선에서 패배한 폴란드 PiS 정권이 독일에 요구한 배상금은 총 1조 3천억 유로(약 2000조 원)에 이른다.(폴란드 PAP 통신, 연합뉴스 2024년 9월 2일) 1945년 2차 대전 종전까지 자국민 약 600만명이 숨지고 수도 바르샤바를 비롯한 전국의 기반시설이 파괴된 것에 대한 배상 요구다.

이에 대해 독일은 폴란드가 1953년에 전쟁배상 요구 포기를 선언했다며, 전쟁 배상문제는 이미 종결된 사안이라고 거듭 주장해 왔다. 1945년 패전 뒤 옛 소련의 위성국이 된 폴란드는 독일(동독)에 대한 배상 요구 권리를 모두 포기했다. 2022년 10월 아날레나 베어보크 당시 독일 외교장관은 즈비그니에프 라우 폴란드 외교장관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도 “독일이 일으킨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고통이 폴란드에서 세대를 이어가며 전해지고 있다”고 사과했지만, 배상 문제는 이미 끝났다며 선을 그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의 지배 아래 있던 폴란드는 같은 시기에 동독을 점령하고 있던 소련의 압력으로 동독에 대한 배상 요구를 포기한다는 문서에 서명한 것이어서,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 유럽연합 고위관리 등에게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도 했다. PiS 정권 퇴진 뒤 집권한 투스크 정권도 독일의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라도스와프 시코르스키 폴란드 외무장관은 벨트TV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에 대한 윤리적 성찰은 금전적 배상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배상문제가 여전히 독일-폴란드 관계에 ‘목에 걸린 생선가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가시를 빼지 않고는 관계가 정상화될 수 없다.

유럽 대러 안보동맹의 약한 고리 독-폴관계

폴란드와 독일간 배상금을 둘러싼 갈등은 정권 교체 등의 변화에 따라 그 강도가 다소 달라지긴 하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 폴란드로 구성된 대러시아 안보 집단대응체제 강화에 중대한 걸림돌이다. 이는 마치 한일간의 과거사 및 강제동원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 문제를 둘러싼 한일간의 갈등과 반목이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려는 미국 주도의 한미일 준군사동맹체제 강화에 중대한 약점 내지 약한 고리인 것과 같다. 친일 친미적 윤석열 우익 정권 등장과 함께 일본의 사죄 및 배상 등 과거사 청산 요구가 사라지고 일본 자민당 우파 정권과 미디어들이 이에 환호하면서 한일간의 갈등이 일거에 해소된 듯 보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도전을 저지하려는 미일동맹이 주도한 한미일 준군사동맹과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구상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했으나, 미일에 투항했던 윤석열의 탄핵사태로 상황은 다시 급변할 가능성이 생겼다.

 

2024년 9월 6일 서울에 온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총리와 악수하는 윤석열 당시 대통령.  대통령실
2024년 9월 6일 서울에 온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총리와 악수하는 윤석열 당시 대통령.  대통령실

미일 주도 대중국 안보동맹의 약한 고리 한일관계

유럽의 대러시아 안보 공동대응체제에서 과거사 문제로 인한 폴란드-독일 갈등이라는 ‘약한 고리’가 취약점인 것처럼, 미일동맹 주도의 아시아태평양 또는 인도태평양의 대중국 안보공동대응체제에서도 일본의 과거사 미청산 문제로 인한 한일간의 갈등이라는 ‘약한 고리’가 중대한 취약점이다.

폴란드의 배상요구 막은 소련, 한국의 배상요구 막은 미국

한일관계와 폴란드-독일관계에서 닮은 점이 또 있다.

폴란드가 독일에 대한 배상금 요구를 포기한 것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주의권의 ‘종주국’으로 군림했던 소련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과,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 및 강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막은 것이 동서냉전의 맞상대였던 서방동맹의 ‘종주국’적 존재였던미국이라는 사실이다.

니시카와의 지적대로 소련은 폴란드가 독일에 대한 막대한 규모의 전쟁배상을 요구할 경우, 자국이 지배하던 같은 사회주의권 동독의 부실한 경제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보고 폴란드에게 배상요구를 포기하라고 압박했다.

마찬가지로 미국도 1951년 9월에 체결되고 다음해인 1952년 4월에 발효된 아시아태평양전쟁(2차 세계대전) 종결회담인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체결된 평화(강화)조약에서, 자국이 점령한 패전국 일본이 일제의 최대 피해자들인 한국(한반도)과 중국의 막대한 대일 배상 요구를 그 취약한 사회경제체제가 감당해낼 수 없다고 보고 일본의 전쟁배상을 최소화하는 한편 한국과 중국의 배상 요구 자격 자체를 말살해 버렸다. 한국(남북한)과 중국(베이징과 대만)을 강화회의에 초청하지도 않았고 교전국 지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에 맞서 싸운 것은 미국만이 아니었다. 일제 관동군의 수백만 무장병력을 만주와 중국대륙에 붙들어 놓음으로써 미국의 대일전 승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대한 기여를 한 것이 일제 패망까지 멈추지 않았던 한국과 중국의 광범위한 항일전쟁이었다.

 

1951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미일 강화조약에 서명하는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총리(앉은 사람)와 이를 지켜보고 있는 미국 일본 관리들.  위키피디아
1951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미일 강화조약에 서명하는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총리(앉은 사람)와 이를 지켜보고 있는 미국 일본 관리들.  위키피디아

일본의 전쟁배상을 최소화해 준 미일 강화조약

이런 점 때문에 미국은 1946년부터 준비한 일본과의 강화조약 초안 작성 단계에서 한국을 일제와의 교전국이자 연합국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했다. 그것은 한국(한반도)이 강화조약 서명국으로 참여해 전범국 일본으로부터 전쟁범죄 행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고 재발방지 약속까지 받아낼 자격을 부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냉전정책이 본격화되는 1947년 트루먼 독트린과 1949년 중국대륙 공산화, 1950년 한국전쟁(6.25사변)을 거치면서 미국은 본격적인 대소련 냉전 대결체제로 돌입했고, 일본을 대사회주의권 대응 교두보(요새)로 재구축하면서 대일 점령정책을 수정했다. 유럽의 ‘마셜플랜’처럼 일본을 강력한 반공동맹국으로 키우기 위한 지원과 함께 자국 시장을 일본에 개방하는 한편(‘역코스’ reverse course), 일본을 취약하게 만들 수 있는 일제 침략 피해국들의 배상 요구를 차단하거나 최소화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5장 ‘청구권 및 재산’ 제14조는 이렇게 돼 있다.

“일본이 전쟁 중 일본에 의해 발생한 피해와 고통에 대해 연합국에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생존 가능한 경제를 유지하면서 그러한 모든 피해와 고통에 완전한 배상을 하는 동시에 다른 의무들을 이행하기에는 일본의 자원이 현재 충분하지 않다는 것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미국은 1.평화(강화)조약에서 배상 청구권을 가지는 것으로 규정된 국가, 2.일본군에 점령당해 피해를 받은 국가,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나라들에게는 ‘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박탈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5장 '청구권 및 재산'의 제14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5장 '청구권 및 재산'의 제14조

한국 중국의 대일 배상요구 자격 박탈한 미국

초안 초기 단계에서 한국(한반도)에 교전국(연합국) 지위를 인정했던 미국은 냉전이 본격화하자 일본을 강화하기 위해 위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국가에 한국 중국을 포함시켜 교전국 지위를 박탈했다.

소련이 동독을 서방동맹에 대한 교두보로 만들기 위해 독일에 대한 폴란드의 배상 청구를 막은 것처럼, 미국은 전범국 일본을 자국의 동아시아 냉전 교두보로 만들기 위해 한국의 대일 배상 청구를 막았다.

한국이 청구권협정을 맺은 것은 일본 패전 20년 뒤인 1965년이었으며, 그때 받은 유무상 5억 달러는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한국전쟁을 고도 경제성장 발판을 마련한 일본이 한국에게 준 ‘경제지원금’ ‘독립축하금’ 명목이었다. 즉 일본은 자신들의 한반도 침략과 강점의 불법성과 전쟁책임을 인정하지도, 배상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이런 드라마를 만들고 지휘 감독한 것이 미국이었다.

필리핀에 대한 배상보다 적은 일본의 한국 보상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당시 일본이 위의 조건에 맞다며 배상한 나라 중에는 필리핀과 베트남, 버마(미얀마), 인도네시아가 들어 있다. 일본은 버마에게 2억 달러, 필리핀에게 5억 5천만 달러, 인도네시아에게 2억 2308만 달러, 베트남에게 3900만 달러 등 총 10억 1208억 달러를 배상했고, 관련 협정은 1955년 11월 5일부터 1959년 5월 13일 사이에 체결됐다.

즉 반세기에 걸쳐 침략과 강점에 시달린 한국이 미국의 각본대로 1965년에야 일본으로부터 경제지원금 형식으로 받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합계 5억 달러는 1942년 1월부터 1945년 2월까지 3년여 동안 일본군에 점령당한 필리핀이 받은 배상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얙수였다.

“배상문제는 완전히, 불가역적으로 끝났다‘는 일본

그것으로 한일간의 배상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끝났다”는 것이 일본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2018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징용공)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일본 가해 기업들에게 배상확정 판결을 내린 한국 대법원의 결정은 그런 일본정부의 주장을 뒤엎은 최초의 공식 판결이었다. 대법원은 일본정부는 일제 침략과 36년 강점 자체가 불법이었다는 사실과 그에 따른 사죄와 배상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 문제를 얼버무리며 덮어버린 1965년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에 토대를 둔 뒤틀린 한일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광복 이후 최초의 일이었다.

아베 신조 정권이 한국에 대한 반도체 첨단 장비부품 수출까지 막으면서 문재인 정부 전복을 꾀했을 정도로 그것은 일본에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대법원의 결정이 2차 대전 이후 한일관계와 일본 대외정책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국과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재편한 아시아태평양 전후 질서의 기본이념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윤석열과 뉴라이트는 미국과 아베의 일본을 동정하고 지지하면서 문재인 정부와 한국 대법원을 비판하고 질타했다.

 

뉴라이트가 장악한 윤석열 정부 산하 역사관련 기관.  역사문제연구소
뉴라이트가 장악한 윤석열 정부 산하 역사관련 기관.  역사문제연구소

이번 대선은 뉴라이트에 대한 역사적 심판돼야

전범국 독일에 대한 폴란드의 배상 청구 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듯이, 전범국 일본에 대한 한국(한반도)의 배상 청구문제도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했다.

독일은 그래도 지난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국들과 공동의 역사 교과서를 만들 정도로 반성하고 수백억 달러의 돈을 지금까지도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보상금으로 지불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래놓고 일본은 정권교체가 이뤄질 경우 이재명 정부가 '반일'정책을 펼 것이라며 걱정하고 있다. 그들은 제대로 된 관계 '정상화' 노력을 '반일'로 호도하면서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고수하겠다는 자세를 견지한다.

문제 해결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강점(식민지배)이 불법 부당한 것이었음을 일본이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배상, 재발방지 약속을 한 뒤에야 제대로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지난 과오를 인정하고 바로잡기를 바라는 게 연목구어일지라도, 최소한 한일간의 그런 교정과정을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예컨대 이런 문제에서조차 일본과 미국 편을 든다. 이번 대선은 그런 뉴라이트 우익 집단에 대한 역사적 심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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