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산 집단안보의 허상 드러낸 아르메니아 사건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주변 국가들의 긴장도가 부쩍 높아졌다. 침공 직전만 해도 러시아는 주변 국가들과 안보 및 협력을 숱하게 강조했다. 그리고 주변 국가들 역시 구소련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단합을 위한 이런 러시아의 노력에 대해 어느 정도 호의적이었다. 20세기 동안 쌓아 놓은 경제 및 인적 교류, 인프라 구축, 상호 프로젝트가 많았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런 상황을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침공 이상으로 러시아에 대한 불신과 지역 긴장을 높인 사건은 아르메니아 사건이었다.
러시아의 도움 절실했던 러시아의 동맹국
아르메니아는 한국인에게 다소 낯선 나라일 것이다. 일상에서 이름을 듣기 힘든 먼 나라이고 국제뉴스에서 자주 등장하는 국가 이름도 아니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와 튀르키예 사이의 캅카스 산맥에 위치한 작은 나라다. 튀르키예와 이란,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조지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구소련 회원이었으며 오래 전부터 러시아의 중요한 파트너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맞서기 위해 2002년 러시아의 주도로 창설한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의 첫 회원 중 하나이기도 하고 러시아와 군사동맹, 경제 교류, 민간 협력 등 매우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1991년에 소련이 붕괴되면서 아르메니아는 바로 이웃나라인 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을 벌였다. 이유는 ‘나고르노카라바흐’라는 동네 때문이었다. 이 동네는 지리적으로 좀 독특하다. 아제르바이잔으로 둘러싸여 아르메니아와 완전히 동떨어진 지역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자신의 영토 속에 있는 동네이니 당연히 아제르바이잔 땅이라는 입장이고 아르메이나는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99%가 아르메니아 사람들이니 역사적으로 볼 때 당연히 자신의 땅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벌어진 제1차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은 무승부로 끝났다.
러시아가 전쟁을 중재하기 위해 나섰다. 무력충돌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러시아 군대를 주둔하키고 그 동안 ‘평화유지’를 해 왔다. 하지만 분쟁은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충돌이 간간이 발생해 두 국가 간 관계 정상화를 막았다. 그러다가 코로나19가 한참이었던 2020년 7월에 또 전쟁이 일어났다. 아제르바이잔은 군대를 동원하여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완전히 탈환하려 했으나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 그해 11월에 양측은 협상을 통해 정전조약을 맺었지만 2023년에 다시 치열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러시아의 외면 속 전쟁 패하고 땅 빼앗겨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반응은 싸늘했다. 아르메니아에 주둔한 러시아 군은 아르메니아 군을 도와주지 않았고 그냥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러시아가 이러니 아르메니아는 자신이 속한 ‘집단안보조약기구’의 도움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이 기구는 나토와 비슷하게 ‘상호안보보장 조항’도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회원국가가 침략을 당하거나 요청을 하면 모든 회원국가는 도와줘야 한다는 조항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회원국가 중 군대가 가장 센 러시아가 ‘양측은 협상을 통해 빨리 평화를 찾기 바란다’는 형식적인 말만 하면서 실제적인 도움을 거절했다. 아제르바이잔 뒤에 있는 튀르키에와 싸우고 싶지도 않고, 온 나라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였다. 이유가 뭐든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아제르바이잔보다 약한 아르메니아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나게 되었다. 수십 년 동안의 영토 분쟁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을 피하기 위해 수십만 명이 늦은 밤에 짐을 싸서 아르메니아 쪽으로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메니아 땅이었던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에 합병되었고 아르메니아는 이 땅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 에피소드는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미국 대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과 같은 ‘더 시끄러운’ 국제 뉴스가 나오던 시절이라 캅카스 산맥 작은 나라에서 벌어진 비극은 이런 뉴스 폭포 뒤에 묻히고 말았다. 하지만 러시아 주변에 위치한 국가들은 이를 무거운 마음으로 지켜봤다. 이 사건은 러시아와 함께 다양한 동맹 관계를 맺은 국가들 사이에 러시아에 대한 불신 분위기를 조성한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자기의 ‘형제자매’ 국가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군사동맹인 아르메니아에 대해 배신이라고 할 만한 행위를 함으로써, 러시아의 ‘유라시아 안보공동체’ 이니셔티브라는 것이 얼마나 불안하고 취약한 것인지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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